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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33화 (133/240)

133화

역무원은 숫자 1이 크게 적힌 어느 객실의 문을 열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숙녀 대접을 받으며 좌석에 앉자 역무원이 옆자리에 봉투를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도와 드릴 수 있어 제가 더 기쁜걸요.”

남자가 모자챙을 살짝 들며 인사를 했다.

“행복과 사랑으로 가득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명절 인사가 이토록 공허하게 들린 적이 있었을까. 그녀의 성탄절은 이미 슬픔과 배신으로 얼룩져 있었으니.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는 순간 객실의 문이 닫혔다.

“하….”

곧바로 긴 한숨 소리가 단조롭지만 고급스럽게 꾸며진 6인용 객실을 울렸다.

그레이스는 기차역으로 오는 내내 자꾸만 딱딱하게 뭉치는 느낌이 들던 배를 쓸어내렸다.

‘이 아이도 힘든 건가.’

태동이 잦았다.

그레이스는 구두를 벗었다. 복도 쪽 벽에 등을 기대고 긴 좌석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버렸다. 푹신한 곳에 앉으니 몸은 곧 편안해졌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인파가 바쁘게 오가는 플랫폼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지만 이따금 실패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함께 커 온 사람들이 남보다 매몰차게 변할 수도 있다는 걸 생생히 겪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불현듯 또 한 번 태동이 느껴졌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배를 쓸어내리자 암적색 스웨터의 올에 엉겨 있던 눈물방울이 손을 적셨다.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한숨처럼 들리는 실소였다.

달갑지 않던 이 아이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아이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저들의 진면모를 영원히 몰랐을지도 모르니까.

이 모든 배신의 원흉인 윈스턴을 탓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자가 어떠한 영향을 끼쳤건, 결국 그녀를 버리겠다는 결단은 지미가 내린 것이었다.

직감이 줄곧 속삭였다. 지미가 그녀를 버리려는 이유에는 사적인 감정 이상이 담겨 있다고.

블랜차드 혁명군은 붙잡힌 동지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그 약속을 그레이스는 여태 믿고 위험한 작전에도 겁 없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다른 동지들에게는 지켰던 약속을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어겼다.

“그자는 널 구하러 온 적이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네 약혼자가 네게 자살을 지시했어.”

결국 윈스턴이 한 그 수많은 거짓말 중 두 가지는 진실이었던 셈이다. 나머지도 진실인지 알고 싶어졌다.

정말 그래서,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서 나를 버리는 거야?

평생을 해소되지 않은 의심에 시달리느니, 설령 그 끝에 어떤 지옥이 있더라도 마주할 것이다.

[그렇지만 네가 돌아와서 또다시 이용당하느니….]

이용, 이용이라….

그레이스는 열차표에 적힌 종착점을 내려다보며 결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기나긴 선로의 끝에선 모든 걸 순순히 털어놓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허탈하게 웃는데 창밖을 막 지나친 중년의 여인이 되돌아오더니 객실의 문을 열었다. 매표소에서 그레이스의 바로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었다.

아주머니는 눈인사를 하며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레이스도 알은체를 가볍게 한 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은 창밖을 보는 척하며 여자를 관찰했다. 애플비 부인처럼 푸근해 보이지만 묘하게 독불장군의 기질이 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복장은 나중에 묘사해 보라고 하면 기억나는 게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검소하고 단순했다.

삐익.

기나긴 플랫폼을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가로질렀다. 뒤이어 이 지옥행 특급 열차의 발차가 머지않았으니 어서 승차하라는 차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발 디딜 틈 없던 플랫폼이 순식간에 한산해지며 다른 칸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줄지어 울렸다. 다른 이들에게는 명절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 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레이스에게는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곧 열차가 경적을 길게 늘어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흔드는 역무원들과 회색빛 플랫폼이 천천히 멀어지더니 마천루의 숲이 눈앞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건물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더니 공장 지대를 지나 헐벗은 들판이 이어졌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벗어났지만 윈스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자, 이것도 받아요.”

자신을 메리 베이커라고 소개한 여자가 가방에서 먹을 걸 잔뜩 꺼내더니 그레이스에게 자꾸만 권했다.

“기차 여행은 항상 설레지 않나요?”

그레이스는 베이커 부인이 내미는 초콜릿 상자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저 예의 바른 거짓말일 뿐이었다. 새벽 기차로 애빙턴 비치에서 도망쳤던 그날 이후로 기차 여행이 설렜던 적은 없었다.

베이커 부인은 수다스러웠다. 어느 저택의 하녀로 일하다 고향에 가는 길이라던 부인은 표를 급하게 구하다 보니 일등석밖에 남지 않았다며 익살스럽게 푸념했다.

확실히 일등석 표를 살 형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그레이스도 했었다.

“샐리는 어디로 가는 길이죠?”

부인이 그레이스가 습관적으로 댄 가명을 부르며 물었다.

“가족을 만나러 가요.”

그레이스는 종착지 대신 목적을 댔다.

“남편을 두고 임신부 혼자서 먼 길을 가다니…. 쯧쯧….”

보통은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러나 베이커 부인은 당연히 ‘샐리’의 ‘남편’이 윈스포드에 있을 거라고 가정했다.

그레이스는 여태 멍하니 들고만 있던 초콜릿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격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꽤 비싸 보였다.

상자를 들어 코에 대어 본 그레이스는 웃어 버렸다. 귀퉁이에서 그 남자의 향수 냄새가 어렴풋이 났다.

그녀는 상자를 열어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베이커 부인에게 웃어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는 당연히 필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하녀는 무슨. 군인이겠지.

실은 기차역의 로비에서부터 의심스러웠다. 그레이스가 매표소의 줄 끝에 서자 매점 옆에 서 있다가 다가오는데 보폭이며 걷는 박자가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마치 훈련이 몸에 밴 사람처럼.

게다가 오랜만에 고향에 간다는 사람이 선물도, 커다란 짐 가방도 없이 핸드백만 들고 있다니. 물론 미행에는 최적이겠지만 작전 대상을 속이기엔 너무 허술한 것 아닐까.

‘베이커 부인’은 그레이스의 속내를 모른 채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첫 아이인가요?”

“네, 맞아요.”

“나도 첫 아이를 가졌을 때가 생각나네….”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네요.”

그레이스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굴었다.

“그런데 낳을 때 엄청나게 아프다던데 진짜인가요?”

“어… 아프죠. 아프긴 한데 기쁨이 워낙에 커서….”

거기다 조금은 맹하게 굴기도 했다. 상대가 경계를 늦추도록.

“힘들진 않은가 모르겠네요. 아직 만삭은 아니라고 해도 그 몸으로 멀리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그러게요. 오늘 배가 자꾸 뻐근하게 뭉치는데 걱정이 되네요.”

사실 배는 괜찮아진 지 오래였다.

여자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속옷에 피가 비치지는 않는지, 태동은 느껴지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그런 걸 거예요. 무리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여자의 질문에서도, 조언에서도 전문가의 냄새가 묘하게 풍겼다.

역시나 간호 장교인가. 저 정도의 나이에도 아직 군에 있는 여군은 보통 간호 장교이기에 미끼를 던져 보았는데 여자가 덥석 물었다.

그 남자, 설마 이 열차 어딘가에 있으려나.

문득 든 생각에 그레이스는 좌석에 편하게 누우라는 여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화장실을 좀….”

무작정 복도로 나온 그레이스는 멈칫했다.

마주치면 어쩔 거야.

객차를 끝에서 끝까지 훑고 다니다 정말 윈스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엔 둘 다 곤란해질 것이다.

그 남자는 아직 그녀를 잡을 수 없지만 잡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테고, 그럼 남자의 작전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그레이스는 그럴듯하게 도망쳐 줘야 했다.

“아, 저….”

때마침 차장이 일등석 객차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레이스는 덜컹거리는 기차의 벽을 짚으며 다가가 부탁했다.

“작전 중인 서부 사령부 소속 장교입니다. 당장 레온 윈스턴 대위님께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어느 객실에 계신지 모르겠네요.”

젊은 임신부가 장교라니, 믿지 않을까 싶어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를 썼다.

“그런데 객차를 뒤지며 돌아다니기엔 제가 지금 몸이 좀 불편해서….”

배를 눈짓하자 차장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제가 당장 알아봐 드리죠.”

“아, 잠시만요.”

그레이스는 당장 눈앞의 객실부터 들여다보려는 차장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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