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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67화 (67/240)

67화

삽시간에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은 목숨이다. 윈스턴의 손에.

우당탕.

그레이스는 다급히 사지를 벌려 사방의 벽을 짚었다. 몸이 미끄러지다 철판과 맨 살갗이 거칠게 마찰하는 순간 턱, 멈췄다.

“하… 빌어먹을….”

몸을 지탱하며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한숨을 돌리자 조금 전 큰 소리를 낸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들키기 전에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쓸린 무릎과 팔이 아렸지만 아픔이 가시길 기다릴 시간도 없이 다시 투하관을 오르기 시작했다.

‘살았다.’

드디어 1층 투입구가 손에 만져졌다. 투입구의 턱에 팔을 걸치고 덮개를 살짝 올려 보았다. 비품실은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투입구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쉴 틈은 없었다. 기진맥진한 채 구두를 신고, 옷매무새를 고쳐 복도로 나왔다.

1층의 입구는 정문과 후문, 두 곳이었다. 먼저 정문 쪽에 난 창문으로 밖을 살펴본 그레이스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지독한 놈.’

담벼락에서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철문을 이 야심한 시각에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후문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문 앞에 깔려 있던 두꺼운 깔개를 챙겨 조심조심 별채 후원으로 나섰다.

벽에 붙어 서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모든 창문, 심지어 윈스턴의 침실 창도 두꺼운 커튼이 쳐진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잘 자, 이 개자식아.’

내가 빠져나가는 건 꿈에도 모르길.

그레이스는 재빠르게 후원의 작은 정자로 달려갔다. 벽에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데다 지붕이 높은 정자는 좋은 엄폐물이었다.

정자에서 두 걸음 떨어진 담벼락으로 정원용 의자를 가져갔다. 의자로 올라가 담벼락 너머에 돌아다니는 보초가 없는 걸 확인한 그레이스는 손에 들고 있던 깔개를 촘촘한 철조망에 걸쳤다.

휙.

지금까지 거친 관문에 비해 담을 넘는 건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정원을 지나 저택의 고용인 전용 후문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거짓말처럼 쉬웠다.

“해냈어. 내가 해냈어.”

저택의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포장도로에서 벗어나 사과 과수원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그레이스는 돌연 멈춰 섰다.

눈앞을 가리는 것이 제 눈물만이 아닌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굵은 빗방울이 얼굴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비 냄새, 흙냄새, 풀 냄새.

피의 비릿한 냄새가 죽음을, 속박을 뜻했다면 지금의 비릿한 내음은 삶을, 자유를 뜻했다. 그레이스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내음을 깊숙이 들이켰다.

사방이 검은 벽인 그곳, 뜨거운 물줄기 속에서 그랬듯 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건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자유야. 나는 자유야.”

딱.

하나, 둘, 셋.

딱.

하나, 둘, 셋.

딱.

무언가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합주라도 하듯 박자를 맞추던 피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규칙적인 소리는 사람의 짓인 게 분명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레이스?”

뜻밖의 인물이 창문 아래에 서 있었다.

그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하숙집 뒷문으로 나갔다. 물에 빠진 생쥐의 꼴을 한 그레이스가 피터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피터.”

서먹한 사이였던 피터가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당장 나를 여기서 철수시켜 줘.”

“어… 잠깐만….”

헤일우드에서 빼낼 방법을 고민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레이스를 담장 밖으로 이끌었다.

“일단 우체국으로 가자.”

어두운 시골길을 걸으며 피터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물었다.

“어떻게 나온 거야? 설마 윈스턴이 풀어 줬어?”

“그랬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내 힘으로 나왔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그레이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으스댔다.

“그런데 새벽엔 윈스턴 저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거야? 여기까지 오는 길에 아무도 안 나타나던데?”

당연히 동지 중 누군가가 그녀를 구출하려고 윈스턴 저를 감시하고 있을 거라 가정하는 물음에 피터는 말문을 잃었다.

‘그야 위에선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길 바랐으니까.’

모르는구나.

살아 나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레이스의 앞에서 난처해진 피터는 대충 얼버무렸다.

“윈스턴 쪽에서 항상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서 쉽지 않았어. 그래도 네가 무사히 빠져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우체국의 뒤편에 도착하자 피터는 마구간에서 말을 끌고 나와 우편 마차에 매었다.

“들어가 있어.”

그가 작은 짐마차의 뒷문을 열어 바구니와 상자를 꺼냈다. 그레이스는 텅 빈 마차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바로 출발하는 게 아니야?”

“낸시와 통화부터 해야겠어. 어디서 접선할지 정해야지. 무턱대고 출발할 순 없잖아.”

“낸시? 안가는 그럼 발각되지 않았단 거야?”

“응. 안가는 무사해.”

비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고 무릎을 세워 앉자 피터가 문을 닫아 주고 우체국 안으로 사라졌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들리는 건 쉴 새 없는 빗소리와 말이 이따금 투레질하는 소리뿐이었다.

저를 잡으러 오는 군인들의 발소리나 세단의 엔진음이 들리지는 않을까 귀를 기울이며 그레이스는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낸시와 약속을 잡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지 피터는 꽤 오래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나저나 안가가 아직 무사하다니.

‘그게 말이 돼?’

프레드가 제 누나는 걱정해서 안가를 밝히지 않고, 풀려난 후에 안가로 향하지도 않은 건가.

‘나는 겨우 협박 한마디에 팔아넘기더니.’

기가 막혔다.

피터가 상황을 아는 걸 보니 프레드가 지미에게 소식을 무사히 전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프레드는 바로 본거지로 향했을까? 그랬다면 분명 미행을 심었을 윈스턴이 본거지 위치를 그레이스에게 물을 이유가 없었다.

‘아귀가 맞지 않아.’

한번 수상하게 보기 시작하니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 사실과 추측을 이리저리 맞춰 보던 그레이스는 가장 아귀가 맞는 결론을 내렸다.

‘안가는 은밀히 감시당하고 있는지도 몰라.’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 낸시와의 접선을 취소하라 하려고 마차 문을 여는데 피터가 밖으로 나왔다.

“윈스포드 경계에서 낸시와 만나기로 했어.”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안가가 들키지 않았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미행이 있어도 이 새벽에 낸시가 따돌리지 못할 리가….”

“그냥 윈스포드와 가까운 전차 역에 내려 주고 브레이턴까지 갈 차비만 줘.”

“이 새벽에? 여자 혼자 비에 젖은 꼴로 전차 역에 서 있을 생각이야? 그리고 아침까지 전차를 기다리다 다시 붙잡히면 어쩌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레이스가 고집을 부리는 게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피터가 제 옷 주머니를 뒤지더니 욕지거리를 낮게 읊조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을 두고 왔어. 낸시에게서 받고 기차역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

“피터, 네 눈엔 내가 쓸데없이 예민하게 구는 것 같겠지.”

“…….”

“난 다시 잡히고 싶지 않아.”

지친 눈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던 피터가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아이를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그레이스, 잡히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출발해야 우체국이 문을 여는 시간 전에 헤일우드로 돌아올 수 있어. 내가 새벽부터 마차를 끌고 돌아다닌 걸 들키면 윈스턴의 의심을 살 거야.”

냉정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출발해.”

저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트릴 순 없었던 그레이스는 고집을 꺾고 마차 문을 닫았다.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나무 벽에 몸을 기대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가 지금 너무 불안해서 비이성적으로 구는 건지도 몰라.’

안 잡힐 거야. 난 안 잡힐 거야. 같은 말만 되뇌며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가장 어려운 별채 탈출도 단번에 해냈는데 뭘 불안해하는 거야?’

되돌아볼수록 이건 신이 그녀의 편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욕실 벽의 위치부터 완벽했다. 며칠간 벽에 귀를 대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파이프가 없는 자리를 엄선한 덕도 있지만 전선조차 없었다니.

“머저리.”

제 애완 쥐가 우리에서 탈출한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윈스턴에게 보내는 조롱이었다.

고문실에 그득한 고문 기구의 대부분은 공구였던 덕분에 수월하게 벽을 팔 수 있었다. 게다가 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지도 않았던 걸 보니 고문실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도 되는 줄 착각한 게 분명했다.

‘거기서 일한 내가 누구보다도 허점을 잘 아는데.’

그레이스는 나직이 웃었다. 고문실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내가 저곳에 갇히면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자주 상상해 보곤 했다.

그리고 그 상상 중 하나를 훌륭하게 실현해 냈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결국은 나의 승리로 끝났어, 레온 윈스턴.’

아침 식사 시간에야 사라진 걸 알고 허탈해할 그놈을 떠올려 보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탈진에 추위까지. 너무나도 지친 그레이스는 수마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졸지 마. 아직은 잘 때가 아니야.’

빗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곧 다시 움직일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피터가 마차 앞쪽의 마부석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발소리가 이쪽으로 이어졌다.

‘벌써 다 온 건가?’

중간에 곯아떨어졌나 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비좁은 마차에 구겨 넣었던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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