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빌어봐-45화 (45/240)

45화

“가자.”

그레이스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소년을 따라갔다. 조금 걷다 보니 소년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자전거를 끌고 해변 산책로를 따라 걷는 남자아이의 보폭에 발을 맞추며 흘끔대던 그레이스가 용기 내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에 왕자님 같았어.”

탄산수병을 기울이던 소년이 쿨럭, 기침을 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멈칫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그레이스를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흐르잖아.”

그는 손수건을 그레이스에게 주곤 저는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닦았다. 그 모습조차 멋있었다. 탄산수 광고를 보는 기분으로 올려다보는데 소년이 물었다.

“너 왜 오늘은 안 왔어?”

“어?”

고개를 또 갸웃한 소녀가 딸기 아이스크림 때문에 안쪽이 새빨갛게 물든 입술을 휘어 미소 지었다.

“나 기다렸어?”

레온의 뺨도 소녀의 입술만큼 빨개졌다.

“그럼 나 찾아온 거야?”

“어? 아니. 아, 그냥 할 일도 없고….”

레온은 시선을 돌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구나….”

실망한 얼굴을 보니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응?”

“난 레온. 넌?”

“…데이지.”

소녀가 왜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는지 레온은 알지 못했다.

“레온은 여기 살아?”

“아니. 거긴 그냥 별장. 넌?”

이곳 사람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온은 조금 전 매점 주인과 데이지의 대화를 엿듣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난 멀리서 왔어. 가족 휴가 같은 걸로….”

그레이스는 그 먼 곳이 어딘지도 말하지 않고 왜 가족 휴가가 아니라 ‘같은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은 채 말을 돌렸다.

“나 이런 데 처음이라 너무 설레.”

여태 외딴 산골 마을 밖으로 나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고급 휴양지에 이토록 오래 머문 일은 더더욱.

난생처음 본 바다가 신기해 이곳에 온 첫날 해변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레온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런데 부모님 없이 너 혼자 다녀도 괜찮아?”

어째서 이 아이 옆엔 늘 아무도 없는 걸까. 어딜 가든 항상 어른이 따라다니는 레온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

그레이스는 혼자 다녀도 되는 게 아니라 다녀야만 했다.

자주 집을 비우시는 부모님이 오랜만에 돌아와 애빙턴 비치로 가자고 하시기에 처음엔 정말 가족 휴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빠를 두고 왔을 때부터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해 외딴 숙소에 짐을 풀고서야 실은 휴가가 아니라 ‘임무’라는 걸 알았다.

그레이스는 어른들이 말하는 임무가 뭔지 잘 몰랐다. 그저 세상을 구하는 정의로운 일이라기에 책에서 본 영웅 같은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이 그렇듯 정체를 비밀에 부쳐야 했다.

이번 임무는 윈스턴인가 하는 나쁜 군인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거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걸 엿들었다. 아직 어린 그레이스의 임무는 함께 온 어른들을 평범한 여행객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이었다.

어른들은 다들 바빠 그레이스를 돌봐 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이면 침대 머리맡에 돈을 놓아 주고 가셨다.

그걸로 지난 일주일, 전에 없던 사치를 부리며 재밌게 보냈는데 하필 오늘, 레온과 마주친 오늘 돈을 잃어버려 초라한 꼴을 보인 거였다.

“아, 나 아침에 용돈 받았거든. 그런데 모래사장에서 놀다가 잃어버렸나 봐.”

그레이스는 묻지도 않은 변명을 웅얼댔다. 레온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머리 위에 펼쳐진 오렌지 나무가 자연히 눈에 들어왔다.

“레온, 그럼 아이스크림 사 준 보답으로 내가 오렌지 따 줄까?”

레온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이유를 그레이스는 몰랐다. 제일 잘 익은 걸 찾아 두리번거리며 나무에 올라타려는데 어깨에 또 손이 닿았다.

“치마 입고 나무 타지 마.”

“왜?”

“…상스러운 짓이니까?”

이 아이는 왜 이런 당연한 걸 모르는 걸까. 상스러운 짓이란 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지 데이지는 물음표가 크게 새겨진 눈을 깜빡였다.

“분홍색.”

이제야 알아들었나. 데이지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아, 아니야! 나 오늘 흰색 입었어!”

“…그걸 왜 네 입으로 말해?”

잘 익은 햇사과 같은 얼굴로 오렌지 나무 아래에 마주 선 소년과 소녀를 어른들이 지나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민망해진 레온이 다시 자전거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레이스는 따라오라는 건지 아니면 여기서 헤어지자는 건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레온은 세 걸음 후 멈춰 섰다.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소녀는 아직도 나무 아래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저 여자애가 그와 오늘 데이트를 하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마주친 순간부터 당연히 그럴 거라고 혼자 앞서 나가고 있었다.

‘잠깐. 데이트하잔 말도 아직 안 했잖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지.

귀족 자제들의 사교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들이 정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지까지 모두 정해져 있어 레온은 좋든 싫든 따라가기만 해야 했다.

난생처음 그가 원하는 여자아이와 마음대로 시간을 보낼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데이트하자는 말은 어떻게 하는 거지?’

레온은 선뜻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러다 데이지가 그냥 가 버리겠다 싶어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 몹쓸 입이 저질렀다.

“아이스크림 사 준 보답을 하고 싶으면 나랑 놀아 주면 되겠네.”

손은 성대한 카니발이 열리는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놀아 달라니. 애야?’

레온은 제 뺨을 치고 싶어졌다. 게다가 몇 푼 하지 않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주고 보답을 운운하다니. 이렇게 치사한 협박이 다 있나.

아무래도 이 데이트는 시작도 전에 망한 것 같았다. 데이지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

예상 밖의 승낙이 떨어졌다. 곧 둘은 각자만의 이유로 얼떨떨한 걸음을 옮겼다.

‘귀족 아이들은 놀아 주는 아이를 따로 산다고 들었는데 나 지금 그런 건가?’

그레이스는 조금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놀이 기구를 세 번쯤 타고 나자 그런 건 새카맣게 잊게 됐다.

“레온, 나 이번엔 저거 타고 싶어.”

“그래.”

레온은 불평 한마디 없이 회전목마의 티켓 부스 앞에 섰다.

놀아 달라더니. 정작 놀아 주는 사람은 레온이었다. 회전목마처럼 어린애나 타는 놀이 기구를 기꺼이 같이 타 주다니 말이다.

게다가 진짜 왕자님처럼 상냥하게 그레이스가 목마를 타는 걸 도와주었다.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레온이 잡았던 오른손을 몰래 만지작거리는 사이 그는 옆의 목마에 단숨에 올라탔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회전목마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바깥을 보며 손을 흔들거나 했을 그레이스는 이번엔 반대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레온도 줄곧 그레이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져서 웃었더니 레온이 물었다.

“왜? 예쁘게 생겼어?”

“응.”

그레이스의 진지한 대답에 소년이 나직이 웃었다.

“근데 너는 집에 진짜 말 있어?”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재미없겠다.”

“아… 그렇진 않은데….”

어째선지 레온은 당황했다. 횡설수설하며 왜 회전목마가 진짜 말을 타는 것보다 재밌는지를 떠들기 시작한 이유를 저도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지붕이 있어서 일사병 걱정도 없고….”

“그렇지. 그렇지.”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데이지는 그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사실 회전목마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레온이었다. 그런데 왜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그다음은 유령의 집이었다.

“꺄악! 놓지 마! 놓지 마! 나 놓으면 안 돼!”

레온은 자꾸만 제게 매달리는 소녀를 감싸 안으며 몰래 웃었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흑, 무서웠어….”

유령의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데이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 그럼 내가 사과의 의미로….”

레온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데이지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커다란 돌고래 인형이 사격 게임 부스에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부스로 다가갔다. 한 번에 5발. 인형은 100점을 따야 했다. 레온은 부스를 지키고 선 남자에게 돈을 내고 맞은편 벽에 걸린 과녁들의 점수를 확인했다.

‘제일 높은 게 25점, 그다음이 15점.’

레온은 제 앞에 놓인 총을 집어 들었다. 오락용으로나 허가되는 낡은 소총이었다. 총열이 휘어지진 않았는지 점검한 후 가늠자에 눈을 대고 조준선이 똑바른지 확인하는데 직원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 거 쏠 줄은 아나? 가르쳐 줘?”

데이지 앞에서 무시를 당했다. 레온은 대꾸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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