11화
“대위님, 저는 이만….”
“샐리, 다음은 입술을 베여 줄래?”
턱을 틀어쥔 손을 떼어 내려 몸부림치다 멈칫했다. 설마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정체까지 다 알고 이러는 걸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샐리는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레 치마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지?”
“대위님!”
샐리는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턱 아래까지 바짝 끌려갔다.
“직접 베어 물면 되는데.”
캠든의 흡혈귀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순간 샐리는 그의 입을 왼손으로 틀어막았다. 손을 떼어 내고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려는 남자와 곧 몸싸움이 벌어졌다.
제아무리 샐리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해도 체격이 월등히 좋은 군 장교를 한 손으로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아직 최후의 수단을 꺼낼 때는 아니었다. 결국 주머니 속에서 그 최후의 수단을 쥐고 있던 오른손까지 꺼내 싸움에 동원해야 했다.
눈을 찌르려다 손목을 덥석 잡혔다. 윈스턴은 샐리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고 들어 올렸다.
공중에 뜬 몸이 딱딱한 것에 놓이는 순간 샐리의 발길질에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서류와 펜 꽂이가 카펫으로 추락했다. 발은 목표대로 윈스턴의 명치를 세차게 가격했으나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잘 싸우네. 남자 형제라도 있어? 아니면 어디서 훈련이라도 받았나?”
윈스턴에게 잡힌 발목을 비틀어 빼려다 굳었다. 싸우면 정체를 들킨다. 싸우지 않으면 저 더러운 왕정의 돼지 새끼와 꼼짝없이 몸을 섞어야 한다.
혼란한 머릿속에서 방법을 찾아 헤매는 샐리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녀가 저항을 멈추자 윈스턴은 몸싸움을 하느라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 몇 가닥을 뒤로 넘기며 웃었다. 차분한 태도와는 달리 몸은 더욱 달아올랐는지 바지의 앞섶이 조금 전보다 솟아 있었다.
“난 아직도 궁금하거든. 너와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대위님, 보내 주세요.”
“왜 그러지? 아, 그렇지.”
샐리의 단호한 거절을 윈스턴은 가볍게 여겼다. 말끔한 손이 장교복 재킷의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검은 물건을 꺼내 책상에 누운 샐리의 가슴에 놓았다.
“난 보복만큼 보답도 확실히 하는 사람이야.”
그가 준 건 지폐가 가득 차서 묵직한 지갑이었다. 돈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는 돈을 쥐여 주며 다리를 벌리라고 강요하는 걸까.
아직 그의 시험이 끝나지 않은 것뿐이기를….
“대위님, 낮에는 제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저 결혼할 사람이 있어요. 배신하고 싶지 않아요.”
샐리의 애걸을 무시하고 무릎 위로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 속으로 손이 불쑥 들어왔다.
“샐리, 그런 말을 할수록 더 달아오르는 법이야. 넌 남자를 잘 모르나? 아니, 너무 잘 아는 건가.”
“대위님! 그만!”
그의 급소를 차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가던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자 샐리는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 윈스턴의 낯에서 가벼운 미소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건… 뭐지?”
오른쪽 스타킹의 밴드 아래에 박힌 물건이 단숨에 빠져나갔다. 검은 치마 밖으로 은빛 리볼버가 총구를 드러내는 순간 샐리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침착해. 침착해야 해.
샐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사이 윈스턴은 리볼버를 제 눈앞으로 들었다. 그의 손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권총을 응시하던 싸늘한 시선이 그 너머 샐리의 얼굴로 향했다.
“이건 뭐냐고, 내가 물었을 텐데.”
권총이요. 이렇게 바보처럼 굴었다가는 오늘따라 얕은 그의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이성을 잃은 후 샐리의 운명은 윈스턴도 모를 것이다.
“제 약혼자가… 줬어요.”
“약혼녀에게 금지된 물건을 줬다.”
왕정이 복고된 후로 민간인은 경찰이나 군에서 특수 허가를 받은 게 아니라면 총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2차 반란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 놈이지? 뒷골목 건달 같은 놈인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착한 남자예요.”
반은 진담 반은 그럴듯한 연기를 위해 약혼자의 편을 들었더니 윈스턴의 매끈한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제가 고문실에서 일한다니까 위험하다고 어렵게 구해 준 것뿐이에요. 저도 금지된 물건인 건 알고 있어요, 대위님. 그렇지만….”
“위험하다니. 샐리, 이 저택 안에서는 아무도 네게 손대지 않을 거야. 내가 단단히 경고해 뒀거든.”
네가 손대고 있잖아.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되삼켰다. 블루머의 왼쪽 끝단 속에선 윈스턴의 오른손이 맨살을 여전히 가볍게 쥐고 있었다.
“내 말을 어길 만큼 간 큰 녀석은 너뿐일 텐데.”
낮에 고문실에 혼자 들어간 일을 말하는 걸까. 윈스턴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샐리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시선을 떨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본부에서 철수 명령을 내리기 전까진 정말 순한 양이 되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지내야 할 듯했다.
블루머 속에 묻혀 있던 엄지가 허벅지 안쪽을 한 번 쓰다듬자 샐리는 흠칫했다.
다시 덮치려는 걸까. 불법 무기 소지를 빌미로 삼아 협박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아니, 빌미가 없어도 덮치기부터 시작한 인간 아닌가.
눈을 살짝 치켜뜨고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윈스턴의 시선은 리볼버에 고정되어 있었다.
곧 다섯 개의 손끝이 맨 살갗에서 스타킹으로 홧홧한 궤적을 남기며 빠져나갔다. 그러나 안도하기는 일렀다.
윈스턴은 예리한 눈으로 리볼버를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리볼버의 탄창을 열고 총알을 뽑아 확인해 보더니 탄창과 총열 사이에 새겨져 있어야 할 일련번호가 지워져 있는 걸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샐리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쏴 본 적 있나?”
총기를 수없이 다뤄 본 그가 모를 리 없다. 저 리볼버는 관리가 잘된 물건이라는 걸. 쏴 본 적 없다고, 약혼자가 주길래 가지고만 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한두 번…. 캔 같은 걸 재미 삼아….”
“그리고?”
“한 달 전에 시내에서 강도를 만나서….”
“맞혔어?”
“네….”
윈스턴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물었다.
“나는?”
“네?”
“쏘려고 했어?”
샐리는 잔인한 장난기가 번뜩이는 눈을 응시하다 천천히, 그리고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니라고 하면 거짓인 걸 알 테니.
“하….”
윈스턴은 또 웃음을 터트렸지만 조금 전의 웃음과는 결이 달랐다. 웃다 제 아랫입술을 짓씹는 게, 허를 찔려 당황한 기색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를? 재밌네.”
탁, 탄창이 닫혔다. 가소롭다는 투로 뱉은 말에 여전히 미약한 당혹감이 실려 있었다.
“쏘면 죽잖아.”
“…네.”
“난 널 죽일 생각까진 없는데.”
샐리는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겁탈은 하되 살려는 준다니. 감사하다고 해 줘야 하나? 고작 몸만 탐하려던 주인을 죽이려 했으니 죄송하다고 사과라도 하길 바라나?
“나는 재밌는데 넌 재미가 없나 봐?”
윈스턴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저자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표정이 단정한 얼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게 아니기에 샐리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그저 숨죽인 채 빠져나갈 빌미만 바쁘게 찾을 뿐이었다.
“이걸로 휘저어도 재밌을 것 같은데.”
그가 리볼버의 총구를 위로 들곤 허공을 휘저었다.
“너무 작네. 뭐, 너도 작겠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졌지만 직감이 외쳤다. 그가 위험한 짓을 하려 한다고.
“대위님….”
샐리는 구겨진 앞치마가 더 구겨지도록 두 손으로 움켜쥐며 훌쩍였다. 무리수라 할지라도 무슨 수든 두어야 했다. 곧바로 새하얀 손등으로 눈물이 톡톡 떨어졌다.
“또 울어?”
윈스턴의 목소리에서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저 이제 쫓겨나는 건가요?”
얼굴을 일부러 못나게 일그러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윈스턴이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총구를 위로 들고 있던 손이 점점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통했다.
어머니가 그랬다. 눈물 작전은 너무 자주 쓰면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통한다’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냐에 달렸다.
“쫓겨, 나면, 끅, 안, 되는, 데.”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훔쳐보니 윈스턴의 바지 앞섶이 가라앉고 있었다. 샐리는 더욱 꺽꺽대며 오열했다.
“대위니임, 흐흑….”
재미없다.
레온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여자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처럼 굴고 있으니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책상 끝에 힘없이 매달린 다리도 야릇해 보이지 않았다.
넌 끝까지 나를 물어뜯어야지.
궁지에 몰린 생쥐는 고양이를 물겠다고 덤벼야 재미있는 법이다. 전의를 완전히 잃고 찍찍 울어 대는 건 흥만 떨어트렸다.
차라리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간 큰 고백을 했을 때 덮쳐 버릴 것을. 괜스레 놀리며 시간을 끌다 분위기가 식어 버렸다.
“가 봐.”
무뚝뚝하게 명령하는 순간 여자가 소매에 파묻혀 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동그랗게 뜬 눈, 발갛게 물든 눈가, 훌쩍이느라 움찔하는 콧방울. 기회를 포착한 생쥐 같았다.
한번 가 봐. 내게서 도망가 봐.
레온은 사냥감을 덮치기 직전의 고양이처럼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