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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43화 (43/240)

43화

“골치 아프군.”

그레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문으로 향하는 소위를 주시했다. 그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벌컥 열더니 활짝 열어 두었다.

복도에 선 병사들이 고문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훤히 볼 수 있도록. 그레이스는 몰래 안도했다.

“참 나… 얼른 수용소로 보내 버려야지….”

소위의 푸념을 들으며 그레이스는 속으로 빌었다.

‘그래, 제발 나를 보내 줘.’

***

윈스턴은 오후가 되어서야 그레이스를 찾아왔다.

‘사령부에 보고하고 온 걸까. 제발 보고했길.’

그레이스는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남자를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왜 저러지?’

그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들어올 때 뻔뻔스러운 인사말 같은 것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앉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레이스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저 남자가 의미 없는 시간 낭비를 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뱃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집요한 시선이 불편해 그레이스는 자꾸만 몸을 뒤틀었다. 윈스턴은 그 긴 시간 동안 미동도 없었다. 이따금 눈을 깜빡이고 눈동자를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항상 그레이스에게 머물렀다.

적막 속에서 마주 보고 있으니 최면이라도 걸리는 기분이었다. 어제 일이 까마득하다 못해 꿈처럼 느껴졌다.

저 남자의 손등에 난 손톱자국만 아니었으면 고약한 악몽이었다고 우겨 보았을 텐데.

그레이스는 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무사할까. 보복이라며 니퍼로 뽑을지도.

자조적으로 웃던 찰나였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고개를 들었을 때 윈스턴은 이미 그레이스의 옆에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왔다. 그녀의 얼굴 정도는 충분히 가릴 크기의 손이 갑자기 다가오자 그레이스는 긴장했다.

“왜, 읍….”

목을 쥐길래 조르려는 줄 알고 저항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윈스턴이 그레이스의 턱을 치켜올리더니 입술을 포갠 것이었다.

갑자기 키스를 하리라곤 예상도 못 했던 그레이스는 얼어붙었다. 그럴 리 없는 남자가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떼기만 했을 땐 멍해졌다.

하지만 키스에 점점 격정이 실렸다. 억누른 걸 터트리듯이 입술을 거칠게 탐하고 밀어붙였다.

이 남자, 대체 무슨 감정을 터트리는 걸까.

그러다 결국엔 터졌다.

“읍, 으읍….”

그레이스의 아랫입술이.

윈스턴의 거친 공세 탓에 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비릿한 피 맛이 번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말캉한 살덩이가 배어 나온 피를 조심스럽게 핥았다.

수줍은 혀 놀림이었다. 그레이스가 아는 캠든의 흡혈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빙턴 비치의 소년에게나 어울리는….’

불길한 기시감이 든 그레이스는 눈을 번쩍 떴다. 키스를 하는 내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눈이 마주치자 휘어지는 눈매 사이의 차가운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안녕, 데이지. 내 첫사랑.”

청록 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로지 이 여자에게만 미치는 이유, 그 수수께끼를 레온은 드디어 풀었다.

***

“여기 애빙턴 비치에도 파랑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해안 절벽이 잘 발달해 있으며….”

레온은 긴 테이블 끝에 앉은 가정 교사를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남들은 해수욕을 즐기는 휴양지에서 따분하게 지질학 수업이라니.

“선생님, 해안 절벽의 지층에서 대륙이 실은 모두 하나의 초대륙이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못마땅한 시선이 마주 앉은 동생에게로 옮겨 갔다.

“제롬이 먼저 태어났어야 했는데.”

두 아들의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이런 푸념을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레온이 제롬보다 성적이 나쁜 건 아니었다. 서로 두각을 나타내는 과목이 판이할 뿐.

어머니는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고상한 학문에서 더 두각을 보이는 제롬을 편애했다. 거기다 군인을 피에 미친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군사와 관련된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레온이 탐탁할 리가.

“저 계집애 같은 녀석이 장남이 아니라 천만다행이군.”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아버지는 레온을 편애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냉대를 받아도 크게 아쉬웠던 적은 없었다.

‘나도 그 여자 싫다고….’

지겨웠다. 위대한 군인이자 대부호인 아버지를 작위도 없는 반쪽짜리 귀족 취급하는 게 지겹다. 가족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여름 휴양조차도 윈스턴 백작 부인으로 죽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철저히 이용하는 것에도 이골이 났다.

아직 혼담을 나누기엔 이른 나이인 레온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벌써 그에게 좋은 혼처로 보여야 한다며 숨 막히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레온, 기껏 공작가 영애들과 자리를 마련했더니 사냥이나 크리켓 같은 따분한 이야기를 해야겠니?”

“그럼 다음번에는 군법 이야기를 하도록 할게요.”

“세상에! 너는 도대체 왜 비뚤어진 성격까지 네 아비를 닮아서! 두 부자가 아주 나를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제롬은 여자애들 앞에서 공룡 화석 이야기를 떠드는데 왜 나만 문제아야?

싫어하는 주제에 그를 제 꿈을 이뤄 줄 체스 말 취급하는 게 레온은 항상 불만이었다. 한번은 불평했더니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레온, 잘 듣거라.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 체스 말일 뿐이란다. 중요한 건 폰 취급이냐, 퀸 취급이냐이지.”

그 말이 레온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도 어머니를 체스 말 취급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적어도 나이트 이상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야.”

분명 레온은 어머니에게 나이트 이상일 거다. 하지만 레온에게 어머니는 폰조차 되지 못했다. 아무런 쓸모가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레온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곤 존경하는 아버지뿐이었다.

대륙 이동설을 낭설이라며 비판하는 가정 교사의 의미 없는 말에 나직한 엔진 소리가 섞여 들었다.

레온은 제롬의 어깨 너머 창밖을 응시했다. 계단식으로 펼쳐진 정원의 끄트머리에서 검은 세단이 줄지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곧 수업이 끝나면 파티가 시작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파티.’

며칠 전부터 무슨 백작가와 또 무슨 왕실 먼 친척 가문의 사람들이 레온 또래의 딸들을 데리고 별장에 온다며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었었다.

서로에 대한 질투와 멸시를 가식적으로 예쁘게 포장해 주고받는 여자애들을 지켜보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보고 싶은 여자애는 따로 있었다.

레온은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는 날이 더워 녹아 버린 초콜릿을 포장째로 만지작거리며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 소녀를 처음 본 건 이 별장으로 왔던 날이었다. 별장 남쪽에 딸린 해변을 산책하다가 조개껍데기를 줍는 여자아이를 마주쳤다.

레온보다는 두세 살 정도 어린, 제롬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였다. 수영복을 입는 걸 까먹은 건지 연하늘색 치마가 바닷물에 푹 젖어 소녀의 깡마른 다리에 해초처럼 감겨 있었다. 옆에 어른은 없었다.

“어이, 꼬맹이! 여긴 별장의 전용 해변이라 외부인은 출입 금지야!”

하인이 쫓아내자 소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도망쳤다.

다갈색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흔한 용모라 금세 잊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마차를 타고 별장 밖으로 나가는데 길에 소녀가 서 있었다. 담벼락을 따라 산책을 하는데 정문의 쇠창살 밖에서 소녀가 알짱댔다. 심지어는 담벼락 밖의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우연히 남의 집 앞을 매일같이 서성이는 사람은 없다.

‘도둑인가?’

저렇게 작은 여자애가 도둑일 수도 있을까.

성가셨다. 온종일 머릿속에서 그 소녀의 얼굴이 떠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이틀 전, 참다못해 물었다.

“뭐 하는 거야?”

담벼락 밖의 오렌지 나무 위에 앉아 안을 미어캣처럼 기웃대던 소녀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라 나무에서 미끄러졌다.

“꺅!”

레온은 나무 아래로 뛰어갔다. 높지 않아 크게 다칠 리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헉….’

소녀를 무사히 받아 안자마자 불에 덴 사람처럼 다급히 내려 주었다. 뒤집힌 치마를 내리는 소녀의 얼굴도 레온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미안.”

“괜찮아.”

소녀가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받아 주는 순간에야 레온은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잠깐. 왜 내가 사과를 하는 거지? 사과는 남의 별장을 엿본 네가 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보면 안 돼?”

“남의 집을 엿보는 게 무례하고 나쁜 짓인 거 몰라? 이런 짓은 도둑이나 하는 거 아냐? 혹시 너 도둑들 끄나풀이어서 망보고 있는 거야?”

소녀는 그가 도둑으로 몰아가는데도 당황하거나 화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실 레온의 말은 듣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독특한 청록 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다 몸을 배배 꼬는 걸 보면.

“훔치려던 건 아니고 훔쳐보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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