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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03화 (103/240)

103화

“내 눈으로 잠깐 확인만 하겠다는 거야. 간단한 일을 두고 지나치게 경계하는군. 그럴수록 의심스러운 걸 자네는 모르나?”

“거짓이 들통날까 봐 경계하는 게 아닌 건 잘 아실 텐데요.”

“이봐, 대위. 난 그 앨 제거하러 온 게 아니야. 좋아, 몸수색을 허락하지.”

사령관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제 몸에 무기가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하게 해 주겠단 뜻이었다. 레온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자네에게서 빼앗으러 온 것도 아니네. 난 그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어.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기 싫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잠깐 맞는지 확인만 하자는 거야.”

“나가시죠.”

레온은 그가 어떤 목적으로 왔건 여자를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령관은 막무가내였다.

‘그 여자, 고집도 제 부친을 닮았나….’

초로의 남자는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려는지 몸을 돌렸다. 어차피 여자는 거기 없었지만 레온은 이자를 어서 별채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다. 침실에 혼자 남겨진 여자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을지 몰랐다.

“눈동자 색, 확인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진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 이유는 사진만 봐도 알 것이다.

사령관이 멈춰 서더니 이를 악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로 뭔가 따지려던 자의 얼굴이 갑자기 멍해졌다. 시선은 레온이 아닌, 한참 뒤에 있었다.

“맙소사….”

순식간에 얼이 빠진 사령관의 시선을 따라가 본 레온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여자가 계단 위에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라가!”

저 도둑고양이 같은 여자. 다시 내려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가라고 했어, 당장!”

“조지아….”

레온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선 여자에게 윽박지르는 사이, 사령관의 입에서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조지아는 몇 년 전 요절한 사령관의 막내딸이었다.

사령관이 느닷없이 미쳐 죽은 딸의 유령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자의 뒷조사를 할 때 가족사진에서 본 죽은 여자가 그레이스 리들과 제법 닮았다는 건 기분 나쁘지만 레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보여 주지 않으려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 딸아. 이리, 이리 오렴.”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그레이스를 딸이라고 부르며 두 팔을 벌렸다. 분명 낯선데 낯이 익기도 했다. 남자는 그녀와 같은 다갈색 머리를 갖고 있었다. 묘하게 닮은 듯한 얼굴에선 그녀와 똑같은 청록색 눈동자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사고가 멈춰 버린 그레이스에게 두 남자가 동시에 정반대의 지시를 내렸다.

“조지아, 이 아비에게 오렴.”

“리들, 당장 올라가!”

초로의 남자가 참다못해 위로 올라오려 하고, 윈스턴이 그를 막아섰다. 두 남자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레이스는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발을 마침내 뗐다.

타다닥. 발소리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울렸다. 레온은 망연자실한 사령관을 내려다보며 승자가 지을 수 있는 가장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님께선 싫으시다는군요. 확인은 충분히 하셨으니 이만 가시죠.”

“자네, 감히 내 딸을 개 취급하는 건가.”

사령관은 여자의 목에 걸려 있던 개 목걸이와 줄에 뒤늦게 집착하며 그를 질타했다.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노망이 난 게 분명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 여자와 엮이기 싫다던 조금 전의 말은 그새 잊다니.

“이건 나를 모욕….”

“사령관님의 인생을 끝장낼지도 모를 시한폭탄을 딸이라고 부르시다니.”

“…….”

“정신 차리시죠.”

5분 만에 5년은 늙은 얼굴이 된 사령관을 밖으로 쫓아내는 내내 레온은 태연하게 굴었으나 속은 그렇지 못했다. 최후까지 아껴 두려 했던 출생의 비밀이란 카드를 이자가 그의 손에서 대뜸 빼앗아 멋대로 써 버린 셈이었으니.

가슴속에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도망치던 여자를 떠올린 순간 그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뜻밖의 희열이 솟구쳤다.

여자가 그의 명령에 따랐다.

비스듬히 올라가던 입꼬리가 돌연 굳었다.

아니지. 어쩌면 여자는 충격적인 진실에서 그저 도망친 건지도 모른다. 현실을 부정하는 일만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여자이니까.

“내 말을 어긴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각오하란 협박은 그레이스에게 겁을 주긴커녕 의구심만 키웠다. 당장 벌을 주지는 않을 거란 소리였으니까.

평소엔 옷을 벗겨 모조리 빼앗은 다음 저속한 말이나 행동을 하며 그레이스를 갖고 놀다 나가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레이스를 고문실로 끌고 오자마자 발목에 족쇄를 채우기만 하고 나가려 했다.

그녀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그레이스는 두 남자 사이에 오가던 기묘한 대화를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내 딸아. 이리, 이리 오렴.”

거기다 낯선 남자의 이상한 말과 행동까지 얽혀 들며 그 모든 게 잘못 감은 실타래처럼 단단히 엉켰다. 그걸 풀어 줄 사람은 지금 문밖으로 도망치듯 나가려는 저 남자뿐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를 다급히 붙잡아 세웠다.

“그 사람 누구야?”

그녀를 딸이라고 부르던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부녀지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녀와 닮았었다.

“노망난 노인네.”

“아니잖아!”

제발 아니라고 해. 내 불길한 예감이 틀렸다고 말해 줘.

남자는 간절히 매달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문고리를 쥐었다.

“지금은 가 봐야 해. 나중에 얘기해.”

“약혼식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잖아!”

뿌리치고 가려는 그를 여자가 온몸으로 막았다. 멱살을 억세게 잡기까지 했다. 보타이를 맬 줄은 모르는 주제에 푸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는 여자였다.

현실 부정 또한 놀라우리만치 잘하는 여자가 왜 곱게 묻어 두었으면 하는 현실은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걸까.

“손목 부러지기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놔.”

“못 가! 말해 주고 가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내 신경을 긁는 것과 다리를 벌리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없는 너는 모르겠지만 난 굉장히 바쁜 사람이야.”

흥분한 여자에게 레온은 느긋하게 조롱을 퍼부었다. 여자가 입가를 파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좋은 말은 여기서 끝이니까 그만 놓도록 해.”

셔츠 깃을 움켜쥔 손목을 경고 삼아 잡았다. 하지만 여자는 겁을 먹고 손을 빼긴커녕 다른 손을 그의 얼굴에 휘둘렀다.

퍽 소리가 울리며 얼얼한 통증이 왼쪽 아래턱에서 파문처럼 퍼졌다. 작지만 단단한 손마디가 스치는 순간에는 입술에 따끔한 통증이 일기도 했다.

“하….”

레온은 턱을 움직여 보다 실소를 흘렸다.

“하여간에 손버릇 나쁜 여자.”

똑같이 주먹질을 해 줄 수도 없고.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 한 대만 때려도 병원에 데려가야 할 테니.

분명 그걸 알고 자신만만하게 그에게 주먹을 휘두른 여자의 손버릇을 어떻게 고쳐야 하나 고심하는 찰나 비릿한 쇠 맛이 입 안으로 퍼졌다.

레온은 찢어진 입술을 훑어 보았다. 엄지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쿵쿵 가슴을 난폭하게 두드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누르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불길한 조짐을 느꼈는지 그를 노려보던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의 것이 아닌 피 냄새는 여전히 그의 피를 끓게 했다. 레온은 붉은색을 본 황소처럼 이성을 잃었다.

“윽!”

여자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고 당겼다. 그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여자를 태워 죽일 듯 불꽃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한 자 한 자 짓씹어 뱉었다.

“정말 그 남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

조금 전까진 알아야겠다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난동을 부리던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청록 빛 눈동자에 두려움이 새파랗게 서리기 시작하자 레온은 피를 핥아 마시며 찢어진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네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을 똑똑히 지켜봐야겠어.

“조지 대븐포트. 방계 왕족이자 신임 서부 사령관. 근위대 장교였던 젊은 시절에 네 모친이 접근했지.”

“…….”

“물론 육체적으로.”

여자의 눈빛이 사납게 외쳤다. 거짓말 말라고. 제가 살아 있는 증거인 주제에.

“그렇게 몸을 팔아서 정보를 빼내다가 멍청하게 그자의 아이를 가져 버린 거야. 그 아이가 누굴까? 응? 누굴 것 같아?”

정답을 이미 아는 여자의 눈동자가 칼에 찔려 벌벌 떠는 몸뚱이처럼 경련했다. 얼굴도 죽음을 목전에 둔 듯 창백해져 갔다.

“딱하군. 네 몸에 네가 혐오해 마지않는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니.”

“아, 아니야….”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느다랗게 속삭이는 순간 레온은 주먹보다 더 아픈 말을 날렸다.

“그레이스 리들, 네가 바로 블랜차드 반군이 더러운 미인계를 쓴다는 증거야.”

그의 멱살을 여태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를 또다시 때리려 할 줄 알았으나 여자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꺼져,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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