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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44화 (44/240)

44화

“뭘?”

“너.”

훔쳐보는 것도 나쁘다고 하려던 레온은 말문을 잃었다.

“너 정말 예쁘게 생겼어.”

소녀는 발그레한 뺨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배시시 웃었다.

예쁘다는 말은 처음이지만 잘생겼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다. 심지어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어머니도 귀티가 흐르는 용모 하나는 마음에 쏙 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남자한테는 ‘예쁘다’가 아니라 ‘잘생겼다’라고 해야 하는 거야.”

“와아…, 화내는 것도 예쁘게 생겼어.”

정말 이상한 아이였다. 반짝이는 청록 빛 눈을 보고 있자니 나무 그늘인데도 이상하게 더워졌다.

“저기, 있잖아.”

여자애는 부탁할 거리라도 있는지 등 뒤로 두 손을 모아 쥐고 몸을 배배 꼬았다.

“뭔데?”

“머리 한 번만 만져 봐도 돼?”

상상도 못 한 요구에 레온은 또 한 번 어안이 벙벙해졌다.

‘얘 처음 보는 사람한테 왜 이러지?’

레온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소녀가 허둥대며 이상한 부탁을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미안. 그렇지만 너무 예뻐서 만져 보고 싶었어! 보송보송하고 보들보들할 것 같아.”

“난 강아지가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라….”

“너 같은 여자앤 처음 봐.”

여자애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저러다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레온은 조마조마해졌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나쁜 뜻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늘 속내를 포장하는 여자아이들만 보다가 제 마음을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니 신기했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밌었다. 그냥 두면 어디까지 하나, 다음엔 어떤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려나 궁금하게 만들었다.

“자.”

레온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여전히 높은지 소녀가 까치발을 들자 그는 무릎을 굽혔다.

포마드를 발라 매끄러운 머리에 소녀의 손이 닿았다. 누가 보면 윈스턴 소령의 아들이 평민 여자아이에게 개처럼 쓰다듬어진다고 경악할 거란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소녀가 신이 난 강아지처럼 활짝 웃자 비뚤어졌던 그의 입꼬리가 대칭을 이뤘다.

“와, 부드러워. 차가운 색이어서 차가울 줄 알았어. 근데 뜨거워.”

“그야 여름이니까.”

정말 엉뚱한 애다.

“햇살을 만지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

소녀가 손을 거두자 그는 굽혔던 몸을 바로 세웠다.

“고마워.”

“궁금증은 다 풀렸길.”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다. 나도 금발이고 싶은데. 우리 가족은 다 금발인데 나만 갈색 머리야.”

그 아이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떠들었다.

평소라면 그는 관심도 없는 자기 이야기를 여자애들이 늘어놓으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는 레온이었다. 지금도 곧 있을 승마 수업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애는 혼자 종알종알 떠들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몸에 사선으로 멘 작은 가방을 뒤적였다.

“자, 초콜릿.”

여기서 꽤 먼 지역의 조잡한 상표가 찍힌 초콜릿은 가방에 넣어 둔 지 오래된 듯, 귀퉁이의 포장이 해져 있었다.

레온은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거절하는데 이번엔 무심결에 받아 버렸다. 게다가 어머니가 보면 불결하다고 버리라고 할 싸구려 초콜릿을….

“이건 왜?”

“훔쳐본 값.”

내가 먹으려고 아껴 둔 거야. 소녀는 그렇게 덧붙이더니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건 말 그대로 가난한 아이의 입에서 사탕을 빼앗아 먹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냥 돌려주려던 순간이었다.

“또 훔쳐보러 올게.”

소녀가 멋대로 손을 흔들더니 폴짝폴짝 뛰어가 버렸다. 다음엔 훔쳐보지 말고 당당하게 보라는 말도 못 했는데.

‘진짜 이상한 애야.’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물어보는 걸 잊었다.

이런 기본적인 걸 잊다니…. 레온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정신 사납게 군 그 애 탓이라고 생각했다.

또 마주치면 물어보려 했는데 어제는 종일 비가 왔다.

그 아이 조금 어수룩해 보이던데. 설마 이런 궂은날에도 훔쳐보러 올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정작 어수룩한 건 레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애가 늘 서성대던 담벼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온종일 앉아 기다렸으니까. 옆에는 우산을 세워 두고.

하지만 그 아이는 오지 않았다. 다행인데 왜 언짢은 걸까.

‘오늘은 안 오나?’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제 종일 붙어 있던 창가로 향한 레온은 또 실망했다. 매달린 거라곤 오렌지밖에 없는 오렌지 나무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어디 가? 손님 오셨는데.”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꺼내는데 나비넥타이를 맨 책벌레 한 마리가 와서 징징거렸다.

“응, 알아.”

“어머니가 너랑 인사시킬 거라고 부른 사람들이란 말이야.”

“제롬 윈스턴, 네가 장남이길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오늘은 네가 장남 역할을 하도록.”

레온은 자전거에 올라타며 아버지가 자주 쓰는 명령조로 빈정댔다.

“난 네 부하가 아니야!”

페달을 밟는데 제롬이 등 뒤에서 외쳤다. 레온은 멈춰 서서 동생을 돌아보았다.

“먼저 태어나지 그랬어?”

“이를 거야!”

“저 녀석은 계집애처럼 고자질이나 해 대는군.”

또 한 번 아버지의 입버릇을 따라 했다. 제롬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씩씩댔다.

“제롬, 넌 너무 성실해서 재미없어.”

레온은 어깨 너머로 동생에게 픽 웃어 주곤 다시 페달을 밟았다.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소녀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애빙턴 비치에 있는 오렌지 나무를 전부 털고 다녀야 하는 건가. 1시간 정도 고급 별장이 모인 언덕과 그 아래의 상점가를 뒤지고 나니 막막해졌다.

해가 서서히 높아졌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자전거를 모니 목이 말랐다. 해변을 따라가던 레온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간이매점이 보이자 멈췄다.

자전거를 도로변의 난간에 세워 두던 찰나였다.

“외상 안 돼요?”

그 소녀의 목소리였다.

‘찾았다.’

레온은 자전거를 타느라 흐트러졌을지도 모를 머리를 단정히 쓸어 넘겼다.

“저 너무 덥고 목마른데…. 내일 꼭 가져다 드릴게요.”

그레이스는 가판대에 매달리며 한 번 더 사정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와.”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모님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오늘 아침에 분명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해변에서 놀고 나니 감쪽같이 사라졌다.

돈 아까워 죽겠어. 들키면 아버지한테 혼날 텐데. 오늘은 그럼 길에서 오렌지만 따 먹어야 해? 우리 마을은 안 이런데 바깥 사람들은 다들 심장이 얼음으로 되어 있나 봐.

눈물이 핑 돌려 했다. 서럽고 자존심이 상한 그레이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죄 없는 아저씨에게 투덜댔다.

“왜 안 돼요? 치이… 너무하다. 우리 마을에선 되는데.”

“그럼 너희 마을로 돌아가. 거지 주제에 성가시게 떼쓰지 말고.”

“나 거지 아닌데….”

고개를 푹 숙이고 가려는 순간 낯선 손이 그레이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숙녀를 도와주진 못할망정, 무례하게 굴며 밑천을 드러내는군.”

고개를 든 그레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헉! 예쁜 애다.’

뺨이 뜨거워졌다. 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손 탓에, 그리고 하필이면 가장 볼품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수치심 탓에.

“난 탄산수 한 병. 아펜젤러 말고 샬레로. 그리고 숙녀분께는…?”

소년이 저를 또 숙녀라고 부르며 정중하게 묻자 그레이스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나, 난 막대 아이스크림. 그냥 그거면 돼.”

소년은 탄산수 하나를 사는 것도 멋있었다. 외국어로 된 어려운 상표까지 읽어 가며 주문하니 탄산수가 고급 와인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막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저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뭘 몰라 이런 걸 주문하는 게 아니라 정말 먹고 싶은 것뿐이란 뜻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어떤 맛으로?”

소년은 예쁘장하고 멋있는데 친절하기까지 했다. 무슨 맛을 먹고 싶은지까지 세심하게 물어봐 주었다.

“초콜릿과 바닐라가 가장 잘 팔립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오렌지, 레몬, 딸기….”

조금 전 그레이스에게는 무섭게 굴던 아저씨는 소년 앞에서는 딴판이었다. 아이스박스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맛별로 다 꺼내서 보여 주었다. 아마 그레이스가 돈을 가져왔더라도 이렇게 굽신대진 않았을 거다.

그럴 법도 한 게, 소년은 누가 봐도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값비싸 보이는 폴로셔츠와 손목시계가 아니더라도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선 자세와 여유로운 눈빛에서부터 고결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 그럼 딸기 맛….”

소년이 눈짓하자 아저씨가 냉큼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 그레이스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네, 숙녀분께는 딸기 맛으로. 여기 있습니다.”

분명 귀족은 나쁜 거라고 배웠다. 어른들은 귀족을 탐욕스러운 돼지 새끼라고 불렀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 나와 보니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다들 귀족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레이스는 다른 귀족은 몰라도 이 소년은 좋았다.

“고마워.”

소년이 입꼬리를 우아하게 휘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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