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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3화 (13/240)

13화

“차라리 쏘게 둘걸 그랬나?”

레온은 리볼버를 다시 서랍에 넣고 닫았다. 열쇠로 잠그지는 않았다.

절도는 조금 더 큰 죄일 테니.

게다가 주인의 말을 어기는 건 이 저택의 담장 안에서는 중죄일지도. 원칙을 어겨 가며 고문실로 끌고 갈 빌미가 될 수 있을까.

레온은 입매를 비틀다 눈매를 날카롭게 좁혔다. 희뿌옇게 옅어져 가는 핏자국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어쩌면 그 눈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피 냄새 때문일지도. 다른 여자라 하더라도 피 냄새를 풍긴다면 이처럼 욕망이 들끓을까?

취향 한번 참 지독하군.

그는 쓰게 웃으며 일어섰다. 카펫은 처참한 꼴로 부서진 재떨이의 파편과 재로 엉망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그 하녀가 그를 향한 불평을 투덜거리며 이 난장판을 치울 것이다.

레온은 하녀에게 보내는 격려의 ‘메시지’가 잘 보이도록 펼쳐 카펫에 떨어트렸다.

***

양털 구름 사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스몄다. 바람에 흩날리는 다갈색 머리칼이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구릿빛으로 반짝였다.

외출하기 알맞은 날이었다. 윈스턴 못지않게 예측을 불허하는 4월의 날씨가 어떤 변덕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윈스턴 저택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인 헤일우드까지는 자전거로 10분 거리였다. 샐리는 할인 사인을 크게 내건 잡화점을 지나 3층짜리 벽돌 건물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때마침 점심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창문에 걸린 ‘폐점’ 사인을 돌려 ‘개점’이라는 글자를 내걸던 우체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의 남자가 검지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샐리에게 눈인사를 하더니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브리스톨 양.”

“안녕하세요.”

샐리는 안으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이 자그마한 마을 우체국의 직원은 국장을 포함해 넷이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셋뿐이었다.

“피터 씨는 쉬는 날인가요?”

“오늘은 우편 열차가 늦는 바람에 역에 있답니다.”

우편배달부로 위장한 탓에 온종일 마을을 돌아다니는 피터이지만 점심은 항상 여기서 먹는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맞춰 왔는데 하필 오늘은 없다니.

어제 윈스턴에게서 얻은 돈을 본부에 군자금으로 보내려고 가져왔다. 피터에게 송금을 맡기면 추적할 수 없게 처리해 줬다. 다른 직원에게는 비록 위장된 정보라도 수취인에 대해 알려 주는 건 위험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올 겁니다, 하하.”

샐리가 낡은 가방끈을 그러쥐고 한숨을 내쉬자 우체국장이 긴 콧수염을 손끝으로 비비다 웃었다. 우체국 사람들은 샐리가 피터에게 장밋빛 호감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럴 리가.

비록 임무 때문에 수수한 꼴로 다니지만 남자를 보는 눈도 수수하진 않았다.

‘시간을 좀 보내다 올까?’

여기서 건물 두 개만 지나면 마담 베노아의 카페가 나온다. 오랜만에 작은 사치를 부려 볼까 하는 찰나였다. 중년의 여인이 어린아이를 셋이나 끌고 비좁은 우체국 안으로 들어왔다.

곧 아주머니와 아이들의 목소리 탓에 시끌벅적해졌다. 샐리는 나가려다 말고 구석의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문을 단단히 닫고 문에 난 작은 유리창으로 밖을 곁눈질했다. 다들 제 일로 바빠 이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샐리는 귀퉁이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가방에서 지갑을 찾아 열었다. 제일 큰 동전을 한 개, 두 개, 세 개도 모자라 네 개를 집으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거리 전화는 비싸기에 잘 하지 않지만 이건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촛대 바닥처럼 생긴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고 동전 투입구에 돈을 넣었다. 다이얼을 하나 돌리자 곧이어 젊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장거리 전화입니다.]

“안녕하세요. 헤일우드의 블랙번입니다.”

샐리는 전화기에 달린 송화기로 몸을 기울였다. 교환수가 상대에게 전해 줄 이름인 블랙번은 철수 요청이라는 뜻이었다.

“브레이턴의 크로포드 1499번으로 걸어 주세요.”

뒤이어 지역명과 상대방의 교환 회사 이름을 댔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교환수의 목소리를 끝으로 딸깍거리는 기계음만 한참 이어졌다.

샐리는 초조하게 부스 밖을 기웃댔다. 아이를 데려온 여인은 소포를 다 부치고도 떠날 생각이 없는지 책상 뒤의 여자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분은 더 소란스럽게 해 주길.

‘그래, 엉덩이를 걷어차 줄 만하지.’

부스 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수다에 홀로 맞장구를 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도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긁히다 못해 빛이 다 바랜 가방 버클을 손으로 문지르는데 누가 우체국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피터인가 싶어 고개를 드는 찰나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헤일우드의 블랙번?]

샐리의 약혼자는 누군지 묻지도 않고 철수 요청 암호부터 읊었다.

“맞아.”

[…뭐? 네가?]

헤일우드에 있는 피터나 프레드의 목소리를 기대했는지 적잖게 놀란 투였다.

[무슨 일 있어?]

그는 오랜만에 소식이 닿은 약혼녀에게 별다른 안부 인사 없이 본론으로 향했다. 교환수가 통화를 여전히 듣고 있을 수도 있기에 이름 한번 부르지 않고 모든 말을 모호하게 에두른 대화가 이어졌다.

“집에 가고 싶어.”

지미도 알 것이다. 투정 부리는 말투는 위장일 뿐이라는 걸. 샐리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법이 없으니까.

[왜 그래? 엄마 병원비는 어쩌고?]

‘엄마 병원비’라는 말은 ‘네 임무’로 고쳐 들어야 했다.

“고용주가 이상해.”

[이상하다니.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 오기 전에 한 말 잊었어?”

어릴 적 애빙턴 비치에서 윈스턴과 마주쳤던 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경고했으니 잊었을 리 없다. 수화기 너머에서 긴 한숨이 들려왔다.

[하지만 넌 아직 안 잘렸잖아.]

아직 체포되지 않았으니 들킨 건 아니지 않느냐는 소리였다.

“곧 잘릴지도 몰라.”

[아니라고 잡아떼. 잘하잖아. 어차피 증거도 없을 텐데. 그렇지 않아?]

이번에는 샐리가 송화기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네가 필요해.]

지미는 제 약혼녀가 어떤 말에 가장 약한지 잘 안다. 젖먹이이던 시절부터 같이 커 와서 친남매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샐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곤 멈췄다. 누구에게도, 아니 그 누구보다도 약혼자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꼭 해야만 했다. 찰나의 망설임을 끝낸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내쉬는 숨에 털어놓았다.

“어제 그자가 날 덮치려 했어.”

수화기 저편에서는 정적이 이어졌다. 기차로 다섯 시간은 족히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

겁탈당할 뻔한 연인을 향한 걱정? 당장 그녀를 윈스턴의 더러운 손아귀에서 빼내야겠다는 결심? 약혼녀를 범하려 한 더러운 짐승을 향한 분노?

설마, 공작 대상의 눈에 불순하게 띄는 바람에 작전을 망치게 된 동지를 향한 실망?

[정말이야?]

모두 틀렸다. 샐리는 허탈한 분노를 터트렸다.

“그럼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하겠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닌 거 너도 잘 알잖아. 내가 아는 그자와 너무… 맞지 않으니까.]

혁명군의 수장인 지미가 1급 주의 인물인 윈스턴의 특성을 모를 리 없었다. 윈스턴은 비록 수법이 더럽기 짝이 없는 자라 해도 아랫도리만은 깨끗하다는 게 일관된 정보였다. 그러니 그도 안심하고 제 약혼녀를 윈스턴의 본거지에 투입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태 일관되던 정보와 어긋나는 진술이 샐리의 입에서 처음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서운함과는 별개로 단번에 믿기 힘든 소리라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샐리는 지미에게 위기감을 더해 줄 말을 덧붙였다.

“치마 속에 숨겨 둔 걸 뺏겼어.”

[…그런데도 잘리지 않았어?]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거야.”

윈스턴이 그녀만 다르게 대하고 있다. 다음 행동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샐리는 지미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리며 고민했다.

다른 일도 털어놔야 하나. 윈스턴이 어제 그녀의 피를 빤 것도 모자라 피를 닦은 손수건으로 수음을 한 증거를 집무실 바닥에 보란 듯이 남겨 놓았다고.

아무리 가족이나 다름없는 약혼자라지만 이런 이야기는 너무도 치욕스러웠다.

“나 시간 없어.”

전화 요금이 곧 바닥날 것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지미가 연인을 타이르는 목소리로 지령을 내렸다.

[친구 집에 가 있어. 어른들과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전화할게.]

간부들과 논의해 봐야겠으니 여기서 전차로 한 시간 거리인 윈스포드 시의 안가에서 대기하라는 말이었다. 샐리는 곧바로 전화를 끊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돈은 다음에 보내야 하는 걸까. 피터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샐리는 우체국장에게 눈인사를 하고 우체국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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