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빌어봐-119화 (119/240)

119화

“그래? 그럼 심층 분석 기사 하나 정도는 일도 아니겠군.”

제롬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수첩을 펼쳤다.

“불러.”

“싱클레어가의 갑작스러운 몰락 덕분에 브리아 다이아몬드광 채굴권의 유력 낙찰 후보로 떠오른 앨드리치 대공가와 채프먼 남작가.”

제 연인이 속한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제롬이 펜을 놀리다 말고 멈칫했다. 대공녀에게 불리한 일일까 싶어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며 티를 낼 순 없어 고민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대공가와 남작가에게 우호적으로 내면 돼.”

그제야 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군 활동이라는 추악한 범죄에 가담한 싱클레어가와 극명히 대비되게. 다만 주관적인 찬양은 지양하고 철저히 객관적으로 보이도록. 그 적당한 선, 알고 있으리라 믿어.”

제롬이 고개를 들더니 왜 이런 어려운 일을 시키냐고 눈으로 물었다. 레온은 입매를 비틀며 또 한 번 동생의 자존심을 긁었다.

“모르면 편집장 자격이 없지.”

역시나. 제롬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그의 요구를 얌전히 받아 적었다.

“경제지?”

“그리고 종합지.”

제롬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종합지?”

매일 발행되는 윈스포드 헤럴드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판매 부수가 가장 많기는 하다만, 경제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도 읽는 종합 신문에 채굴권 입찰을 다룬 심층 분석 기사를 내라니.

“왜?”

그럼 나중에 벌어질 언론전이 쉬워질 테니. 이건 상대의 진영에 지뢰를 은밀히 심어 두는 전술이었다.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내가 언제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을 시키는 거 봤어?”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이기적이기 짝이 없지만, 가문에 해가 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레온은 윈스턴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이었으니.

충동이 앞선 결정이었으나 막상 결심한 후 그는 기다렸던 사람처럼 정해진 절차를 거침없이 밟아 나갔다.

의사는 길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했지만 그 여자는 고작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졌다. 그 또한 레온에게 확신을 더욱 실어 주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그의 계획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간다. 하지만 기대만큼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 그 여자라는 변수가 있었으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기자에게 전달할 메모를 마저 휘갈긴 제롬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너야말로 시들어 보여. 잠을 설친 사람처럼.”

이런 소리, 요즘 레온은 캠벨부터 험프리 중령까지 매일같이 보는 이들에게서 지겨울 정도로 듣고 있었다.

“아, 이젠 의사 노릇도 하려는 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네가 내 걱정을? 내가 죽으면 가문은 네 차지일 텐데.”

물론, 약혼녀도.

제롬은 질린다는 표정을 짓더니 재무 자료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넘긴 보고서의 겉장에는 ‘신대륙 투자 수익 보고서’라는 제목이 크게 쓰여 있었다.

“컬럼비아 합중국 쪽은 최근 들어 유독 손해가 심각하군.”

제롬이 트집을 잡으며 혀를 쯧쯧 찼다.

“투자 초기라 수익이 나지 않을 뿐이야. 난 너와는 달리 근시안적이지 않거든.”

그 막대한 손해를 안겨 준 투자처는 실은 레온이 신대륙에 가명으로 세운 유령 회사였다. 달리 말해 그는 돈세탁을 벌이는 중이었지만 그간 가문의 재정에 관심이 전혀 없었던 제롬은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컬럼비아 쪽은 잊고 둬.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래서 과연 너를 믿고 가문의 재산을 맡길 수 있겠냐는 둥, 제 감독이 필요하겠다며 재무 자료를 진지하게 살펴보기 시작하는 동생에게 레온은 조소를 보냈다.

멍청이. 네 좋을 대로 생각해.

“기사나 잊지 말고 내.”

연구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레온은 본관을 떠나 별채로 향했다.

자갈이 곱게 깔린 길을 걷는 사이 푸른 잔디 위에 흩어진 낙엽을 갈퀴로 긁어모으던 정원사들이 모자챙을 들어 올리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레온은 턱짓으로만 인사를 받아 주었을 뿐,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별채 안으로 들어와 향한 곳은 지하가 아닌 3층이었다. 아이를 가진 후 그의 침실로 여자의 거처를 옮겨 주었다.

그 여자가 그토록 원하던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물론 탈출할 수 없게 창살을 설치해 두는 건 잊지 않았다.

흉물스럽긴 해도 창밖의 경치를 즐기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창가에 앉아 가을 풍경을 만끽하는 모습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우욱….”

침실 문을 열자마자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장 욕실로 들어간 레온은 한 시간 전과 다를 바 없는 광경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변기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한 채 거듭 구역질을 했다. 여자의 뒤에 엉거주춤 서서 다갈색 머리칼을 한데 모아 쥐고 있던 하녀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안절부절못했다.

똑같은 꼴이던 여자를 씻기고 겨우 재워 둔 지 고작 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아, 욱….”

여자는 숨을 들이켜나 싶더니 또 토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을 텐데 발작적인 구토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흑….”

레온이 욕실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여자가 러그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는 하녀에게서 여자를 받아 안았다.

창백한 눈꺼풀로 반쯤 가려진 청록 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얼굴은 눈물과 위액으로 젖어 엉망이었다. 눈 뜨고 보기 힘든 이 광경을 그는 지난 한 달, 하루에도 몇 번씩 지켜보아야 했다.

“따뜻한 물수건.”

레온이 익숙한 지시를 내리자 하녀가 말없이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윈스턴….”

젖은 잠옷의 단추를 풀던 그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핏기 없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으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귀를 가까이 대어 주자 여자가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게 네 새로운 고문 기술이야?”

“…….”

“축하해.”

레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새 잠옷으로 갈아입혀 침대에 앉혔다. 따뜻한 민트 차에 설탕을 잔뜩 타서 주었더니 여자는 몇 모금 넘기긴 했다. 하지만 비스킷은 입에 넣지도 못했다.

이젠 이 일에 이골이 난 하녀가 능숙하게 여자의 시중을 드는 사이, 레온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같은 생각에 시달렸다.

너무 가볍다.

조금 전 안아 올린 여자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시체처럼 힘을 빼고 늘어지면 신체는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자는 가볍기만 했다.

이런 생각, 한 달째였다. 그리고 여자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야위어져 갔다.

임신을 확인한 날부터 여자가 단식 투쟁을 시작한 탓만은 아니었다. 그건 일주일도 가지 못했으니.

여자가 입덧을 시작한 첫 며칠은 매일같이 의사를 호출했다. 하지만 의사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면 다 이런 건가?”

그의 물음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유독 입덧이 심한 임신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필 이 여자가 그런 경우일 줄이야.

“그래도 초기가 지나면 입덧은 자연히 사라지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배 속의 아이는 건강하다는 뜻이라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랍니다.”

과연 그럴까.

아이는 건강하나 엄마는 죽어 간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으니 기꺼울 리 없었다.

의사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 한 권을 그에게 주고 갔다. 그 두꺼운 책은 몇 주째 침대 옆의 협탁에 방치되어 있었다.

저런 것에 관심을 둘 사람으로 보였던 걸까. 책을 읽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도 우스웠다.

“추워.”

여자가 침대에 누우며 몸을 웅크렸다. 레온은 두꺼운 담요를 덮어 주며 곁에 선 하녀에게 눈짓을 했다.

그의 지시를 알아들은 하녀가 환기 때문에 열어 둔 창을 모두 닫고 돌아왔다. 하녀가 또 침대 옆에 멀뚱히 서서 지시를 기다리기에 레온은 이번엔 문으로 눈짓을 했다.

“나가 봐.”

중년의 여인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하녀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 여자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지자 레온은 얼마 전 하녀장을 통해 말을 하지도, 글을 읽고 쓰지도 못하는 하녀를 구했다.

그와 동시에 별채에서 군 병력은 모두 제거했다. 이제 이곳의 경비는 사설 경비원들이 맡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주목적은 이 여자의 탈출을 막는 것이라기보단 저택 내외부의 침입을 막는 게 되었다. 이 여잔 이제 도망칠 힘이 없으니.

레온은 죽은 듯 눈을 감은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을 뻗었다. 배를 만져도 거부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젠 거부할 기력조차 없거나.

이 속에 든 아이, 가장 효과적인 족쇄가 맞긴 한 건가. 이젠 목줄도 족쇄도 채우지 않건만 여자는 그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이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는 여태 어떠한 수를 써도 성공하지 못한 걸 아이는 이토록 쉽게 해냈다.

배 속에서부터 제 어미를 고문하다니. 그의 아이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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