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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04화 (104/240)

104화

퍼걸러의 지붕을 덮은 흰 오르간자 천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탁 트인 정원 한가운데에 마련된 피로연장은 선선한 밤바람도 식히지 못하는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오로지 피로연장의 정면에 마련된 주빈 테이블만이 싸늘한 냉기를 풍겼다.

가문 어른들이 자리를 뜨자 테이블에 남은 세 명의 젊은 남녀는 감정을 더는 숨기지 않았다. 레온은 둥그런 테이블에서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동생과 약혼녀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 다 약혼식이 아닌 장례식에 온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약혼녀라니.

쓴맛이 번지는 입을 샴페인으로 씻어 내리던 레온은 다시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약혼녀라는 말에 거북스러워하다 끝내 다른 얼굴을 떠올리는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혼이란 세를 불리기 위한 사업일 뿐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자면 그 빌어먹게 비천하고 성질머리 나쁜 여자와의 결혼은 자선 사업이었다. 그가 가진 걸 다 내어놓아야 할 테니.

‘미친 거지.’

잘 알면서도 그를 원하지도 않는 여자와의 손해뿐인 결혼을 이따금 상상하는 제 머리에 총알을 박고 싶었다.

플로어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레온은 심드렁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윈스턴 부인의 고리타분한 취향 탓에 재즈에 어울릴 복장을 한 사람들이 왈츠를 추고 있었다.

노란빛의 전구와 푸르른 덩굴이 휘감긴 들보 아래에서 샴페인 잔을 손에 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고급스러운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인파를 칙칙한 장교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헤치고 다가오기 시작하자 레온은 눈빛을 보냈다.

오늘 밤 고문실 감시를 담당한 인원 중 하나였다. 장교는 귓속말로 여자의 동향을 보고했다.

“한 시간째 누워 있습니다.”

“식사는.”

장교가 조마조마한 눈을 하곤 고개를 저었다. 레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부하를 돌려보냈다.

여자가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오늘 밤은 고문실 문을 열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했다. 매시간 보고 또한 올리도록 한 덕에 약혼식이 그나마 덜 지루했으나 한편으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충동이 거세지기도 했다.

애초에 이 망할 광대 쇼가 아니었더라면 오늘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온은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며 멀지 않은 곳에 앉은 사령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저녁 내내 어두운 얼굴로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함부로 연 제 멍청한 실수를 후회하고 있길 레온은 바랐다.

그러나 멍청한 실수를 후회해야 하는 처지인 건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정도 후에 증거를 차근차근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사이 여자 혼자 그 작은 머리통 속에서 이 일로 온갖 상상을 크게 부풀리도록.

그래서 그 단단한 알껍데기에 틈이 생기도록.

진실이 더욱 쉽게 스며들 수밖에 없게.

그렇게라도 허무하게 써 버린 카드를 살리려 했건만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이성을 잃고 진실을 토해 냈다.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머저리.

그러니까 결국 그 카드는 가진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휴지 조각이 된 것이다.

하필이면 관계가 삐걱댈 때 일이 터진 것도 최악이었다.

‘삐걱대는 관계?’

레온은 제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하객들을 헤치고 피로연장 밖으로 나서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우린 처음부터 삐걱대기만 했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관계였다. 놓지 못하고 맞지도 않는 단추를 억지로 끼워 가며 여기까지 왔다. 도중에 바로잡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아니, 애초에 잘못 끼운 첫 단추부터 완전히 잘라 내는 것 외엔 고칠 방법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그는 계속 잘못된 단추를 끼워 나가고 있었다.

“레온, 어딜 가는 거니?”

정원을 지나는데 새로 들인 조각품을 하객들에게 자랑하던 어머니가 쫓아와 그를 불러 세웠다.

“한 시간만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될 텐데.”

불꽃놀이가 지루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할 미끼인 나이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곧 돌아올 겁니다.”

어머니의 못마땅한 얼굴 뒤로 불을 환하게 밝힌 피로연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대공녀를 댄스 플로어로 이끄는 제롬의 모습에 시선이 박혔다. 두 사람 다 이제는 약혼식장에 걸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온은 돌아서서 별채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장례식장에서 벗어났지만 굳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내가 고아원에 보내자고 했잖아!”

새된 외침이 귓전을 날카롭게 울리자 그레이스는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아 봤자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는 소용이 없었다.

“내 딸아. 이리, 이리 오렴.”

“그레이스 리들, 네가 바로 블랜차드 반군이 더러운 미인계를 쓴다는 증거야.”

아니야! 아니라고!

목이 쉬도록 절규를 내지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활짝 열린 문밖을 지키고 선 여자들이 제 상관에게 일러바칠 것이다. 제가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를 그 교활한 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인계라니. 몸을 팔아 정보를 얻다니. 긍지 높은 군인이었던 어머니가 저질스러운 수법을 썼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항상 작전에 함께했던 아버지가 그걸 지시했다는 것도, 좌시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윈스턴의 주장을 반박할 증거를 더 찾고자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던 그레이스는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저게 다였다. 윈스턴의 말이 틀렸다는 증거는 하나같이 빈약한데 그의 말이 맞다는 증거는 너무도 강력했다.

청록색 눈은 돌연변이가 우연히 두 사람에게 나타난 거라 우겨 볼 수 있겠지만 이 독특한 눈동자에 머리칼 색과 이목구비까지 흡사한 건 과연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거기다 제가 작전 중 실수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한다면 부모님의 서먹했던 태도가 설명되었다.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다는 말 또한 아귀가 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존경해 마지않는 어머니, 제 삶의 목표였던 어머니가 스스로 그런 짓을 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작전 중에 그 남자에게 억지로 당한 건지도 모른다. 왕당파란 하나같이 발정 난 돼지 새끼들이니까.

“세상에… 끔찍해….”

그래, 미인계라니 말도 안 되지. 이건 그 교활한 개자식의 수작일 뿐이다.

결국엔 그렇게 확실한 증거와 가장 쉬운 결론까지 모두 부정했다. 그레이스는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윈스턴을 끝없이 헐뜯었다.

몸을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정신까지 멋대로 유린하려는 극악무도한 인간. 아니,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악마.

‘그 개자식이 다 꾸민 걸 거야. 믿지 마. 이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

그 소년이 나쁜 아이였을 거라고 믿다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거짓이라고 믿으면 거짓이 될 것 같았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윈스턴을 향한 증오에라도 악착같이 매달려야 했다. 굳건한 감정은 그뿐이었으니.

‘내가 왕당파의 자식일 리가 없어. 더러워. 더러워.’

부정하는 동시에 긍정하며 그레이스는 제 팔뚝을 벅벅 긁었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새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핏방울이 자잘하게 맺힐 때까지 살갗을 긁는데 밖에서 둔탁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담요 아래에서 이를 악물었다.

“지금부터 두 시간 동안 별채를 비우도록.”

레온은 장교들을 쫓아내고 고문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발치의 테이블에 놓인 은 쟁반은 덮개가 여전히 덮여 있었다. 한번 열어 보지도 않은 게 분명했다.

시궁창에 처박힌 것만 같은 지금의 기분대로 여자를 대하면 관계는 더욱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는 화를 최대한 누그러뜨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예상대로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깨로 보이는 걸 담요째로 쥐고 살짝 흔들자 그제야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버려 둬. 오늘 네 수작질에는 당할 만큼 당했어.”

수작질이라니.

레온은 혀를 짧게 찼다.

여자는 제가 미인계의 증거란 진실을 그의 수작질로 치부했다. 알이 단번에 깨지며 그 안의 새가 다치진 않았을까 걱정했더니 알이 깨지긴커녕 여자는 그 두꺼운 막에 석고를 한 겹 더 발랐다.

이것 봐.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됐잖아.

허탈할 지경이었다.

“일어나 봐. 줄 게 있으니까.”

“필요 없어. 사탕이면 네 뒷구멍에나 쑤셔 넣고 캔디 애플이면 네 입에나 처넣어.”

레온은 천박한 대꾸에 말문을 잃었다. 온종일 시달린 탓에 수숫대처럼 가느다래진 인내심이 꺾일 듯 말 듯 위태롭게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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