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네가 혐오하는 왕정의 돼지의 새끼를 배야 하니까.”
“…뭐?”
저 말, 내가 아는 그 의미가 맞는 걸까.
남자의 의도를 차마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해진 그레이스의 안으로 손가락이 두 개나 들어왔다. 깊숙이 박힌 손끝이 무언가를 찾아 더듬다 천천히 물러나는 순간에야 윈스턴이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자궁구를 덮은 마개가 벗겨지는 느낌이 생생했던 것이다.
“안 돼. 그만해!”
다리 사이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쥐었지만 페서리를 빼내는 손가락을 막을 순 없었다.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했으나 놈은 그레이스를 끌어안은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이윽고 안에 묻혀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애액으로 미끌미끌하게 젖은 손가락의 끝에는 반으로 접힌 마개가 들려 있었다.
다시 넣어야 해.
그레이스가 잽싸게 손을 놀려 빼앗으려는 순간 남자가 마개를 침대 옆으로 던졌다. 퉁, 둔탁한 소리를 울리며 페서리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사색이 되어 피임 기구를 되찾으러 가려는 그레이스의 손목을 남자가 낚아챘다.
“거지도 아니고 더럽게 주워서 쑤셔 넣을 생각 마.”
“이거 놔.”
“왜? 넣기 끔찍하게 싫다며?”
남자는 잔악한 장난질이 끝나자마자 또 저지르려 했다. 대체 오늘은 어디까지 망가뜨리려야 속이 시원한 걸까. 오늘 종일 당하기만 한 건 나인데 왜 내가 보복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레이스는 머리끝까지 난 화를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네 아이를 갖는 것보단 나아.”
“이런, 언젠가 태어날 우리 아이에게 엄마가 너를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말을 전해 주면 슬퍼하겠는걸.”
윈스턴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손바닥이 실크와 레이스로 가려진 아랫배를 이미 아이라도 들어선 양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말조심해.”
놈이 귓불을 살짝 깨물며 경고하자 그레이스는 멈췄던 숨을 깊이 들이켰다.
이건 협박일 것이다. 조금 전 죽이겠다고 한 것처럼 이번엔 임신시키겠다는 협박으로 겁을 주려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했다.
“아빠가 장난삼아 만든 아이라는 말도 애가 정말 기뻐하겠어.”
“장난이라니. 난 어느 때보다 진지해.”
윈스턴이 그레이스를 침대에 억지로 눕히더니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올라타며 미소 지었다.
“사랑을 나누자며? 시도는 한번 해 볼 테니까 부디 협조해 줘. 우리 아이에겐 사랑으로 만들었다고 전하고 싶거든.”
미친 새끼.
진심처럼 느껴져 뼛속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놈이 그녀의 무릎을 위로 접어 올리는 순간 그레이스는 재빠르게 발을 찼다. 하이힐의 날카로운 굽이 놈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빗맞았으나 남자의 허를 찌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피하는 찰나 그레이스는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벗어나 몸을 돌렸다.
“어디 가, 자기야?”
침대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자마자 발목을 덥석 잡혔다. 네발짐승처럼 엎드려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몸부림을 치다 벗겨진 베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물로 준 걸 흉기로 쓰다니. 못됐어.”
남자는 그레이스의 발에서 하이힐을 한 짝씩 느긋하게 벗겨 던졌다. 그레이스는 발목을 당기며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이거 놔! 아악!”
“분부대로.”
윈스턴이 발목을 불시에 놓아 버리자 그레이스는 제힘을 못 이겨 침대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손쓸 틈도 없이 머리부터 추락했다. 잽싸게 몸을 웅크리고 손을 뻗었으나 바닥에 이마 한 귀퉁이를 쿵 박아 버렸다.
“아, 흑….”
머리가 지끈거렸다. 침대 아래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질끈 감았던 눈을 억지로 떴다. 핑핑 도는 시야 속에서 희고 커다란 손이 그레이스에게로 뻗어 왔다. 피할 틈이 없었다.
윈스턴은 그레이스를 단숨에 주워 들어 침대에 내팽개쳤다.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았다.
그는 숨을 할딱이는 그녀의 얼굴을 깨지기 쉬운 달걀이라도 쥐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졌다. 그레이스를 꽤 오래도록 살피던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쁜 얼굴 다칠 뻔했네.”
제가 다치게 할 뻔했다는 죄책감 따위는 없는 목소리였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그럼 말로 할 때 듣지 그랬어?”
대화는 이미 시도했다.
“이봐, 윈스턴 대위. 썩은 내 나는 수작질은 집어치워. 왕정의 발정 난 돼지답게 얼른 싸고 꺼지기나 해.”
그리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대화를 시도한 게 멍청했지.
후회하는 그에게 동물적인 본능이 이성의 목소리를 가장해 간사하게 속삭였다.
목줄. 더 굵은 목줄을 채워.
고민의 시간은 길었으나 결단의 순간은 짧았다.
그래, 네게 돌이킬 수 없는 목줄을 채워야겠어.
“너도 후회할 거야. 이러지 말고 정신 차리란 말이야!”
“가만히 있어. 다시 묶이고 싶어?”
“그만!”
비명과 고성이 오가는 몸싸움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거듭해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묻혔다.
창밖에서 점멸하는 불꽃의 빛을 따라 남자의 눈동자가 물들었다. 붉게, 푸르게, 노랗게. 그 어떤 빛이든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마의 눈으로 보였다.
“하윽!”
“하아…. 그래, 넌 이걸 꽂아 줘야 얌전해지지.”
흰 베일과 하이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위로 찢어진 레이스 속옷이 툭 떨어지자마자 침대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침대 가장자리에 흩어져 있던 진주 구슬이 바닥으로 하나씩 굴러떨어졌다.
윈스턴이 허리를 개처럼 튕기며 목에 걸려 있던 검은 넥타이를 당겼다. 그레이스는 제 두 손목을 모아 넥타이로 결박하는 남자에게 눈물을 섞어 가며 호소했다.
“아흣, 제발, 흑, 안에는 하지, 말아 줘.”
“벌써 싸 달라고, 읏, 쥐어짜는군.”
여자는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얌전히 그의 물건을 받아먹었다. 작전을 바꿨는지 안에는 사정하지 말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읊어 댔지만 레온은 듣지 않았다.
흰 드레스 한 장만을 걸친 채 암고양이처럼 신음하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벌써 사정감이 치밀어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드레스의 한쪽 어깨는 완전히 벗겨진 탓에 가슴 한쪽이 드러나 있었다.
야만스러운 교미에 걸맞은 야만스러운 꼴이었다. 덕분에 잠재워 뒀던 원시적인 욕구가 완전히 눈을 떴다.
너는 내 아이를 가져.
나는 그렇게 너를 가질 테니.
“제발, 하읏, 안에는 하지 마.”
매끄러운 성기 끝이 자궁구에 직접 닿을 때마다 그레이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붙들린 하체를 비틀었다. 저항할수록 허리 짓이 더욱 거칠어지며 음낭이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엉덩이를 세차게 난타했다.
“여기도 총알이 빈 게 아니라면 난 정말 임신하게 될 거야. 장난은 이쯤에서 관두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이를 악물고 이성에 호소했지만 남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장난 아니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정말 아이를 갖게 할 작정이야?”
“그래.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멍해진 그레이스를 윈스턴이 사납게 치받았다.
“너는 내가 우습지?”
“하윽!”
“널 길들일 방법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잖아. 그걸 믿고 건방지게 입을 놀리고 주먹을 휘두르는 거지.”
그럴수록 너를 더 모욕하고 싶고 바닥으로 더욱 끌어내리고 싶어. 바닥을 기며 내게 완벽히 복종하도록.
하지만 그러려 할수록 그 꼴이 나는 건 자신이라는 불쾌한 깨달음만 얻었다.
여자를 더럽다고 하면 제가 더럽게 느껴졌다. 바보 취급하면 제가 바보가 되었으며 여자를 개처럼 다루다 돌아서 보면 정작 개처럼 길든 건 저였다.
그렇다고 여자와 대등한 관계를 쌓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조금만 틈을 보여도 기어오르는 여자였다. 그리고 조금만 제 틈을 벌리려 해도 방어의 벽을 겹겹이 세우며 그를 밀쳐 내는 여자이기도 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관계를 이제 와서 고칠 방법은 버리는 것 외엔 없었다. 그리고 레온은 미련하게도 이 빌어먹을 여자를 버리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들을 거야? 채찍도 당근도 다 써 봤어. 죽인다고 협박해도 넌 비웃지. 네겐 아무것도 안 통해.”
성공의 가도만 달리는 삶을 살아온 그에게 이토록 지독한 좌절감을 느끼게 한 건 이 여자가 처음이었다.
“넌 최악의 수단까지 시도해 보고 싶게 만들어.”
어차피 빛 따위 들지 않는 무저갱 속에 처박힌 관계였다. 망가뜨려서라도 손에 쥐고 싶을 뿐이었다.
“자, 잘못했어. 이제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번 한 번만, 끅, 봐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그가 화를 주체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고 아직도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반대거든.
레온은 애처롭게 우는 여자를 품에 안으며 다짐했다.
“그런 네 거짓말에 이젠 속아 넘어가지 않아.”
“거짓이, 흑, 아니….”
“난 네게서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
너는 내 아이를 가져.
나는 이제 그런 식으로 너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
“약혼 축하 파티잖아, 자기야. 선물로 아이를 주는 거야.”
그리고 내게 네 약혼자의 목을 바쳐.
그의 깊은 속내를 꿈에도 모르는 여자가 울먹이며 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