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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92화 (92/240)

92화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네 아버지가 감옥에 간다는 건 거짓말이야. 아무 말 하지 마. 저들이 뭐라 하든 네가 말을 할수록 네 아버지가 불리해질 거야.”

제프리 싱클레어는 누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소년이 제 아버지에게 들이닥친 비극이 제 탓이라고 죄책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게 어떤 지옥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알겠어? 무조건 입 다물어.”

소년이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누가 문을 두드렸다.

“뭐지?”

“아, 대위님.”

문이 열리더니 그의 밑에 있는 중위가 경례를 올렸다.

“무슨 용건이야?”

“중령님께서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중령이 있는 조사실의 문이 열리자 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의 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없는 사이에 고문을 가한 건지 제프리 싱클레어는 어제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테이블에는 종이 두 장이 놓여 있었다. 글씨가 빼곡한 한 장은 누군가가 대신 쓴 허위 자백서일 게 뻔했다. 제프리 싱클레어가 펜을 쥔 손을 떨고 있는 걸 보니 그의 필체로 빈 종이에 옮겨 적으라고 강요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던 거다.

“아, 대위. 드디어 왔군.”

싱클레어에게 거친 말을 쏟아붓던 중령이 알은척을 했다. 레온은 경례를 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자네가 없는 사이에 콜린스 중위가 애를 많이 썼어. 잘 가르쳤군.”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중위가 중령의 칭찬에 가슴을 활짝 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제가 지금 무슨 수렁에 발을 들이는지도 모르고 뛰어들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중위가 안으로 밀어 넣자마자 아이는 제 부친을 부르며 달려갔다. 군이 아들에게까지 손을 뻗친 것은 몰랐는지 제프리 싱클레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샘, 네가, 네가 왜 여기에….”

그가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안으며 묻는 순간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집에 가요. 여기 무서워서 싫어요. 흐흑, 집에 가고 싶어요.”

군인들 앞에서는 떨면서도 의연하게 버티던 아이가 제 아버지를 보는 순간 무너졌다. 레온은 지친 한숨을 짤막하게 내쉬었다.

10살짜리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처럼 울며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건 군인들에게 했어야 한다. 여기서 울어 봐야 이미 벼랑 끝에 놓인 제 부친을 흔들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의지가 굳세지 못했던 제프리 싱클레어도 아들과 함께 무너졌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아이는 보내 주십시오.”

어린 아들로 협박하는 중령의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역겹기 짝이 없군. 여긴 내가 없어도 아주 잘 돌아가겠어.’

남자가 가짜 자백서를 받아쓰는 걸 흡족한 얼굴로 지켜보던 중령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샘이랬나? 네 아버지는 지금 바쁘니 이 아저씨랑 놀자꾸나. 사령부 뒤뜰에 강아지를 보러 갈까?”

제프리 싱클레어의 손이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사령부에 강아지가 있을 리가. 군견을 말하는 걸 저 남자도 눈치챈 것이다.

“자, 잠깐….”

남자가 아이의 손을 쥐며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중령이 아닌 레온을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다른 인간들이 악랄함의 도를 넘으니 악마 레온 윈스턴이 천사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중령님은 여기 계시죠.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자넨 서명해야지.”

중령이 레온의 제안을 단칼에 뿌리치더니 남자에게 경고했다.

“싱클레어 씨, 하던 일이나 얌전히 마저 하시죠. 끝났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아이는 집에 무사히 보내 드릴 테니.”

중령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펜이 종이를 다급히 긁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레온은 벽에 기대어 서서 남자를 응시했다. 아들을 위해 제 자유, 그리고 어쩌면 목숨까지 희생하겠다니. 자식이 걸린 일이라면 다 이런 건가.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자유, 그리고 어쩌면 목숨까지….’

레온은 돌연 밖으로 나와 사령관실로 향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당연하게도 사령관은 그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싱클레어 건에 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사령관이 쥐고 있던 펜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어.”

“그건 잘 압니다.”

사령관은 그 여자를 지키는 카드였다. 남의 일에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국왕과 친분이 있는 권력자라도 이번 일로 국왕과 대적시켜 눈 밖에 나게 만들면 정작 필요할 때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그의 한계를 잘 안다는 말에 긍지가 상한 듯, 눈빛이 매서워진 사령관에게 레온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프리 싱클레어가 받을 처벌은 정해졌겠죠?”

위에서 처벌 수위 또한 정해 두었을 것이란 추측을 사령관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분도 이게 위험한 수인 건 알고 계시네.”

그럼 두지 말 것이지.

“그러니 사형까지 가진 않을 거야. 수용소에 수감해 두었다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자비롭게 사면해 줄 걸세.”

사령관도 이 일에 딱히 동조하지는 않는지 ‘자비롭게’라는 말을 강조하며 코웃음을 쳤다.

“아, 물론 재산은 압류되겠지. 범법 행위로 모은 재산이 될 테니.”

경쟁자에게서 강탈한 돈으로 입찰 로비를 하려는 건가.

추함의 끝을 보여 주는군.

원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레온은 조사실로 돌아왔다. 제프리 싱클레어는 재빠르게 필사를 마쳤다. 제법 결연해 보이던 남자는 서명을 하는 순간, 북받치는 울분을 참지 못했는지 울먹였다.

“대위님께서 서명하실 차례입니다.”

콜린스 중위가 자백서를 빼앗아 레온의 방향으로 돌렸다. 제프리 싱클레어의 서명 아래, 국내정보과장의 서명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자백서 한 장. 그리고 그자의 서명, 자네의 서명. 그뿐일세. 쉽지.”

그래, 쉽지.

나를 희생시키는 건 쉽겠지.

직감이 말했다. 언젠가 모든 것이 발각될 것이다.

레온은 죄 없는 희생양의 서명을 응시했다. 둥글게 휘갈겨 쓴 글자 하나가 올가미를 닮아 있었다.

세상이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저것에 목이 걸릴 자는 과연 누구일까.

* * *

술에 취한 여자가 비틀거렸다.

“공주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죠.”

신사답게 손을 잡아 주었더니 ‘공주’가 픽 웃었다.

“다쳐도 병원에 보내 주진 않으니까.”

덧붙인 말에 여자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레온은 화답하듯 술병을 내밀었다. 술기운이 올라 체리처럼 빨개진 입술이 열리며 캐러멜 빛의 액체를 머금었다.

“천천히 드세요, 공주님.”

지금 그에게서 술을 받아 마시는 여자는 저를 반군 로열패밀리의 공주라고 놀리는 줄로만 알 것이다. 제게 왕족의 피가 흐르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네 혈통이 나보다 귀할 줄이야.’

실은 그래 봤자 방계 왕족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그것도 평민과 피가 섞인 잡종.

“앉아 봐.”

그는 또 비틀거리며 방 안을 배회하려는 여자를 붙잡아 철제 테이블에 앉혔다. 족쇄와 사슬의 무게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해 자꾸만 넘어지는 것 같아 족쇄를 풀어 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취해선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

여자는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럼주가 벌써 반이나 사라진 병을 집어 들었다. 성급히 기울인 탓에 진한 빛깔의 액체가 자그마한 입가 너머로 넘쳐흘렀다.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이 곧 목덜미를 지나 흰 셔츠를 엉망으로 물들일 것이다.

레온은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살결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의 입술 사이에 맺혔다.

오크 통에서 오래도록 숙성한 럼주의 풍미가 한층 깊어졌다. 캐러멜과 시나몬의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여자의 부드러운 체취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그의 생애 최고의 럼을 완성하는 마지막 비법은 이 여자였다.

레온은 셔츠를 향해 굴러떨어지는 물방울을 입술로 모조리 훔쳐 냈다. 그는 옷을 더럽히는 걸 끔찍이 싫어했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핑계일 것이다.

“으응… 간지러워.”

여자가 술병을 놓은 후에도 그는 목덜미를 핥았다.

“저리 가.”

여자가 짜증을 내며 그를 밀어냈다. 저리 가라니. 완전히 벌레 취급이었다.

“아흣!”

셔츠째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천이 구겨지며 부스럭 소리를 냈다.

그는 옷이 구겨지는 것도 끔찍이 싫어했다. 하지만 여자의 굴곡이 그의 옷에 새겨지는 건 나쁘지 않았다.

셔츠가 계속해서 구겨졌다.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여자의 애걸 섞인 신음과 어우러져 야릇한 화음을 자아냈다.

“하읏!”

“셔츠 도둑.”

한 번은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여자가 그의 셔츠를 뻔뻔스레 훔쳐 입고 있었다. 그가 정한 규칙을 늘 새로운 방법으로 어기는 여자가 이젠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한편으론 그의 옷을 걸친 여자는 꽤 봐줄 만했다.

“입으라고 줬으면서 누명을 씌우네? 역시 모사꾼을 왕으로 모신 왕정의 돼지 새끼다워.”

여자가 한쪽 어깨를 드러낸 꼴로 비아냥댔다. 적어도 오늘은 할 말이 없었다. 고문실로 오자마자 셔츠를 벗어 준 건 그였으니.

“으응… 하지 마.”

조금 괴롭히다 놓아주었다. 여자는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곧장 검은 철문으로 향했다. 제겐 너무 큰 셔츠를 걸치고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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