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객실 번호를 잊어버린 걸 알면 대위님께서 질책을 하실 텐데…. 정말 가차 없으신 분이거든요. 제가 찾는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 알아봐 주시면 안 될까요?”
“네, 네. 그러죠.”
화장실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차장이 모든 객차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난처해하는 얼굴을 보자마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눌러야 했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요. 그런 분은 안 계시는군요.”
열차에는 타지 않았구나.
그레이스는 속내를 숨기고 곤란한 척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이런…. 어쩌지….”
“혹시 열차를 잘못 타셨다면….”
“아, 아니에요. 이 열차가 맞는데 대위님께서 놓치셨나 봐요.”
차장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객실로 돌아간 그레이스는 좌석에 무릎을 세우고 누워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그 남자가 서부 사령부에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는데….
어쩌면 다른 수단으로 따라오고 있을지도. ‘베이커 부인’에게서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낸 종착지로 먼저 가 있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지. 그가 종착지를 정확하게 안다면 굳이 거기까지 따라오진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는 곳이니까.
그녀가 언제 어디로 도망치든지 쫓아가기 쉬운 곳에서 기다릴 것이란 예감이 문득 들었다.
일단 풀어 놓고 관망하겠다는 건가.
언젠 몇 발짝 되지 않는 별채 정원에도 못 나가게 하더니. 그녀를 절대로 풀어 주지 않으려던 남자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겠구나 싶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요?”
맞은편에서 잡지를 보던 베이커 부인이 물었다. 그레이스는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뇨, 그냥…. 부인께는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예요.”
예의 바르게 굴었지만 속으론 성가시단 생각뿐이었다.
열차를 바꿔 탈 때도 계속 아는 척을 하며 따라오겠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걸리적거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 여자처럼 밀착 감시를 하는 인원 외에도 그녀를 미행하는 사람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 밤 벌어질 매우 사적이고도 적이 알아서는 안 될 대화를 누가 엿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의 계획까지 이리저리 짚어 보자니 미행하는 자들을 떼어 놓는 건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결국 그레이스는 남자의 작전을 모르는 척하는 걸 이쯤에서 관두기로 했다.
“베이커 부인, 지금 몇 시죠?”
여자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대답했다.
“4시 28분이네요.”
이 열차는 동서남북의 선로가 교차하는 중부의 관문인 체스터필드에 4시 30분에 도착해 4시 35분에 다시 출발한다. 현재까지 연착은 없었다.
혹시 몰라 윈스포드 중앙역에서부터 세워 뒀던 작전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 고작 2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켰다.
“또 화장실을 좀….”
“아이를 가지면 자주 신호가 오게 마련이죠.”
여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똑같이 눈웃음을 지어 준 그레이스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미소를 지웠다.
일단은 화장실이 있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제 차례를 기다리는 척 간이 의자에 앉아 밖으로 난 문만 응시했다.
머지않아 열차는 속도를 줄이더니 체스터필드 역으로 들어섰다. 플랫폼만을 보고 있던 그레이스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반대편 선로에 눈길을 주었다가 좋은 생각을 번뜩 떠올렸다.
‘이게 더 나을지도 몰라.’
옆 선로에는 열차가 서 있었다.
플랫폼보다는 기차가 함정을 눈치채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플랫폼 쪽은 열차에서 열리는 문이 많은 데에다 오가는 게 한눈에 너무 잘 보이는 게 흠이었다.
체스터필드가 시발점인 듯 다른 열차는 드문드문 비어 있었고 동글납작한 모자를 쓴 짐꾼들이 열차에 올라 있었다.
출발까진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열차에 주어진 시간은 5분. 즉, 작전 시간은 단 5분이었다.
열차가 멈춰 서자마자 그레이스는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옆 열차의 닫힌 문 너머로 마침 짐꾼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열어 달라고 손짓을 했더니 남자가 의아한 눈을 하면서도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열차 사이의 간격이 좁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도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레이스는 짐꾼이 친절하게 내미는 손을 잡고 옆 열차로 훌쩍 건너갔다.
복도로 들어가자마자 그레이스는 짐꾼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액수를 본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랫폼에 서 있다가 사람들이 뛰어나와 임신한 여자가 어디로 갔냐고 물으면 저기….”
그녀는 플랫폼 건너편의 우편 열차를 가리켰다.
“저 열차로 뛰어 들어가더라고 말해 주세요.”
“네, 맡겨만 주시죠.”
남자는 씩 웃으며 돈을 낚아채더니 제가 맡은 짐은 뒷전으로 하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그레이스는 곧바로 객차의 복도를 따라 왼쪽으로 걸었다. 화장실, 그리고 객실 세 개만 지나면 그녀의 자리가 있었던 곳과 마주 보게 된다.
‘좋았어.’
계획대로였다. 감시 대상의 동태를 살피느라 마침 객실 문을 열고 나오던 베이커 부인과 창문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 그레이스는 놀란 척 입을 크게 벌리곤 부른 배를 감싸며 허둥지둥 앞으로 걸어갔다.
맹한 척해 둔 게 통했나. 여자는 의심 한번 없이 함정에 발을 들였다.
복도 끝에 숨어 창문 가장자리로 몰래 보았더니 여자는 바로 옆 칸의 문을 두드리며 무어라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젊은 남자 넷이 객실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객차 끝으로 뛰어갔다.
역시나. 그자가 한 명만 붙여 뒀을 리가 없지.
그레이스는 지체 없이 옆 객차로 넘어갔다. 복도를 반쯤 지났을 때 그녀가 조금 전 지나 온 문이 벌컥 열리며 여자가 외쳤다.
“이봐! 거기 서!”
내 이름을 모르나? 보통은 이름을 부르며 추격하기 마련이었다.
그레이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객차 끝으로 향했다. 아무리 비좁은 복도라도 저들은 뛰는데 그레이스는 빠르게 걷기만 할 뿐이니 곧바로 따라잡혔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계략인 걸 저들은 모를 것이다.
놈들이 객차 중간에 다다른 순간 그레이스는 돌아섰다.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번쩍 들었지만 손에 들린 물건은 항복의 상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른손에 들린 권총에 눈길이 닿자 추격자들이 멈칫했다. 그레이스는 다른 손에 든 탄환을 보란 듯 흔들었다.
“이젠 빈총이 아니야.”
천장에 한 발 쏘는 것만큼 확실한 경고도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모든 열차의 운행이 중지될 것이다.
“엎드려, 당장!”
윈스턴이 누구를 붙이든 약점은 똑같다. 그레이스가 죽어선 안 된다는 것.
별채에서 그랬듯이 총구를 제 목 아래에 겨누자 추격자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복도에 순순히 엎드렸다.
그녀는 여전히 제 목에 총을 겨눈 채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스치듯 본 플랫폼의 시계는 3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플랫폼으로 도망치는 척만 하고 몸을 돌려 다음 객차의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문을 닫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역시나 플랫폼으로 뛰쳐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어? 어느 쪽이야?”
당황해 지르는 소리에 이어 누군가가 저기로 갔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레이스는 몸을 최대한 숙인 채 반대편 문으로 향했다.
출발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찰나 그레이스는 이 열차로 뛰어들었을 때처럼 건너편 열차로 돌아왔다.
“하아… 아슬아슬했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객실로 가지 않고 화장실에 숨었다.
“아… 배고프다.”
그것 조금 돌아다녔다고 꼬르륵거리는 윗배를 누르며 잠긴 문 너머의 복도로 귀를 기울였다. 자그마한 창문 밖의 풍경이 회색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뀌도록 복도에서는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 열차에 다시 탄 추격자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그레이스는 텅 빈 객실로 돌아왔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성탄절에 불청객이라니, 안 될 말이지.”
봉투에서 소다수 병을 꺼내어 마개를 따곤 좌석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체스터필드 강의 절경과 홀로 남은 자유를 만끽하며 시원한 소다수를 들이켜던 그레이스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해낸 것만 같은, 짜릿한 쾌감이 일었다.
별다른 자극 없이 갇혀 사느라 몸도 머리도 둔해졌을 줄 알았더니.
“와, 나 여전히 쓸 만하잖아?”
그러나 상쾌한 웃음은 곧 시들었다.
나 아직도 이렇게 쓸 만한데….
***
어둠과 적막에 잠긴 체스터필드 중앙역의 플랫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어느 사무실은 대낮의 기차역을 방불케 했다.
임시 작전 본부가 차려진 이곳에선 십여 명의 군인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