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넝마 조각처럼 침대에 버려진 그레이스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몇 시간 동안 벌어져 있던 다리를 오므린 게 다였다.
찢어진 브래지어는 못 쓰게 됐다. 블라우스와 하녀복이라도 여며 가슴을 가리고 싶었지만 옷은 건드리기도 싫었다. 온몸에 정액을 수도 없이 흩뿌려 대어서 살갗이 끈적해지고 하녀복이 온통 축축이 젖었다.
“…….”
끝나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건 매우 낙천적인 기대였다. 울 힘조차 없었으니까.
우습게도 지금은 슬픔이나 분노보다는 안도감과 행복감이 더 컸다.
‘드디어 끝났어.’
물소리가 끊어졌다. 곧 남자가 수건을 두른 채 나오더니 침대에 걸어 두었던 옷을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천박한 짐승이 금욕적이고 우아한 귀족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넥타이까지 단번에 완벽한 모양으로 맨 윈스턴이 침대 옆에 서서 그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비누 향이 풍겨 왔다. 아직도 할딱이는 그녀와는 달리 그는 호흡이 차분해져 있었다.
저 단정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조금 전 여자 위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헐떡대던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손목을 묶은 밧줄을 풀어 주더니 그레이스의 허벅지로 손을 옮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윈스턴이 갑자기 가터벨트의 클립을 스타킹 밴드에서 하나씩 떼어 내기 시작했다. 그가 블루머를 벗기자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전리품을 챙기는 건가. 하지만 이런 변태적인 짓도 윈스턴의 예상을 뛰어넘는 잔인성 앞에서는 너무나 평범한 일이었다.
“잘 먹었다고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그레이스의 피와 윈스턴의 정액으로 얼룩진 속옷을 지미에게 보내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예의를 아는 사람이니까.”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 더러운 천을 반듯하게 접어 재킷 안쪽에 넣었다. 그레이스는 사색이 되어 윈스턴에게 매달렸다.
“제발 그러지 마. 뭐든 할게.”
그는 그레이스의 끈적한 손을 뿌리치고 일어서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그 새끼와 결혼하고 싶나 보지? 네 위대하신 총사령관께서 적에게 다리를 기꺼이 벌린 여자를 원할까?”
이 남자, 왜 난 꺼내지도 않은 결혼 이야기를 멋대로 입에 올리는 걸까.
“그런 건 상관없어. 제발, 원하는 대로 다 해 줬잖아. 대체 나를 그렇게까지 짓밟아서 뭘 얻고 싶은 거야? 우리 다시 거래해. 응? 내게서 또 얻을 게 있을 거 아니야.”
레온은 어금니를 으득 악물었다. 상관없다는 말 후로 이어진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리들 양, 그 자식이 그대와 너그럽게 결혼해 준다고 하더라도 흰 웨딩드레스는 입지 마시길.”
“…….”
“넌 이제 순결하지 않으니까.”
그는 노려보는 그레이스에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엄지 끝이 눈물과 정액이 거칠게 말라붙은 뺨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 사이로 추악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내가 가서 새빨갛게 물들여 줄 거야. 알겠어?”
그레이스는 혼란스러웠다. 이 남자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몸만을 원하는 것처럼 굴더니 몸을 줘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를 마음껏 능욕하고 싶어 하기에 기꺼이 당해 주어도 곧바로 제가 수모를 당한 사람처럼 굴기 일쑤였다.
그에게 이 일이 공적인 체포가 아니라 사적인 보복인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복수심 이상이 있을 것만 같은 직감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 나를 좋아하기라도 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아직 그녀의 또 다른 정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네게 어울리는 흰색은 이것뿐이야.”
윈스턴이 잘 보라는 듯 그레이스의 가슴 한쪽을 받쳐 올렸다. 이와 입술 자국으로 얼룩져 붉게 변해 버린 젖꼭지에 아직 마르지 않은 그의 정액이 맺혀 있었다.
“아주 잘 어울려.”
그는 픽 웃으며 등을 돌렸다.
“제발, 윈스턴! 대위님, 제발요!”
빌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문 앞까지 그를 따라가 매달렸다. 굴욕스럽게 그를 대위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레이스를 가볍게 뿌리쳤다. 오랜 시간 벌리고 있었던 탓에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가 속절없이 꺾이며 그레이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을 열려던 윈스턴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모욕을 당한 건 그레이스인데 이번에도 제가 당했다는 눈이었다.
“블랜차드의 창녀. 소문이 자자해서 기대했는데….”
그가 혀를 짧게 찼다.
“대단하지도 않네.”
윈스턴은 싸늘한 조소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고문실과는 어울리지 않던 비누 향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다.
땀 냄새, 정액 냄새, 피 냄새.
그레이스는 고문의 악취가 진동하는 몸을 차디찬 바닥에 누이며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나도 언젠가 널 고문할 거야. 잔인하게 고문해 비참한 꼴로 만들어 줄 거야.
그때 내게 빌어 봐.
네가 얻는 건 후회뿐일 테니.
***
나를 왜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
프레드는 떨리는 시선을 제 앞에 도열한 병사들에게서 떼지 못했다.
설마 처형하려는 걸까.
탁 트인 들판에 몸을 숨길 곳이라곤 없었다. 등 뒤로 전차 정거장과 작은 마을이 보였지만 도망치기엔 너무 멀었다. 애초에 어제 밤새 당한 고문 탓에 온몸에 성한 곳이 없어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머지않아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달려와 병사들의 뒤에 멈춰 섰다. 조수석의 문이 열리더니 캠벨이 나와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에서 윈스턴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아하지만 치명적인 흑표범 한 마리가 다가오는 것만 같아 프레드는 숨을 죽였다.
윤이 나는 검은 구두가 아침 이슬로 축축하게 젖은 풀을 짓이기며 두 걸음 앞에 멈춰 섰다.
윈스턴이 뒷짐을 진 채 프레드를 응시했다. 옅은 빛깔의 눈동자가 여명의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프레드는 생각했다. 실은 저 붉은 눈동자가 저 악마의 진짜 모습일 거라고.
악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프레드의 상상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본거지의 위치를 불게 만들려고 데려온 걸까? 안 불면 죽인다고 협박할 거다. 굳이 들판으로 데려온 건 인간 사냥을 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본거지 위치는 끝까지 누설하지 않았다. 어제 그레이스가 당한 짓을 누나들이 당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나를 여기서 죽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공포에 질려 이를 따다닥 떨며 갈등하던 순간이었다.
“널 살려서 보내 줄 거야.”
레온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눈은 웃지 않았다.
겁에 질려 떨던 쥐새끼는 살려 준다고 하자마자 눈에 띄게 안도했다. 당장 무릎을 꿇고 구두라도 핥을 기세였다.
그레이스는 어떻게 되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 여자를 팔아서 비겁하게 목숨을 구한 주제에.
무능한 데에다 의존적이며 이기적이다. 그가 가장 혐오해 마지않는 인간형이었다.
마음을 바꾸고 싶어졌다.
“단, 조건이 있어.”
하지만 놈에게는 쓸모가 있었다.
“네게 맡길 임무를 잘 해낸다고 약속한다면.”
“네, 네. 뭐든 맡겨만 주시면….”
레온은 간사한 겁쟁이에게 작은 소포 하나를 내밀었다. 연갈색 포장지에는 발신인의 이름으론 레온 윈스턴이, 수신인의 이름으론 제임스 ‘리틀 지미’ 블랜차드 주니어가 쓰여 있었다.
“네 총사령관에게 이걸 전하도록.”
그놈이 그를 만만하게 본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걸 똑똑히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손톱이 몽땅 뽑혀 피투성이가 된 손이 덜덜 떨며 소포를 받아 들었다. 놈은 새파랗게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리를 질질 끌어 굼뜨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뒤돌면 뒤통수에 총이라도 쏠까 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놈에게 레온은 웃어 주며 저 멀리 전차 정거장을 가리켰다.
“당장 가.”
놈이 안도하고 그에게 등을 보였다. 비열한 쥐새끼가 절뚝절뚝 걸어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은 권총집을 열고 권총을 꺼냈다.
탕.
“흐아악!”
“하하.”
우습기 짝이 없었다. 총은 놈의 한 발짝 뒤에 핀 들꽃이 맞았는데 제가 맞기라도 한 양 풀썩 쓰러져 사지를 떨다니.
곧 놈은 흙바닥을 짐승처럼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겁해 내빼는 녀석의 머리 위로 ‘축포’를 재미 삼아 몇 번 터트려 준 레온이 권총을 다시 넣으며 지시했다.
“캠벨.”
“네.”
“추적해. 놓치지 마. 쓸모를 다한 후에는 처리하도록.”
“네,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