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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42화 (142/240)

142화

“지미, 군대야!”

문밖에서 다급히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는 사색이 되어 회관 안쪽으로 뛰어가는 지미를 느긋하게 따라가며 웃었다.

레온 윈스턴, 그 개새끼. 내 복수를 해 줄 테니 쓸모 있는 개새끼.

지미는 낡은 원탁이 놓인 회의실로 들어가 카펫을 젖히더니 열쇠를 꺼내 바닥의 비밀 공간을 열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온 그의 손에는 소총과 탄창 여러 개가 들려 있었다.

“넌 여기 있어.”

그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레이스를 두고 회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임스 블랜차드 주니어, 부디 행운을 빌어. 내가 겪은 고통을 너도 겪게 될 테니.

그녀는 문밖으로 사라지는 괴물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다 그가 잠그지 않고 간 비밀 문을 내려다보았다.

저항은 순식간에 진압됐다.

레온은 차에서 내려 광장 한가운데에 서며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시시하기 짝이 없군.”

그것도 결국은 그의 탓이었다. 준비가 완벽하게 이뤄진 작전일수록 실전은 시시하게 마련이니.

“완벽해도 너무 완벽했어.”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소총을 든 병사들이 머리 위로 손을 번쩍 든 포로들을 군용 트럭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소 떼를 축사에 몰아넣는 꼴이었다.

트럭에서 옮겨 간 시선은 깨진 창문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교회로 향했다. 꽤나 끈질긴 저항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교회는 예배당 창문으로 던져 넣은 수류탄 몇 개에 쉽사리 함락됐다.

레온은 부상을 입은 이들이 신음하는 소리와 어느 겁쟁이의 훌쩍임이 거듭 이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장 한쪽의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는 임시 바리케이드가 허술하기 짝이 없게 세워져 있었다. 그 주변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체포된 이들이 무릎을 꿇고 있거나 머리를 총구로 짓눌린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군화가 돌바닥을 느긋하게 때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채찍을 든 채 검은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장신의 사내가 죽음의 사신으로 보였다.

레온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이들을 응시하다 미간을 구겼다.

모두 하나같이 너무나도 평범한 시골 사람으로 보였다.

기가 막혀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시시한 자들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죽고 수많은 이들이 수십 년간 골머리를 앓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한 손에 든 승마용 채찍으로 놈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희 총사령관은 어디 있지?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그러자 바리케이드의 뒤에 무릎을 꿇고 있던 젊은 남자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일어섰다.

“제임스, 블랜차드, 주니어.”

레온은 두 팔을 벌리고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높이 들며 감탄했다. 스타라도 만난 양 굴자 놈이 그를 경멸과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가 어떻게 생겼을지 항상 궁금했어.”

마침내 놈의 얼굴을 본 레온은 실소했다.

저자, 그 여자의 눈도 세뇌했나 보군.

“캠벨.”

레온이 눈짓을 하자 캠벨이 리틀 지미를 제압하고 있던 사병에게서 놈을 인계받아 그의 앞까지 끌고 왔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잊을 뻔했군. 난 레온 윈스턴. 서부 사령부의 국내정보과 소속 대위이자 네 약혼녀의 배 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이지. 아, 이젠 전 약혼녀인가?”

레온이 눈꼬리를 휘어 웃어 주는 순간 블랜차드가 포로 주제에 겁도 없이 그에게 침을 뱉으려 했다. 물론,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레온의 발에 차여 돌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환영 인사가 너무 과해. 마침내 이렇게 만나게 되어 난 기쁜데 넌 그렇지 않나?”

휙휙. 채찍이 허공을 가르다 가죽 장갑을 내려치는 소리가 살벌했다.

“친히 내 저택으로 오라고 초대장까지 보냈는데 오지 않더니, 못 오겠다는 답장조차 주지 않고. 그러다 기껏 보내온 게 남의 여자에게 주는 연서라니. 그것도 독약이 담긴. 무례하기 짝이 없어.”

바닥을 개처럼 두 손으로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블랜차드가 그를 씹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순간 무언가를 포착한 레온은 채찍 끝으로 놈의 턱을 밀어 올리며 픽 웃었다.

“그나저나 이 얼굴, 그 여자 짓인가 보군.”

뺨 한쪽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직도 제 처지를 모르는 놈이 채찍을 쳐 내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레온은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눈을 마주하게 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온 왕국에 악명을 떨치던 반란군 세력의 수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꼴이 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됐다.

“왜 너처럼 보잘것없는 걸 그 여자가 끝까지 믿었는지 궁금해지는군. 어떻게 세뇌한 거지? 말해 봐. 아니지. 그건 앞으로 차차 들으면 되겠고….”

그는 놈의 머리채를 던지듯이 놓았다. 주변을 훑어본 눈동자가 다시 지미에게로 향했다.

“말해. 내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

또다시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묻는 순간이었다.

쾅!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검게 물든 하늘로 울려 퍼졌다.

점점 멀어지는 총성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악과 악이 싸운다. 아니, 인간이 싸운다. 탐욕스러운 인간이.

그레이스는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 인간의 탐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녀는 앞으로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기로 했다. 이젠 어머니의 유언대로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 것이다.

한 손에는 불이 밝혀진 오일 랜턴을, 다른 손에는 묵직한 짐 가방을 들고 캄캄한 숲길을 걷던 그레이스가 돌연 멈춰 섰다.

“흐음….”

못마땅하다는 콧소리를 내며 뒤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쾅!

어둠에 잠긴 숲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무언가가 땅 밑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 진동이 발아래를 울렸다.

“나 아직 쓸 만하네.”

풋, 웃어 버린 그레이스는 다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숲길이 끊어지고 눈앞에 넓은 강이 펼쳐졌다.

강변을 따라 고작 30m 정도 남쪽으로 걷자 작은 선착장이 나타났다. 그 끝에는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고가인 모터보트가 정박해 있었다.

그레이스는 4인승 보트에 씌워진 커버를 벗겨 내고 뒷좌석에 짐을 던져 넣었다. 가방에 든 건 지하 금고에서 훔친 돈, 그리고 권총, 단검, 탄약 등의 무기였다.

허술한 자식.

그 개자식이 열쇠를 제 책상 서랍에 넣어 두는 습관을 버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선착장에 매인 밧줄을 단숨에 풀고 마호가니 보트에 올라탄 그레이스는 운전석에 앉으며 열쇠를 꽂아 넣었다. 시동이 곧바로 걸리며 모터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지미가 아끼는 보트다웠다. 최근에도 관리한 듯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좋아….”

도망칠 준비를 마친 그레이스는 태동이 선명히 느껴지는 배를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일단 나와 함께 가자.”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강의 보이지 않는 끝을 막막하게만 바라보던 눈빛이 서서히 결연해졌다.

짐승들이 겨울잠을 자고 철새가 남쪽으로 떠난 겨울의 강가는 고요했다. 어느새 총성은 멎었는지 들리지 않고 희미한 캐럴 소리만 이어졌다.

한쪽이 전쟁을 치르는 사이, 강 너머 어느 마을에서는 성탄절 전야 예배가 한창인 듯했다. 구세주를 찬양하는, 그 익숙한 노랫말을 그레이스는 어렴풋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경건한 말을 그려 내던 입술이 돌연 비틀렸다.

죄는 값을 치러야 사해지는 법이지.

그리고 또 한 명,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레온 윈스턴, 이젠 네가 지옥 속을 허덕일 차례야.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복수의 시작이었다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으로 그 남자를 향한 그레이스의 복수는 완성됐다.

그리고 그 복수에 마침표는 없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망설임 없이 기어를 꺾었다. 보트가 굉음을 내며 달빛이 넘실대는 강물을 거침없이 가르고 나아갔다.

신의 은총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죄지은 자 모두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내게 빌어봐: 1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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