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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59화 (59/240)

59화

힘없이 옆으로 꺾이는 고개를 바로잡아 준 레온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여자는 이제 저항하지 못했다.

저항하지 않는 여자와 하지 못하는 여자는 다르다.

그는 파르르 떠는 젖가슴을 한 손 가득 쥐어 뭉개며 웃었다.

“흣!”

손가락에 달라붙어 있던 속살이 쩍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에야 여자가 목소리를 냈다. 손은 이미 모두 뗐는데 여자는 이따금 몸을 발작적으로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네 주제를 알았어야지.”

‘지독한 개새끼.’

그레이스는 손을 놀리며 속으로 제가 아는 모든 욕을 윈스턴에게 퍼부었다.

그는 그레이스를 묶은 밧줄을 풀자마자 탈진하지 말라며 입에 초콜릿 몇 개를 넣어 주었다. 왜 그 무자비한 악마답지 않게 친절하게 구나 싶었더니….

“하녀들이 곧 식사를 가져올 거야. 그 전에 치우도록.”

그레이스더러 엉망이 된 의자와 바닥을 치우란 거였다.

모욕당한 흔적을 스스로, 그것도 제 눈앞에서 알몸으로 치우라니. 레온 윈스턴은 사람을 손대지 않고 죽이는 법을 통달한 악마였다.

‘난 안 죽어. 넌 내 손에 죽어야 하니까.’

죽이고 싶은 남자는 테이블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애액이 흥건한 의자를 닦는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갈색 구두의 끝이 까딱거리며 바닥을 때렸다.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신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낮에는 2시에 와서 4시가 되기 전에 나가던 남자가 오늘은 5시를 넘기도록 고문실에 머물렀다. 게다가 오늘은 신문 중간에 짐승으로 돌변하지도 않았다.

‘왜 저러지?’

예상과 어긋나는 행동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

이제 이 의자에서 저질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건 오직 저 남자와 그레이스만이 알 것이다. 깨끗해진 의자를 치우려던 그레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바닥에도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앗!”

바닥을 닦으려고 쪼그려 앉다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져 버렸다. 다급히 바닥을 짚던 찰나였다.

까딱거리던 구두가 멈추더니 이쪽으로 저벅 다가왔다. 버클을 푸는 소리에 그레이스는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흑!”

세련된 정장을 입은 신사가 개처럼 바닥에 엎드린 여자를 범하기 시작했다.

신사는 무슨. 짐승 새끼. 네가 그럼 그렇지.

이 남자가 참을수록 힘들어지는 건 본인이 아닌 그레이스였다. 여느 때보다 더욱 흥분한 듯, 배 속을 꽉 채운 부피감이 엄청났다. 이미 한참을 손으로 쑤석댄 끝에 연해져 있는 내벽으로도 받아 주기 버거웠다.

곧 하녀들이 올 텐데. 문밖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축음기에선 아직도 색소폰 선율이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었다.

쿵쿵 치받히는 몸을 따라 흔들리는 문을 초조하게 주시하는 그레이스를 두꺼운 팔뚝이 감싸 안았다. 풀을 먹여 다린 셔츠 소매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동그랗게 뭉쳐 흔들리던 가슴이 뭉개지는 동시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내겐 네가 있는데 포르노가 왜 필요하겠어.”

그레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신사의 탈을 쓴 개새끼의 허리 짓을 받아 주며 속으로 되뇌었다.

살아 있는 창녀가 나아.

하녀방보다 고문실이 더 나은 데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뜨거운 물이 언제나 콸콸 나온다는 것.

“개새끼, 흑, 죽여 버릴 거야.”

그레이스는 요란한 물소리를 믿고 울음과 욕설을 입 밖에 냈다. 참았던 설움과 분노를 씻어 보내는 시간이었다.

떨어지는 물줄기와 희뿌연 김 속에 영원히 서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수도꼭지를 잠그자 욕실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음식 냄새도 옅게 풍겨 왔다.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물기를 짜는데 두껍고 부드러운 천이 등을 감쌌다. 뜻밖의 행동에 그레이스가 눈만 깜빡이는 사이 윈스턴은 아무 말 없이 몸에 수건을 둘러 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리란 욕실 입구의 벽이었다. 욕실에는 문이 없었다. 윈스턴은 그레이스가 샤워를 하는 내내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지키기라도 하는 양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지만 저 허기진 눈을 보면 그녀를 지켜 주기보단 저질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허기라니.

기가 막혔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그레이스를 바닥에 못 박듯 짓눌러 두고 욕구를 실컷 푼 남자 아닌가.

“대위님, 오늘 전채로는 레몬즙을 뿌린 굴을, 본 식사는 얇게 저민 송로를 얹은….”

욕실 입구 너머에서 젊은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가 아는 목소리였다. 하녀의 목소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마 두려움보다는 설렘일 거다.

그레이스는 샤워 부스 밖으로 나가 수건으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물기가 말라 보송보송해진 몸에 곧바로 질척한 시선이 달라붙자 다시 씻고 싶어졌다.

저런 색정광을 저 하녀는 금욕적인 면모가 오히려 몸을 달아오르게 한다며 흠모했다.

‘금욕이라니.’

기가 막혀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준비했는데 모쪼록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식사에 곁들이실 와인은….”

고문실에 갇힌 사람이 대체 누군지 엿보고 싶은 듯,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녀들은 윈스턴가와 하녀장의 험담을 함께 나누곤 했던 샐리 브리스톨이 갇혀 있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할까.

‘안녕, 난 사실 그레이스 리들이라고 해. 사령부든 대공가든 어디든 좋아. 제발 밖으로 나가 리들이란 성을 가진 여자가 고문실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내 줘.’

윈스턴이 상부에 그녀의 체포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감이 갈수록 강하게 들었다. 떠보듯이 상관의 반응이나 이 건으로 그가 군에서 얻을 이득에 관해 물었지만 윈스턴은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피했으니까.

병사들은 그의 수하이니 절대 별실 밖으로 소문을 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다스러운 하녀들은 또 몰랐다.

‘여기 갇혀 죽어 갈 생각은 없어.’

그레이스가 입구를 향해 한 발을 내딛는 찰나였다. 윈스턴이 보이지 않는 하녀에게 물러나라고 턱짓을 했다. 곧바로 그레이스도 똑같은 경고를 받았다.

오늘 그를 더 자극할 용기도, 기력도 없었던 그레이스는 얌전히 머리를 말렸다.

“대위님, 식사 준비 마쳤습니다. 또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윈스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고갯짓이나 손짓으로 대꾸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비로소 욕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레이스가 몸에 수건을 두르고 침대로 향하는 사이 윈스턴은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에 앉았다.

침대 옆에 둔 짐 가방에서 옷을 꺼내는데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옷장을 들여 줬는데 왜 쓰지 않지?”

그야, 여기 오래 머물고 싶지 않으니까.

그레이스는 대꾸 없이 옷을 입고 윈스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단정히 내리고 넥타이까지 다시 맨 모습이었다.

고급스러운 흰 테이블보가 깔린 철제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그레이스는 피식 웃었다. 여자를 이 위에 눕혀 놓고 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기서 식사를 하다니.

‘비위도 좋네.’

어쩌면 후식으론 또다시 그녀를 여기 눕혀 놓고 먹으려 할지도 몰랐다.

벌써 식욕이 떨어졌다. 심드렁한 눈으로 긴 테이블에 일렬로 늘어선 접시들을 훑어보는데 윈스턴과의 사이에 놓인 화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라일락?’

작은 크리스털 화병에 만개한 연보랏빛 라일락이 꽂혀 있었다.

여태 병사들이 식사에 장식을 가져온 적은 없었다. 그리고 윈스턴가의 고용인들은 식탁에 라일락을 올리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시선을 들어 마주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옅은 호기심이 비치는 연하늘색 눈동자가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저 남자 짓이구나.’

낭만적으로도 다정하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으로 느껴질 뿐.

이것 봐. 벌써 라일락이 피었어. 아, 넌 몰랐겠지.

내가 네 조롱에 기꺼이 놀아나 줄 줄 알고?

“멋진 정장에 고급 요리, 값비싼 와인, 거기다 예쁜 꽃까지. 대위님, 이거 데이트인가요?”

그레이스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묻자 마주 앉은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꿈도 야무지군.”

“휴….”

그녀는 보란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네요. 데이트 상대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윈스턴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레이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제 앞의 접시를 덮은 은빛 뚜껑을 열었다.

“식사는 까다로우신 공주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윈스턴이 또 반군 로열패밀리의 마지막 공주라며 빈정댔지만 그레이스는 대꾸 없이 접시 한가운데만 노려보았다.

값비싼 석화.

이제 기가 막힌 쪽은 그레이스였다.

윈스턴이 원하는 게 있으면 주문하라 했지만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식사를 주문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저자가 어떻게 지시를 내린 건지. 고문실 손님 전용 수프도, 고용인용 식사도, 별채 담당병용 식사도 아닌, 윈스턴가 사람들의 식사가 나왔다.

심지어 윈스턴이 같이 식사하지 않을 때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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