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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35화 (135/240)

135화

“네, 다갈색 머리, 청록색 눈에 연갈색 코트를 입은 임신부를 본 차장이나 역무원이 있는지….”

전국 곳곳의 역에 전화를 걸어 작전 대상이 탄 기차를 수소문하는 중이었지만 몇 시간째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밖에선 중부 사령부에서 동원한 사병들이 기차역과 도시를 밤늦도록 수색 중이었다. 고작 여자 하나를 찾으려고 말이다.

이번 작전에 긴급히 투입된 인원의 대부분은 그 여자의 신원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최근에 체포된 요주의 인물로, 반군에 관한 중요한 기밀을 알고 있다는 점만 들었을 뿐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순간, 귀를 먹먹하게 하던 소음이 뚝 멎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일어서 경례를 올렸지만 그 예의 바른 행동은 지휘관의 심기를 거스르기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설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집 나간 벨라를 찾았나 보군.”

모두의 얼굴이 잿빛이 되자 대위는 싸늘한 태도로 몸을 돌려 회의실로 향했다. 여자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목소리들이 다시 어지럽게 얽히는 가운데, 대위가 캠벨에게 지시를 내렸다.

“맥길 중위를 호출하도록.”

“네.”

캠벨은 대기 중인 이등병에게 지시를 전달하고 어느 책상 앞에 앉은 낯익은 얼굴을 향해 손끝을 까딱였다. 헤일우드부터 윈스포드까지 그 여자의 미행을 담당했던 일병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뛰어왔다.

“낸시 윌킨스는?”

그 여자의 대화를 엿들어 알아낸 반군의 본명을 입에 올렸다. 윌킨스의 행방에 대해 파악한 게 있는지 묻자 일병의 낯이 어두워졌다.

“현재까지는 새로 입수된 정보가 없습니다.”

그레이스 리들이 윈스포드 거점을 감시 중이란 사실을 어떻게 눈치챘는지 그걸 제 동료에게 알렸다. 그리고 윌킨스는 제게 붙은 미행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사라졌다.

“그럼 크로포드 사 쪽은?”

“연휴를 앞두고 있어 확인에 시일이 걸린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얼마나?”

“내년 초로 예상하고….”

일병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보고하며 회의실 쪽을 흘끔거렸다. 회의실 문 너머에는 추적 현황이 적힌 블랙 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 선 대위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미행 조에게 거짓말을 한 짐꾼을 겨우 찾아 신문하고 오는 길이었다. 짐꾼은 그 여자가 그저 인신매매단 같은 데 붙들린 줄로만 알고 도와준 것뿐이라 했다.

그러나 대위가 듣고 싶었던 건 도와준 동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레이스 리들이 교활한 수를 썼으리라는 건 그 여자를 아는 누구나 짐작한 바였다.

알고 싶었던 건 그 여자의 행방이었으나 그자도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캠벨은 보고를 마친 일병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쥐새끼가 목에 매달린 폭탄을 끊고 도망쳤다.

“젠장할….”

국내정보과가 몇 달을 공들여 준비한 작전이었다.

그러니 이런 돌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 몇 달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변수에 맞춰 작전을 유연하게 짜 놓았고, 지금도 여자가 이동 중 사라졌을 시의 계획안에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계획대로 되어 간다.’라고 부를 순 없었다. 여자가 멀어질수록 최종 목적지 또한 멀어지니.

캠벨은 라이터의 톱니를 돌리다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아니, 임신한 여자가 어떻게 군인 다섯을 따돌려?

게다가 윈스포드에서 동지와 접선한 후 위축된 모습만 줄곧 보여서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도망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캠벨은 웃자마자 입을 꾹 다물며 회의실을 곁눈질했다. 다행히 상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끝으로 미간을 누르고 있어 그가 웃는 걸 보지 못했다.

오전에는 대위의 심기가 저 넥타이 매듭만큼 비뚤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저 매듭보다도 훨씬 비뚤어졌다.

이 작전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캠벨은 잘 알았다.

윈스턴가의 미래.

싱클레어가의 몰락에 가담하지 않아 국왕의 눈 밖에 난 대위에겐 이번 작전이 형국을 절대적으로 뒤집을 기회였다.

물론 대위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쥐새끼들의 소굴을 찾아낼 실마리는 이미 얻었으면서도 여자를 그곳으로 보내는 데 집착하는 걸 보면 말이다.

창가로 자리를 옮겨 불을 붙이는 찰나,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중년의 간호 장교가 여전히 사복 차림을 한 채 들어왔다.

‘시체 같군.’

회의실로 향하는 맥길 중위의 창백한 얼굴을 캠벨은 딱하다는 눈으로 좇았다.

그레이스 리들은 인간의 탈을 쓴 검은 고양이일지도. 그 교활한 여자와 엮이는 이는 모두 불운해지니 말이다.

“대위님, 부르셨습니까.”

블랙 보드를 응시하고 있던 대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맥길 중위는 상관의 눈을 피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흠칫 놀라 눈을 돌렸다.

찰나가 남긴 잔상은 지독했다. 정모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서슬 퍼렇게 번뜩이던 푸른 눈동자가 계속해서 눈앞을 어른거렸다.

오래전 실수로 막혔던 진급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기에 이번 작전에 참여한 지 이제 석 달째. 그간 딱딱하고 무례한 간부들만 보던 중위는 윈스턴 대위의 세련된 용모와 기품 있는 태도를 보며 군에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군인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 그 누구보다도 딱딱한 군인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과장일 거라고 믿었던 캠든의 흡혈귀로 돌변하지는 않을까 두려워졌다.

“문 닫아.”

중위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며 숨을 깊이 들이켰다. 다시 뒤돌았더니 대위가 이젠 이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그녀를 추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실이 조사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태를 처음 보고했을 때 대위는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풍겼으나 미행 조를 질책하지 않고 곧바로 변경된 작전을 지휘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니 미뤄 두었던 문책을 하려고 부른 걸지도. 위압감에 숨을 쉬기 어려워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맥길 중위.”

“네, 대위님.”

“작전 대상과 나눈 대화, 빠짐없이 보고해.”

중위는 표정과 토씨 하나까지 기억해 내려 애쓰며 그 여자와 나눈 대화를 보고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위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제야 그녀는 제가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레온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 장교를 쓴 것이 패인이었다. 지난 석 달간 강도 높은 훈련을 거쳤다지만 현장 경험의 부재는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실수로 이어졌다.

레온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여군은 흔치 않다. 그리고 쓸 만한 인원의 대부분은 고문실의 경비를 섰던지라 그 여자가 목소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몇 되지 않는 후보 중에서 그나마 그 여자가 경계심을 덜 느낄 인상과 나이대만을 남기고, 여자의 상태가 나빠질 때를 대비해 간호 장교를 선발했더니 이런 실수를.

“내가 분명 말했지 않나? 그 여자, 눈치가 굉장히 빠르니 말조심, 행동 조심하라고. 대체 어디로 들은 거야.”

“죄송합니다.”

“보고나 계속해.”

“네, 그 후론 첫 아이냐고 제가 물었고 여자가 그렇다며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다고….”

레온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아이를 가져서 설렌다, 라니.

체념한 척만 했을 뿐, 아이를 여전히 기꺼워하지 않는 여자가 굳이 필요 없는 거짓말까지 하며 무해하고 평범한 여자를 연기했다.

그 여자, 이게 함정인 걸 알고 있었군.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 중위의 말실수 때문인가. 어쩌면 그 전부터….

저택에서 도망치자마자 윈스포드의 안가로 간다. 거기서 여행 자금을 얻어 제 약혼자에게로 향한다. 그곳에서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반군의 추악한 진면모를 목격한다. 그리고 그는 세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여자를 되찾으며 본거지를 소탕한다.

이것이 그가 가장 바라는 전개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번 작전에서 가장 큰 변수라는 제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레온은 우체국 전화 부스의 옆 칸에서 여자의 대화를 어렴풋이나마 엿들은 일병의 보고를 되짚어 보았다.

한시가 다급한 와중에 안가의 쥐새끼와 싸울 줄이야.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제 약혼자와 전화로 싸우며 레온의 예상보다 훨씬 이르게 배신당해 버렸다.

그건 본거지에서 당했어야지.

이젠 배신감이 복수심으로 발전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꽉 막힌 여자, 제 오빠에게 간다고 대답하더니 정말로 조나단 리들 주니어가 사는 동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본거지는 북쪽인 브레이턴 주에 있다. 그건 여자의 허술한 행동에서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브레이턴 지역의 크로포드 1499번.

여자의 통화를 연결해 주었던 교환수에게서 지역명과 전화 회사명, 그리고 번호를 얻어 내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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