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여자가 책상 아래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캠벨이 입을 다물고 봉투를 레온의 앞에 놓았다.
“보고 계속해도 돼.”
어차피 여자는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테니.
“네 눈은 왜 그런 색이야?”
“돌연변이?”
“그 다갈색 머리도 돌연변이인가?”
“증조할머니가 갈색 머리셨으니까.”
웃기지도 않지.
여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눈치 빠른 캠벨은 여자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보고를 이어 나갔다.
“대위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대략 26~28년 전, 사령관의 공적 및 사적 행보를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소속 부대였던 왕실 근위대의 기록도 첨부해 두었습니다.”
레온은 싱클레어 건을 제쳐 두고 사령관의 조사 결과가 담긴 봉투를 먼저 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시 측근으로부터 꽤 흥미로운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예상하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보고를 끝낸 캠벨이 나가자 레온은 대븐포트 사령관의 조사 결과에서 캠벨이 언급한 측근의 인터뷰부터 찾아보았다.
한 장, 또 한 장. 넘길수록 레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독특한 눈동자와 머리칼의 색만으로 넘겨짚기에는 무모한 감이 있었으나 직감을 믿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그건 그렇고…. 안젤라 리들의 목적은 뭐였을까.’
지금 그의 책상 밑에서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여자가 누구의 축복도 받을 수 없는 생명의 뿌리를 제 어미의 배 속에 내렸을 즈음 있었던 사건을 짚어 보다 레온은 웃었다.
‘그해에 왕이 바뀌었지.’
심장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피가 포로의 몸을 타고 흐르는 모습을 지켜볼 때처럼 저릿한 희열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레온은 책상 밖으로 상체를 내밀고 햇빛 속에 누운 여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하나, 착실한 하녀.
둘, 교활한 첩자.
셋, 악몽만을 남긴 첫사랑.
넷, 죽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원수의 딸.
다섯, 주인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 하는 애견.
레온 윈스턴의 사전에서 ‘그레이스 리들’만큼 정의가 긴 단어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니.
여섯, 왕당파와 반군의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일곱, 제 가문 수장의 목숨을 잡아먹고 태어난 자손.
그리고 다섯 번째 정의는 수정이 필요했다.
그레이스 리들은 레온 윈스턴의 개다. 하지만 애견이 아니라 사냥개였다. 혈통이 우수한 군견을 아비로 가진 잡종 사냥개.
그리고 여덟 번째 정의. 존재부터가 제 생부의 약점인 여자.
덕분에 왕당파의 개, 레온 윈스턴이 저보다 서열이 까마득히 높은 왕당파의 늙은 개 위에 군림할 수 있게 되었다.
기쁘지 아니할 리가.
“왜?”
진흙탕 속을 뒹구는 개처럼 햇빛 속에 늘어져 있던 여자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레온은 허리를 숙여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예뻐서.”
여자의 미간이 더욱 구겨졌다.
“농담이 아니야. 정말 예뻐.”
내 손에 이토록 귀한 카드를 쥐여 주다니. 내가 널 사랑했더라면 실수로 사랑 고백이라도 할 뻔했어.
그는 카펫을 움켜쥔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진심 어린 감사를 담은 입술이 손등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고마워, 리들 양.”
아니지. 대븐포트 양이라고 불러야 할까.
레온은 손을 놓고 목줄을 집어 올렸다. 사슬을 천천히 감자 여자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스는 순순히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뒷머리를 손이 감싸 쥐었다. 시키는 대로 탄탄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댔다. 또다시 개처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아래에서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저 속을 정말 모르겠다.
갑자기 왜 리들이라고 부를까. 요즘은 벨라 아니면 강아지였는데. 꺼림직했다. 느닷없이 한 예쁘단 말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도 정말 예뻐. 눈에 바다가 담겨 있어.”
왜 그 목소리를 떠올린 걸까. 그레이스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떨쳐 내려 머리를 작게 흔들었다.
손이 멈추더니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시 넘겨준 손가락이 이젠 귓바퀴의 굴곡을 덧그렸다.
그레이스는 다른 남자의 손안에서 약혼자를 떠올렸다.
지미는 내 걱정을 하긴 할까?
아니야. 시도는 계속하지만 실패한 걸지도 몰라. 윈스턴 저의 경비가 좀 삼엄해야….
그렇지만 수용소 습격은 성공했잖아. 상식적으로 윈스턴 저의 경비가 수용소보다 더 철통같을 리가 없는데.
턱 선을 타고 미끄러진 손끝이 입술을 어루만지더니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레이스는 몸에 밴 대로 엄지 끝을 혀로 핥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윈스턴 대위가 지하 고문실에 하녀를 가둬 두고 있다는 소문만 내도 되겠다. 소문이 퍼지고 윈스턴 부인과 대공의 귀에만 들어가도 승산이 있을 텐데.
소문을 냈는데 안 통하는 건가? 아니지. 그랬으면 윈스턴 부인이 이미 고문실로 쳐들어오고도 남았지.
그레이스의 머리칼 한 줌을 쥐고 손가락에 감았다 풀며 손장난을 치던 남자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
그 순간에야 그레이스는 문득 깨달았다. 윈스턴의 말에 흔들려 지미를 원망하고 있었다는 걸.
“너를 죽이는 생각.”
픽 웃는 소리가 나더니 긴 손가락에 감겨 있던 머리칼이 회오리치며 풀려났다.
“나도 정말 널 죽이고 싶어.”
검지 끝이 그레이스의 목덜미를 일직선으로 덧그렸다. 맥박이 뛰는 자리를 따라.
저 남자는 그곳을 긋지도 조르지도 못한다. 그러니 죽이고 싶다는 살벌한 말도 난 너 따위가 좋아서 도저히 어쩌지 못하겠다는 절규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레이스는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토해 내지 않으려 입술을 짓씹었다.
좋아한다는 것이 면죄부는 아니다.
감정은 오롯이 저자의 몫이기에 그레이스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질긴 감정의 씨앗을 저 남자의 가슴에 심은 건 제 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이런 말을 되뇌어야 했다.
저자의 손아귀에서 살아 나가느냐 마느냐의 위기에 놓인 그녀에게 그가 겪는 혼란 따위는 배부른 유희일 뿐이었다.
가진 자들이란, 많은 걸 가지고도 가지지 못한 단 한 가지 때문에 불행 속을 허덕인다.
내가 저 남자의 불행이라니.
그건 나쁘지 않았다.
‘그럼 평생 내 마음만은 가지지 못하게 해 줄게.’
아주 쉽고도 효과적인 복수였다. 무심결에 미소를 짓는 순간, 목덜미의 혈관을 더듬던 손이 돌연 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올라와.”
윈스턴이 족쇄를 풀어 주자 그의 무릎 위에 고분고분히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역광 속에서도 음영이 뚜렷한 얼굴을 응시하는 그레이스의 속이 얼어붙고 끓어올랐다.
잘그락. 남자가 목줄을 당겼다. 키스하라는 명령이었다.
몸은 가졌으나 마음만은 가지지 못한 가련한 주인이시여. 당신의 분부대로.
그레이스는 개 목줄을 당기듯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고 당겼다. 보잘것없는 복수였다.
가소롭다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술 틈을 제 입술로 틀어막았다. 살점을 짓눌러 젖히고 잇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넥타이 매듭을 뜯어 발길 듯 움켜쥐고, 잡아먹을 듯이 혀를 휘젓고 입술을 훔쳤다.
공격적인 키스였다.
얼마 전만 해도 적극적으로 굴라는 강요를 받으면 자괴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젠 관계를 주도하는 데서 오히려 우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역전될 처지라 해도 말이다.
“으응….”
“하아….”
약혼자와 해야 할 일을 다른 남자와 한다는 죄책감은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어차피 살기 위해 하는 짓일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 약혼자는….
그만.
또 지미를 원망하려 했다. 독사의 독처럼 마음의 실금으로 스미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치고자 그레이스는 그 독사와 살을 섞는 역겹고도 짜릿한 짓에 몰두했다.
그레이스의 삶은 이토록 모순투성이였다.
옷 위를 배회하던 손이 치마를 걷어 올렸다. 손은 곧장 블루머 속으로 파고들어 엉덩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팔이 몸에 단단히 휘감기고,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레 몸이 떠오르는 느낌에 놀란 그레이스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두 몸뚱이가 밀착됐다. 아래가 뜨거웠다.
윈스턴은 한 손으로 그레이스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책상에 놓인 뭔가를 밀어냈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팍이 부풀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며 젖꼭지가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야릇한 마찰 탓일까, 갑자기 눕혀진 탓일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시야 한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도는 검은 물체가 멈추기도 전에 무릎이 활짝 벌려졌다. 우두둑, 파열음이 나며 블루머 가운데의 촘촘한 솔기가 무지막지한 힘에 뜯어졌다.
주도권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넘어갔다.
뜨거운 숨이 밀지의 여린 속살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무뎠던 초점이 날카로워지며 눈앞에서 빙빙 돌던 것의 형체가 또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