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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18화 (118/240)

118화

붉게 부은 점막은 미끌미끌한 애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아래쪽의 가운데에 꽂힌 성기는 각도 탓에 당장이라도 튕겨 나갈 듯 휘어져 있었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켤 때마다 성기 또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불끈대며 질구를 벌렸다.

진득하게 뭉친 유백색의 액체가 그 틈에서 빠져나와 구릿빛 기둥을 천천히 타고 흘렀다.

그 야만적인 꼴을 견디지 못해 신음하는 그레이스의 귓가에 윈스턴이 속삭였다.

“이게 네 자궁 속으로 흘러들어 가서 네 것과 만나 우리 아이를 이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지 않아?”

흥분이 잔뜩 어린 목소리였다.

“상상해 봐. 나를 닮은 아이가 너를 엄마라고 부르는 거야.”

그레이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싫어? 너 내 얼굴만큼은 좋아하잖아.”

음부로 향하던 거울이 위로 들리더니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야만적인 짓을 일삼으면서도 고상해 보이기만 하는 낯짝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네 새끼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전에 네 눈앞에서 죽여 버릴 테니까.”

“네 모친은 너를 살려 뒀는데, 너무하는군.”

그녀의 잔혹한 말에 남자는 더욱더 잔혹한 말로 응수했다.

“아악! 닥쳐, 제발!”

결국 그레이스는 마음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쉿, 괜찮아.”

윈스턴은 그런 그녀가 아기라도 되는 양 어르더니 거울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너와 나를 닮은 아이라니. 기대돼.”

거울 속에서 남자가 벅찬 미소를 짓는 순간 그레이스는 몸서리쳤다. 아이를 기대하는 아버지의 미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궁금하지 않아, 자기야?”

가공할 실험으로 신이 진노할 피조물을 창조하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미소를 닮았을 뿐.

“불과 얼음을 섞으면 뭐가 될까.”

***

달칵.

문이 닫혔다.

축하합니다.

의사와 함께 사라진 말이 침실을 이명처럼 맴돌았다. 누군가에게는 폭탄이 터지며 남긴 반향이었으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교회의 종소리가 남긴 울림이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레온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굴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복자는 그였으니.

레온은 여자의 아랫배에 얼굴을 묻었다. 가볍게 다문 입술 사이로 억누르지 못한 웃음이 거듭 터져 나왔다.

이곳에 그의 아이가 있다.

이 여자에게 영영 벗지 못할 목줄을 채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블랜차드 ‘왕조’의 다음 후계자가 탄생할 성소에 왕정의 돼지인 그의 씨가 뿌리내렸다.

고작 성소로 향하는 길만을 범하고 그것도 정복이라며 으스댔던 게 우스워졌다. 제게 허락되지 않은 곳을 억지로 열고 들어간 희열은 압도적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레온은 제임스 블랜차드 주니어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제 여자가 그의 아이를 배었다는 걸 알면 어떤 얼굴을 할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아니지.

처음부터 이 여잔 그의 것이었다. 그 더러운 쥐새끼가 제 분수를 모르고 잠시 채어 간 것일 뿐. 그 빌어먹을 광신도 집단이 그의 여자를 세뇌시켜 빼앗아 갔던 것뿐이다.

숨을 크게 들이켠 레온은 내쉬는 숨에 희열을 토해 내며 선언했다.

“넌 내 거야.”

수도 없이 했던 말. 하지만 단 한 번도 온전한 진실이 되지 못했던 말. 이제는 불변의 진실이 되리라 그는 굳게 믿었다.

“영원히.”

여자의 아랫배에 파묻은 그의 얼굴로 미지근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를 든 그는 눈물에 젖은 창백한 얼굴을 마주했다.

왜 울어? 언젠가 그 자식과 하려던 짓 아니었어? 나랑 하자는데 뭐가 문제야. 나를 좋아했었다며. 좋아하던 남자의 아이를 가졌으니 웃어.

그러나 레온의 입에선 조롱 대신 웃음만 발작적으로 새어 나왔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 그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꺼풀 사이로 넘쳐흐르는 순간 레온은 여자의 얼굴을 덥석 쥐어 당겼다. 극한의 감정이 밴 눈물은 피만큼이나 달았다.

뺨을 타고 끝없이 흐르는 눈물을 핥아 올리는 그를 여자가 밀쳐 냈다.

짝.

남자는 뺨을 맞고도 웃었다. 머저리처럼.

도리어 고개를 틀어 반대쪽 뺨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

짝.

아무리 때려도 남자는 웃기만 했다. 손이 아프도록 때려도 그레이스는 웃을 수 없었다.

그를 아프게 해 봐야 그녀의 몸속에 뿌리내린 재앙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으니.

결국 그레이스는 남자를 때리던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레온은 얼얼한 뺨을 여자의 아랫배에 묻으며 제게 물었다.

이것은 사랑의 결실일까, 증오의 결실일까.

뭐든.

모든 것을 손익으로 계산하는 그에겐 그 본질이 무엇이든 결실은 바람직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같은 박자로 들썩였다. 양극단에 선 감정에서 터져 나온 음은 불협화음만을 이룰 뿐이었다.

***

오늘 꼭 마무리하겠다던 논문은 오후 내내 한 자도 쓰이지 못했다.

“로지가 먼저 끊어요.”

책상 앞에 앉은 저자가 오후 내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끊는 거예요.”

제롬은 손에 쥔 촛대형 송화기의 기둥을 연인이라도 되는 양 손끝으로 매만지며 머뭇거리다 물었다.

“로지가 셀래요?”

상대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고, 잠자코 듣고만 있던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안 끊었어요?”

그러는 그는 왜 끊지 않았냐는 상대의 물음에 재치 있는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문밖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용인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게다가 복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는데도 그의 연구실로 다가오는 자는 자로 잰 듯한 발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미안. 형이 찾아온 것 같아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

두 사람의 관계를 알더라도 형이 배신감 따위를 느낄 리 없다. 그렇지만 저 비열한 자식은 그걸 제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들 것이다. 위험한 일이었다.

설마 벌써 눈치챈 건 아니겠지?

다급히 전화를 끊자마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연구실을 울렸다.

“어쩐 일이야? 살아 있었다니 놀랍군.”

제롬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온에게 비아냥댔다. 근래 은둔자처럼 별채에 틀어박혀 얼굴을 잘 내비치지 않는 인간이 어쩐 일인지 지하에 있는 그의 연구실까지 행차했다.

“살아 있었다니. 누가 할 소릴.”

레온이 코웃음 쳤다. 느긋한 걸음으로도 그는 단숨에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낙엽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는군.”

그는 제롬더러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들어 간다고 빈정댔다. 정작 가장 시들어 보이는 건 자신인 걸 모르는 건지.

제롬은 책상 너머에 선 형을 올려다보았다. 남다른 체구와 장교복 탓에 위압감은 여전하다만 굉장히 지쳐 보였다.

지치다니.

레온 윈스턴에게 쓰면 오답으로 처리될 단어다.

하지만 조금은 야윈 얼굴이며 퀭한 눈 등, 증거로 뒷받침된 엄연한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한 달 전만 해도 작위라도 받은 사람처럼 즐거워 보이더니 삽시간에 수척해졌다.

몸에 밴 학자의 습관대로 유심히 관찰하는데 형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묶음을 그의 책상 한가운데에 던지듯 놓았다.

“이건 뭐야.”

“공붓벌레를 위해 새로운 공부 거리를 내가 친히 가져왔지.”

제롬은 눈썹을 구기며 서류를 넘겨보았다. 이사분기 재무제표와 해외 투자 수익 보고서 따위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 그의 눈썹이 더욱 구겨졌다. 서류는 전부 가문의 재무 정보를 담고 있었다.

“공부 좋아하시는군. 제 일거리를 떠넘기려는 주제에.”

“내 일거리라니. 이름 뒤에 윈스턴이란 성을 달고 그런 소릴 하면 뻔뻔스럽지.”

“뻔뻔스러우니 윈스턴이겠지.”

형은 그의 빈정거림에 대꾸하지 않고 귀찮다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길 때까지 물고 늘어지던 한 달 전의 그 레온 윈스턴이 아니었다.

“글쎄, 내가 결혼하면서 독립하면 이 가문의 재산은 거의 네 거 아닌가? 그게 차남의 운명이니까.”

제롬이 덧붙인 말에 레온은 코웃음만으로 대꾸했다.

대공녀를 두고 잘도 결혼 같은 걸 하겠군.

게다가 저 자식은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려야 팔 수 없을 것이다. 저 꽉 막히고 지루한 책벌레를 남자로 봐줄 여자라곤 그 꽉 막히고 지루한 여자밖에 없을 테니.

“제롬 윈스턴, 언제까지 가문의 돈으로 염치없이 유희나 즐길 생각이야?”

연구와 언론사 경영을 유희라고 폄하하자 자존심이 상하는지 제롬의 낯빛이 사나워졌다.

“억울해? 그럼 돈이 되는 일을 하도록.”

언론사는 그 특성상 다른 투자나 사업에 비해 수익이 현저히 낮은 것까지 꼬집자 동생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걸 못 할 거면 적어도 가문에 도움이 될 일을 하든가.”

“난 언제나 가문에 도움이 될 일만을 해.”

쉬운 녀석. 그의 도발에 넘어오지 않는 적이 없었다.

레온은 조소를 속으로 삼키며 이 지하까지 찾아온 두 번째 목적을 마침내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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