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빌어봐-54화 (54/240)

54화

“이 가문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잊지 않았길.”

“네, 대위님.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녀장, 벨모어 부인은 그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별채 지하에 익명의 여자가 갇혀 있다는 걸 벨모어 부인에게 밝힌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폐쇄되었다던 고문실에 식사가 들어가고 여자 옷이 빨랫감에 섞여 나온다면 소문이 나는 건 시간문제이니.

“그런데 왜 아직도 별채에 병사를 두는 거니?”

엘리자베스는 흉물스러운 병사들도 저택에서 함께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병사들이 아직도 별채를 지키는 것도 모자라 레온이 그곳에서 살다시피 하며 업무를 보는 건 뜻밖의 일이었다.

“그건 군과 관계된 일이니 궁금해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군요.”

아들의 칼 같은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뾰족한 시선을 보냈다.

“내 저택의 일인데 내 일 아니니.”

“윈스턴 저의 일은 제 일이죠.”

가주는 나니까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긍지가 상한 엘리자베스는 손님이 있는 자리인 걸 알면서도 목소리를 낮춰 따졌다.

“글쎄다. 네가 항상 현명한 짓만 했더라면 나도 널 믿고 예전처럼 가문의 모든 일을 맡겼겠지.”

항상 현명한 짓만 하던 아들이 저지른 유일한 실수를 넌지시 입에 올렸다. 한동안 레온 윈스턴 대위가 저택의 하녀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염문설이 돌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레온의 입에서 엘리자베스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 나왔다.

“그 여자, 다신 보실 일 없을 겁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믿어 보마.”

뒤에 덧붙인 말이 꺼림직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캐묻지 않았다.

“부디 로잘린의 취향에 맞아야 할 텐데.”

엘리자베스의 살가운 말에 화려한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대공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숙녀라면 디저트는 거절해야 예법에 맞지만 이 케이크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네요.”

엘리자베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고상하고 얌전하면서도 적당한 재치가 있는 화법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너무 고리타분한 내 입맛대로 준비한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고리타분하다뇨. 저는 오히려 기쁜걸요. 부인의 안목이 뛰어나신 건 저도 익히 들어 왔답니다.”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건 맞지. 취향도, 이 대화도.

레온은 어머니와 대공녀가 가식적인 찬사를 주고받는 걸 지켜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윈스포드 헤럴드도 이번에 그 건을….”

제롬이 운영하는 언론사 중 하나가 최근에 한 탐사 보도의 뒷이야기를 듣는 대공은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롬을 이 자리에 부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레온이었다. 대공이 귀찮은 소리를 꺼낼 거란 예감이 강하게 들어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불러 둔 것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대공이 바라는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윈스턴 박사.”

인문학 박사 학위가 있는 제롬의 공적인 호칭은 박사였다.

“저번에 자네 경제지에서 낸 분석 기사가 꽤 도움이 되었어.”

“영광입니다, 저하. 그런데 어떤 기사 말씀이시죠?”

“브리아의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 건 말이네.”

억지로 화제를 돌려서라도 본론을 꺼내려는 속셈이 빤했다. 레온은 찻잔 뒤에서 조소했다.

브리아 다이아몬드 광산. 해외에서 개발이 막 시작된 광산에는 역대 최고 규모의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재정난에 시달린 브리아 공화국의 정부가 얼마 전 채굴권을 두고 공개 입찰을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역대 최고 규모의 경쟁 또한 예정된 상황이었다.

대공은 그 입찰 경쟁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대공이 무얼 하든 레온은 알 바가 아니나 그에게도 투자를 종용하는 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윈스턴가는 브리아 광산보다는 규모가 작긴 하지만 이미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역대 최고 규모가 예상된다 해도 레온은 똑같은 종류의 사치재에 중복 투자할 생각은 없었다.

여유 자금이 있긴 했으나 그건 언젠가 선박 운송 산업의 큰 몫을 대체하게 될 항공 산업과 신대륙 부동산에 투자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앨드리치 대공이 거듭 브리아 광산 개발을 위해 합작 사업을 벌이자고 하는 것이었다.

“채프먼 남작도 함께하기로 했네. 무슨 뜻인지 자네도 잘 알겠지.”

네, 왕실이 윈스턴가의 단물을 빨아먹고 버리겠단 뜻이죠.

남작은 국왕의 외숙부였다. 달리 말하면 남작은 이름만 빌려줄 뿐, 실질적인 투자자는 국왕이었다.

왕실이 브리아 공화국의 광산 공개 입찰에 직접 참여한다면 여러모로 말이 나올 것이다. 국민의 혁명으로 무너진 전적이 있는 데에다 아직 왕정이 복고된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아 불안정한 왕실은 세간의 눈을 꽤나 신경 쓰는 편이었다.

그러니 대공과 남작까지, 먼 친척들을 동원해 왕실이 해외 투자를 하는데 거기에 윈스턴가더러 합류하란 것이었다. 그게 영광인 줄 아는 멍청이라면 넙죽 허리를 숙이고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온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왕실의 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대공가는 재산이 많지만 그만큼 빚도 많았다. 자산의 안정성은 윈스턴가가 월등히 뛰어났다.

‘입찰을 따내는 데 윈스턴가의 돈만 물 쓰듯 투자하고 투자 수익은 왕가와 대공가가 나눠 먹겠단 소리군.’

그저 작위만 받으면 그만인 어머니는 앞뒤 따지지 않고 참여하라고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공은 여자와는 사업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는지 어머니에겐 합작 투자 건을 꺼내지 않았다.

“윈스턴 대위, 거기서 나온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로 로잘린에게 약혼반지를 해 주면 되겠군.”

제롬과 브리아 광산의 투자 가치를 두고 토론을 벌이던 대공이 잠자코 있던 레온에게 결국 본심을 드러냈다.

“저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브리아 광산 개발이 시작되려면 적어도 2~3년은 더 걸릴 듯합니다.”

앞뒤 꽉 막힌 제롬을 이 자리에 둔 건 탁월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눈치 없는 어머니까지 이번엔 그의 지원군으로 나섰다.

“아름다운 아가씨를 그토록 오래 미혼으로 둘 순 없죠. 로잘린에게 줄 약혼반지는 제가 벌써 알아보고 있으니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저하. 저희 가문이 소유한 광산에서 얼마 전에….”

윈스턴가의 다른 일원들이 귀찮은 손님을 알아서 상대해 주는 사이 레온은 별채 지하에 묶어 두고 온 여자를 떠올렸다.

‘잘 버티고 있을까.’

버티지 못하면 어쩌겠어. 조소하던 레온의 시선이 저택 부근의 카페에서 주문한 케이크가 종류별로 차려진 티 테이블에 머물렀다.

‘그러고 보니….’

문득 드는 생각에 레온은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온실 문 앞에 서 있던 하녀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대공녀에게 주려는 줄 알았던 라일락을 레온이 하녀에게 건넸다. 라일락을 꺾을 때 아들에게 소년처럼 순박한 면모도 있었나 싶어 웃었던 엘리자베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빠짐없이 6시에 별채로 전달하라고 벨모어 부인에게 전하도록.”

게다가 오늘마저 아들이 별채에서 혼자 저녁 식사를 할 계획이라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대위, 요즘 재밌는 소문이 돌더군.”

라일락 가지를 들고 온실 밖으로 나가는 하녀를 돌아보던 대공이 레온에게 말을 걸었다. 하필 하녀에게 그가 꽃을 준 후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곁들여 꺼내는 화제야 뻔했다.

“소문은 소문으로 덮는 법이죠.”

레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녀와의 염문으로 추궁을 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저를 두고 도는 악랄한 헛소문을 불식시켜 드렸으니….”

대공도 이 혼담이 거래일 뿐이라는 걸 안다. 그저 레온이 거래에 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압박용으로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어쨌든 하녀와의 염문으로 성불구라는 불명예스러운 헛소문을 잠재웠으면 서로 좋은 것 아닌가.

“안심하시고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시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녀와의 추문 때문에 바늘 위에 앉은 기분이었는데 일부러 소문을 잠재우려 한 연기인 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다니. 이럴 때는 레온이 영악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대공과 자리를 뜰 기회만을 노리던 엘리자베스는 냅킨을 접어 테이블에 놓으며 운을 뗐다.

“젊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보내도록 늙은이인 나는 이쯤에서 일어나야겠지. 아, 그러고 보니 저번 왕도의 경매에서 새로 들인 그림이 있는데 저하께 가장 먼저 보여 드리고 싶군요.”

대공에게 고상하게 그림을 감상시켜 준다는 건 핑계일 뿐. 두 사람은 속물적인 약혼 조건을 논의하러 가는 것이었다.

“대공녀 저하.”

대공이 사라지자 제롬은 대공녀에게 제 본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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