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빌어봐-125화 (125/240)

125화

“좋아하는 만큼 미워할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닐 바에야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게 낫지.”

동요를 숨기고자 얄밉게 군 게 통했는지 남자는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배 속에서 또 불쾌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금 막 움직였어. 너도 느껴 봐.”

그레이스는 남자의 손을 당겨 태동이 느껴지는 곳에 얹었다.

“흠… 신기하네.”

“느껴져?”

“아니.”

“그럼 뭐가 신기….”

“난 네가 아기 때문에 오늘 종일 우울한 줄 알았거든.”

그레이스는 잠시 숨을 멈췄다. 우울하지 않은 척, 종일 평소처럼 굴었는데. 예리한 남자는 그녀의 기분은 물론, 기분이 저조했던 이유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곧바로 인정하는 길을 택했다. 이미 다 알고 꺼낸 말을 부인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

“난 이번 한 해를 너라는 여자를 분석하는 데 바친 사람이니까.”

섬찟할 수도 있는 말을 애써 농담처럼 여기며 웃었다. 여유를 부린 게 통했는지 남자가 입술을 겹쳐 왔다. 그레이스는 기꺼이 키스를 주고받는 것도 모자라 혀로 짓궂은 장난까지 치며 그를 속이려 했다.

그러곤 남자의 목덜미에 어리광을 부리는 연인처럼 뺨을 문지르며 푸념했다.

“그냥… 이제 아이가 느껴지니까 실감이 나서 울적해. 어떻게 키워야 하나 막막하잖아.”

솔직한 감상에 거짓된 이유를 섞었다. 남자가 깊이 파고들기 전에 그에게로 초점을 돌려 버리기까지 했다.

“넌 막막하지도 않아?”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레이스는 뺨에 길고 긴 키스를 받으며 불과 두어 달 전을 떠올렸다.

“난 내가 저지른 일의 책임은 확실하게 지는 사람이야. 무턱대고 저질러 놓고 도망치는 너와는 달리.”

똑같은 화제를 처음 꺼냈던 날, 남자는 날카롭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순간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다정했다. 애빙턴 비치의 소년에 견줘도 될 정도였다.

넌 잘하고 있어.

고개를 든 그레이스는 파르페를 한 스푼 떠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걸 받아먹곤 수면 위로 드러난 그레이스의 어깨에 점점이 키스를 새겼다.

물 밖으로 나와 있던 왼손이 그레이스의 어깨부터 욕조 가장자리에 걸쳐 둔 팔꿈치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는 물기로 젖은 손을 트레이에 반듯하게 개어 둔 수건에 닦더니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으응….”

그레이스는 몸을 비틀며 윈스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남자, 수면 위에선 고상하기 그지없는데 수면 아래에선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구름처럼 두꺼운 거품이 크게 넘실거렸다. 남자가 두 다리를 그레이스에게 얽어 다리를 벌리게 한 탓이었다. 배를 점잖게 쓰다듬던 오른손은 아래로 향할수록 음란해졌다.

그는 그간 억눌렀던 성욕을 요즘 들어 조금씩,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온 윈스턴은 침대 밖만이 아니라 침대 안에서도 달라졌다.

부드러운 손길 아래에서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황홀감에 취해 있는데 남자가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흣, 으응?”

“그날 왜 내 욕조를 쓰고 있었지?”

남자가 그날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 욕실에서 있었던 일이 유성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미인계였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넌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을 자주 해. 어려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여자야.”

남자가 잠시 멈칫하다 말을 끝맺었다. 원래는 그녀를 무어라 부르려 했던 걸까.

“내가 쉽지 않은 건 잘 알지.”

얄밉게 굴자마자 다리 사이를 파고든 남자의 손이 한층 짓궂어졌다. 그레이스는 잠시 숨을 헐떡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문제에선 가장 단순한 답이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거든.”

“그래서, 정답은?”

그레이스가 말을 빙빙 돌리자 남자가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말투로 재촉했다.

“하녀 방 욕실에선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는 거 알아? 난 그저 얼음장 같은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고작 그런 이유라니 기가 막히는군.”

“그날은 네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단 말이야.”

“허술하기 짝이 없어. 하긴 그토록 허술하니 결국 이렇게 잡혔지.”

“발각된 건, 아흣, 내 실수가 아니었잖아.”

“아, 그렇지. 프레드인지 뭔지 그 얼간이를 너와 함께 내 밑으로 넣은 게 누구였더라?”

또 수작질.

“하아, 너 지금 내가 지미를 떠올리며 가 버리길 바라는 거야?”

툭하면 그녀에게 지미에 대한 나쁜 생각을 심으려는 남자가 이제야 입을 다물었다. 물 밖으로 나와 있던 손이 그레이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려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점점 몽롱해지는 시야 속에서 남자가 그녀를 집요하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를 열락으로 몰아넣는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라는 뜻이었다. 그레이스가 한 말이 뇌리에서 떨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분 좋은 웃음을 가장해 남자를 비웃던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흣!”

몸을 저도 모르게 들썩이는 순간 넘실대는 거품 위로 분홍빛 젖꼭지가 세차게 튕겨 올랐다. 도톰한 모양이어야 하는 살점이 납작하게 눌려 있는 건 남자의 손가락 탓이었다.

비틀고 누르고 굴리고 간지럽히고. 그는 요즘 들어 더욱 예민해진 곳을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하윽!”

물속에선 다른 손이 같은 움직임으로 음핵을 자극했다. 욕조에 든 물이 출렁이다 못해 바깥으로 넘치기 시작하고, 복숭앗빛으로 물든 무릎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며 오므라들자마자 활짝 벌어지더니 물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파르페 잔을 쥔 왼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레이스는 오른손으로 물속에 처박힌 굵은 팔뚝을 붙잡았다.

“으응, 의사가, 격한 운동은 삼가라고 한 거, 아흑, 못, 들었어?”

“이 정도쯤은 네게 아무것도 아닌 거 잘 알아.”

붙들린 팔이 쉴 새 없이 손안에서 불끈거렸다. 절정의 경계까지 내몰려 숨을 할딱이는 그레이스의 귓가에 남자가 속삭였다.

“그날 넌 이 파르페 위의 체리보다도 탐스러웠어. 물론 지금도, 내겐 너만큼 군침이 도는 존재도 없어.”

귓불이 거칠게 빨리는 순간 그레이스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여길 얼마나 빨고 싶었는지 알아?”

그가 빨고 싶었던 것이 귓불 따위는 아니라는 걸 똑똑히 보여 주듯, 수면 아래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크게 굴렸다.

“난 샐리 브리스톨을 마주칠 때마다 상상했어. 저 단정한 하녀복 속에 숨은 이곳은 얼마나 부드럽고 도톰할까.”

그레이스는 문득 하녀였던 시절 그가 시가 끝을 잘근잘근 깨물 때 가슴 끝이 따끔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더러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는 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 욕조에 알몸으로 앉은 샐리 브리스톨이라니. 성탄절 선물을 일찍 받은 기분이었지.”

“으응….”

“그날 당장 꺼내서 이렇게 가지고 놀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는 집요하게 애무하던 가슴을 갑자기 놓더니 부푼 배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걸 잘 참고 묵혔더니 내 성탄절 선물이 이렇게 새끼를 칠 줄이야.”

남자의 얼굴에 질 나쁜 미소가 새겨졌다. 그레이스는 저 비열한 낯짝에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걸 온 힘을 다해 참았다.

그래, 지금은 이 빈 껍데기뿐인 정복감을 마음껏 만끽해. 언젠가 혼자 버려진 채 이날을 떠올리며 울게 만들어 줄 테니.

“아흣!”

“그날, 네 몸속은 얼마나 뜨거울지 궁금했어.”

바깥을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끝내 안으로 들어왔다.

“네 속이 이 물속보다 뜨거워.”

그녀의 등에 맞닿은 가슴팍이 크게 부풀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적나라하게 울렸다.

“넣고 싶어 미치겠군.”

남자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깊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성기는 목욕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레이스의 등허리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이토록 발정 난 몸으로 책을 읽는 여유를 부린 것이 신기했을 정도였다.

그레이스가 안을 쑤석이는 그의 손짓을 따라 몸을 들썩이면서 두 몸뚱이 사이에 낀 성기가 거칠게 치대어졌다. 그럴 때마다 뺨으로 쏟아지는 숨도, 등을 스치는 살덩이도 너무도 뜨거워 몸이 익어 가는 것만 같았다.

“…넣어 줘.”

할딱거리는 숨소리를 섞어 속삭이는 찰나, 남자가 또 한 번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을 냈다.

“그땐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더니, 지금은 넣어 달라고 애걸하는군.”

널 착각에 빠지게 하는 덴, 자진해서 몸을 섞는 것만큼 좋은 수도 없거든.

“자기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응?”

“네가 날 이렇게, 흣, 만들었잖아.”

네가 날 이토록 지독한 인간으로 만들었어.

“으응… 제발….”

애걸하는 그레이스의 귓가에 남자가 흥분 어린 목소리로 거듭 속삭였다.

잘 봐. 넌 날 원해. 넌 내가 없으면 안 돼. 네겐 나뿐이야. 잊지 마.

이따위의 말들을. 그레이스가 도리어 그에게 해야 할 말들을 말이다.

난 널 원하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아니야.

하지만 몸은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남자는 그녀를 절정의 경계까지 밀어붙이고는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 자리에 붙들어 두었다. 한 발짝 성큼 디뎌 모든 걸 잊게 해 줄 천국 속으로 추락하고 싶은 그레이스는 그에게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보내 줘. 대체 어디로 보내 달라는 걸까. 내가 가야 할 곳은 그 거짓된 천국이 아닌 이 지긋지긋한 감옥 너머인데.

“하윽!”

그는 그레이스가 한참을 조르고서야 원하는 것을 주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파르르 경련하는 순간 손에서 파르페 잔이 떨어졌다.

“헉,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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