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빌어봐-56화 (56/240)

56화

“하아….”

가슴 끝에서 드디어 채찍이 떨어졌다. 그레이스가 숨을 고르는 사이 채찍은 땀으로 젖은 배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건 다 너희 동지들을 위한 거야. 세뇌를 하루빨리 풀고 쓸모없는 희생을 멈춰야 하지 않겠어?”

본거지의 위치를 밝히란 뜻이었다.

“몰라.”

아랫배를 훑어 내려가던 채찍이 불시에 떨어져 나갔다.

“아흑!”

위로 들렸던 채찍 끝이 떨어진 곳은 적나라하게 벌어진 분홍빛 점막이었다. 통증이 순식간에 파문처럼 비부 전체로 퍼졌다.

머리채를 커다란 손이 움켜쥐더니 푹 숙인 고개를 억지로 꺾어 올렸다.

“네 성을 잊었나? 수뇌부가 본거지를 모른다는 말에 누가 속지?”

“하아, 난 부모님의 임무 때문에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어. 어디가 본거지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령은 항상 전화로 왔다고.”

“리틀 지미와의 약혼도 전화로 했나 보지?”

“그건 어른들이 정해 준 약혼이었어.”

거짓말이 통한 걸까. 윈스턴은 머리채를 놓아주더니 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머리에 피가 잘 통하게 해 줄 테니 기억을 잘 뒤져 봐.”

그렇게 이 꼴로 결박해 놓고 나가더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흣, 개새끼.”

팔이 저려 몸을 비틀다 또 교성을 질러 버렸다.

“적당히 할 줄을 몰라, 진짜….”

레온 윈스턴이 잔인한 고문 기술자의 면모를 발휘할 때면 차라리 발정 난 개새끼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대체.”

땀방울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언제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딸깍. 드르륵. 위잉.

다음엔 환풍기가 돌아가는 주기를 재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문밖에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윈스턴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문 잠갔나?’

정신이 혼미해 놈이 나갈 때 문을 잠그는 소리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선 사내의 발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멈추자 그레이스는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들어오려 한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는 소리가 들렸다. 윈스턴이 문을 잠그고 간 게 분명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철컥.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으니까.

‘헉….’

병사들이 식사를 가져다줄 때 손에 열쇠를 들고 있는 걸로 봐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윈스턴만이 아니었다.

‘안 돼.’

엉덩이가 문으로 향해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음부가 적나라하게 보일 거란 뜻이었다.

‘싫어!’

몸을 비틀기 무섭게 끼익, 문이 열렸다. 빌어먹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의 발소리는 윈스턴의 것이 절대 아니었다.

“나가! 건드리지 마!”

머리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찰나였다. 큼지막한 손이 눈을 덮었다.

“윈스턴?”

제발 차라리 그 개새끼였으면. 다른 남자에게도 수치스러운 꼴을 보이고 겁탈까지 당하느니 차라리 그놈에게 당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 없이 그레이스의 머리에 실크처럼 느껴지는 무언가를 묶어 눈을 가렸다.

겁에 질려 떠는 그레이스의 알몸을 남자가 더듬어 대기 시작했지만 손발이 다 묶여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손놀림은 쓸데없는 동작이 많아 지저분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던 윈스턴이 아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부를 낯선 손이 마구잡이로 벌리고 쑤석거렸다. 음핵을 찾으려 하는 듯 굵다란 손가락이 살점을 벌리고 연한 점막을 꾹꾹 눌러 댔다. 윈스턴이라면 이 남자처럼 엉뚱한 곳을 누르지 않고 단번에 음핵을 찾았을 거다.

“다, 당신 누구야? 그만해. 대위가 알면 널 가만둘 줄 알아?”

위협이 통한 걸까.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니, 위협은 통하지 않았다. 엉덩이 뒤에서 벨트 버클을 푸는 소리가 들렸으니.

“하지 마! 제발 그만, 아악!”

다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밧줄이 옆으로 젖혀지기 무섭게 질구에 뜨거운 살덩이가 처박혔다.

“윽….”

미끄러운 질 속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성기를 막으려 아래에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는 그레이스의 허리를 우악스럽게 틀어쥐고 허벅지가 엉덩이에 맞닿을 때까지 더러운 물건을 콱콱 박아 넣었다.

곧바로 허리 짓이 시작됐다. 들키면 안 되는 짓이라도 하듯 성급한 움직임이었다.

“죽여 버릴 거야!”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자 남자는 그녀의 입 속에 천 같은 걸 쑤셔 넣었다.

어떤 개자식이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맨다리에 닿는 천의 느낌이 윈스턴의 장교복과는 달랐다. 조금 더 가볍고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이런 고급 천을 감당할 형편이 되는 이가 이 저택에 몇이나 있을까.

그레이스가 저를 범하는 남자의 신원을 추측하려 애쓰는 사이, 남자는 밧줄 사이로 삐져나와 흔들거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터트릴 듯 움켜쥐고 치댔다.

제발 윈스턴이 나를 놀리는 것뿐이길.

하지만 가슴을 저질스럽게 주무르는 손길도, 배 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리듬도, 모두 낯설었다.

남자가 젖은 밧줄 매듭을 굴리며 음핵을 자극하기까지 하자 역겨워서 토기가 치밀었다.

‘그만. 제발 그만.’

아무리 창녀 신세라지만 이 별채에 배치된 모든 병사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싶진 않았다.

‘이런 신세로 전락하라고 나를 묶어 두고 간 거야?’

그레이스는 이 자리에 없는 윈스턴을 향한 원망을 눈물과 함께 쏟아 냈다.

‘설마 윈스턴이 사주한 건가.’

그에게 말할 거란 협박이 통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 악마라면 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더러워. 역겨워. 비참해. 그 개자식을 죽이고 나도 죽어 버릴 거야.

“흡….”

입을 틀어막은 천 사이로 서러운 울음이 새어 나간 순간, 난폭한 허리 짓이 뚝 멎었다. 곧바로 귓속으로 흘러드는 가증스러운 속삭임에 그레이스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쉿. 자기야, 나야.”

윈스턴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제힘으로 서지 못하는 그레이스를 안아 들고 천장에 매인 밧줄을 풀었다. 공주를 구한 기사라도 되는 양 뻔뻔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주요 부위가 두드러지도록 몸에 묶어 둔 밧줄은 풀지 않았다.

“많이 놀랐어?”

놈은 웃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속인 게 분명했다.

“네 주인이잖아. 안심해.”

그 말대로, 저를 범하던 자가 윈스턴이라는 걸 안 순간 정말로 안도해 버린 그레이스는 제 비참한 처지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흡….”

“이런, 많이 놀랐네.”

“흐흑….”

입을 막고 있던 천이 불시에 뽑혀 나가자 그레이스는 소리 내 울 수 있었다. 하지만 울음을 제대로 뱉기도 전에 축축한 살덩이가 입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죽여 버릴 거야.

죽이지 못하면 혀라도 잘라 먹을 거야.

혀를 이로 콱 깨물었다. 윈스턴이 몸을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그레이스의 턱을 억지로 벌렸다.

역겨운 살덩이가 순식간에 빠져나가자 그레이스는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통쾌했지만 입 속으로 놈의 피 맛이 번지는 건 불쾌했다.

분명 곧바로 보복할 줄 알았다. 숨죽이고 다음 행동을 기다렸지만 윈스턴은 도리어 그레이스를 바스러트릴 듯 끌어안았다.

“흣….”

그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단단한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맞닿은 가슴이 짓눌려 아플 정도였다.

뜨거운 숨이 귓가를 거칠게 스치더니 윈스턴이 흥분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게 앙갚음을 하고 싶으면 좀 더 머리를 썼어야지. 넌 여전히 낙제야.”

그의 손이 그레이스의 볼을 억세게 눌러 쥐었다. 다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입 속으로 두꺼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넌 여전히 낙제야.

피비린내 진한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지고서야 그레이스는 그 말뜻을 깨달았다. 피를 내는 바람에 저 짐승을 도리어 흥분시켜 버렸다.

어지럽게 얽히는 살덩이 사이로 퍼지던 비릿한 맛은 점차 희미해지고 타액이 입가를 적시다 못해 턱을 타고 흐를 즈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그래서….”

윈스턴은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그레이스의 턱부터 입꼬리까지 핥아 올리더니 냉철한 이성뿐인 인간의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약혼자가 있는 곳은 생각났어?”

그레이스를 의자에 묶은 윈스턴이 멀어졌다. 곧 문 옆의 서랍장 위에 놓인 축음기가 켜지며 감미로운 색소폰 선율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음악에도 그레이스의 신경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윈스턴은 요즘 그레이스가 큰 소리를 낼 만한 일을 하기 전이면 음악을 틀었다. 고문실에서 새어 나가는 소음을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으면서 그레이스의 목소리는 묻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젠 이것도 지겹군.”

윈스턴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다른 걸 가져오도록 하지.”

음악은 질리는데 이 짓은 안 질리는 걸까.

그레이스는 의자에 묶인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팔걸이에, 다리는 활짝 벌려져 의자 다리에 묶여 있었다.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밧줄이 야릇한 모양새로 몸을 감고 있는 건 조금 전과 똑같았지만 다리 사이의 밧줄만 풀어져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긴커녕 더욱 불안했다.

이제 여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음부가 훤히 보이는 자세로 앉은 그레이스의 맞은편에 윈스턴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거리는 겨우 반 발짝. 손만 뻗으면 그녀의 비부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신문은 끝난 것이길. 발정이 단단히 나 변태적인 욕구를 채우려는 것뿐이길.

하지만 묶기 전 본거지를 또 물었던 걸로 봐선 헛된 바람일 게 뻔했다.

그는 무릎에 팔꿈치를 짚더니 가볍게 쥔 손마디에 턱을 얹었다. 입꼬리에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고 몸을 그레이스를 향해 기울인 채 지그시 바라보던 윈스턴이 물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