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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36화 (136/240)

136화

크로포드 사에서 연결을 제공하는 1499번 전화의 위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그러니 그건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레온에게 가장 중요한 건 본거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본거지로 군을 끌고 가는 것이었다. 자의로 하든, 멋도 모르고 미행을 달고 가든, 반군의 눈에는 그 여자가 배신자로 보일 테니.

배신당한 여자가 동지를 직접 배신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 여자와 반군 집단이 서로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만 하면 그는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틀어진 건 어쩌면 그 여자가 그의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그렇다면 제 오빠에게 갈 이유가 없잖아?

그 여자,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

“그러곤 배가 자꾸만 뻐근하게 뭉친다고 한 게 전부였습니다.”

중위의 말을 듣는 순간 생각의 사슬이 뚝 끊어졌다.

“그래도 저희를 따돌리고 도망쳤던 걸 보면 멀쩡한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중위가 그의 낯빛을 살피며 다급히 덧붙였다.

“도망친 후에도 멀쩡했나.”

“…….”

“모르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소리를 당당히 지껄이는군.”

“죄송합니다.”

“당장 나가서 캠벨 소위에게 규모에 상관없이 각 병원과 조산원 또한 수색하라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중위가 나가며 문을 닫는 순간 레온은 넥타이 매듭을 당기려다 멈칫했다. 매듭에 닿은 검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재킷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손이 또 멈췄다. 레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속이 갑갑할 때에는 시가를 무는 게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시가 냄새를 맡을 때마다 입덧을 한 후로 시가 케이스를 치워 버렸다.

대신 창가로 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공기를 아무리 들이마셔도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안감은 식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적인 충격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

레온은 여자에게 충격을 준 쥐새끼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내 계산대로 움직여 준 건 고맙지만 적당히 했어야지.

머지않아 그 배에 든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들보다도 적당히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걸 몸소 겪게 될 것이다.

의사에게서 여자가 건강하다는 확답을 여러 차례 받고도 직전까지 작전 개시를 망설였다.

파리하게 말라비틀어져 가던 걸 지켜본 후로, 레온은 무슨 짓을 해도 여자가 망가지지 않는다는 착각을 버렸다. 저는 그 여자가 망가지길 바란다는 착각 또한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결국엔 작전을 밀어붙였다. 극약 처방이 필요했으니.

그대로 두면 그와 여자의 사이에는 미래가 없다. 그가 당장 증오의 찌꺼기를 버리고 변한다 해도 헛된 믿음에 빠진 여자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평생을 똑같은 애증의 쳇바퀴만 돌 수는 없었다.

레온은 창 너머 저 까마득한 암흑과도 같은 그 여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동지에게서 도주 자금과 무기를 구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본거지로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빠에게 가는 기차를 탔지만 중간에 감시자를 따돌렸다.

여기서 선택지는 두 가지.

하나, 본거지로 간다.

이미 배신당하고도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뭘까.

미련? 복수?

그 자식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나를 이용해. 혼자 할 생각 말고.

일단 브레이턴 쪽으로 향한 열차들부터 추적하고 있으나 몇 시간이 지나도록 여자를 목격했다는 제보는 없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지, 제3의 위치로 향한다.

레온에겐 최악의 경우였다. 그가 아는 한 여자에게 다른 연고지는 없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여자가 숨는다면 그는 지푸라기 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 뒤지듯 온 왕국을, 아니, 온 대륙을 뒤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믿을 단서는 여자가 어떠한 노력을 해도 바꿀 수 없는 눈동자, 그것뿐이었다.

어젯밤 그의 밑에서 수많은 감정을 내비치던 청록 빛 눈동자가 떠오르는 순간, 레온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 어젯밤의 애틋했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얄미웠다.

어디로. 대체 어디로.

그 여자가 자취를 감춘 플랫폼을 내려다보며 오늘 낮 벌어진 상황을 시간 순으로 낱낱이 분해해 곱씹어 보던 레온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니지. 선택지는 세 가지다.

곧장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명령했다.

“그 여자가 원래 탔던 열차, 원래의 종착역에 당장 연락해! 캠벨, 레드힐 농장의 감시 인원에게 지금 즉시 조나단 리들 주니어의 미행을 재개하라고 지시하도록.”

세 번째 선택지, 오빠에게로 가는 기차를 다시 탄다.

“어려운 문제에선 가장 단순한 답이 정답일 때도 있는 법이거든.”

그 여자의 맹랑한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린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래, 단순히 미행이 성가셨던 걸지도.

***

선술집의 문이 벌컥 열리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음이 텅 빈 밤길로 터져 나왔다. 곧바로 거나하게 취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더니 마을 변두리의 농장 지대로 향했다.

동료들이 여전히 오늘의 복싱 경기 중계를 두고 떠드는 가운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느 사내만이 이따금 뒤를 흘끔댔다.

20m 정도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 그저 길이 겹치는 걸지도 모르지만 따라온다고 판단을 내린 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야심한 시각에 젊은 여자 혼자 걷다니.

어두워서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었으나 여자의 걸음걸이에서는 밤길을 홀로 걷는 여자들이 흔히 풍기는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군인지, 블랜차드인지.’

사내들이 하나둘 갈림길에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나란히 걷던 동료마저 어느 허름한 건물 앞에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찰리, 성탄절 즐겁게 보내게.”

“자네도.”

그는 마주 성탄절 인사를 해 주고 계속해서 어두운 흙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새 꽁꽁 언 코끝을 장갑 낀 손으로 비비며 농장 입구로 향하는 길모퉁이를 돌려던 찰나였다.

“조.”

누군가가 그를 가명이 아닌 본명으로 불렀다.

“…그레이스?”

조는 깜짝 놀라 뒤돌았다. 여태 그를 따라오던 여자가 동생이었을 줄이야. 분명 서부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라던 녀석이 이 동부에는 어쩐 일일까.

“말도 없이 언제 왔….”

“말해 줘.”

그레이스가 그의 앞으로 재빠르게 다가왔다. 구름이 달을 가린 탓에 고작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도 동생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심상치 않은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뭘?”

“네가 아는 것 전부. 빠짐없이. 거짓 없이.”

올 것이 왔다. 이제야, 겨우.

그것이 진실을 요구하는 동생을 마주한 조의 첫 생각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게 분명했다. 춥고 어두운 데서 이럴 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자고 했더니 동생은 막무가내였다. 조는 하는 수 없이 그레이스를 외딴 창고로 데려왔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오일 램프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곤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너도 앉….”

위로 향하던 그의 시선이 그레이스의 배를 스치는 순간 멈췄다.

“맙소사, 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미의 아이야? 언제 말도 없이 결혼했어? 이거 꽤 섭섭한데. 잠깐. 혼자 왔어? 임신한 사람이 이 추운 밤에 혼자 돌아다녀? 아, 안 되겠어. 당장 집으로 가자. 저녁은 먹었어?”

조는 사정을 전혀 모른 채 혼자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레이스를 붙잡았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해.”

그녀는 오빠를 다시 자리에 앉히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동생의 고집을 잘 알기에 조는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는 결연한 얼굴로 숨을 들이켜더니 한숨처럼 내쉬며 물었다.

“나, 아버지의 친자가 맞아?”

넌 이미 다 알고 묻는 거구나. 조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이날이 올 것을 예상해 그동안 수없이 머릿속에서 연습했건만 막상 닥치니 말이 혀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솔직하게 대답해 줘.”

조는 결국 어렵사리 고개를 저었다. 곧바로 동생의 얼굴이 울음을 참는 듯 울상이 되었다.

“…네 친부는 따로 있어.”

그랬구나. 결국은 윈스턴의 말이 맞았구나. 그레이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어렴풋이 끄덕였다.

“나도 누군지는 몰라. 미안해.”

그건 내가 이미 알고 있어.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 날 어떻게… 가지게 된 건지는 알아?”

그래도 여전히 제가 더러운 미인계의 산물이라는 윈스턴의 말은 믿지 못해 묻자 마주 앉은 오빠의 얼굴에서 괴로운 기색이 한층 짙어졌다.

“이런 얘긴 취한 나도 힘든데 맨 정신인 넌….”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차마 내 입으로 말 못 하겠어. 어머니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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