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아닐 거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얄미운 걸 보니 제가 너무 꼬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 세상이 몽땅 무너져버렸을지언정 세상은 그렇게까지 각박하고 야박하지는 않다. 아직까지는 그리 믿어보고 싶었다.
“죄송하긴요. 다 제 걱정해서 그러시는 건데요.”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음…….”
그럼 그냥 여기 살아주시든가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킨 희림이 아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녀가 마지막까지 이미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며 억지로 입가를 늘였다.
“아니요. 처음 오신 분께 어떻게 그런 일을.”
“뭘요. 회장님께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제가 당연히 도와야죠.”
“죄송한데 굳이 회장님이라고는…… 어어!”
저게 뭐야.
심드렁하게 끄덕이려던 희림의 고개가 엉거주춤 굳어버렸다. 가볍게 테이블을 짚은 남자가 한켠에 쌓인 신문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것도 세상에서 사라져버려야 할 악마의 신문을.
“저, 저런 걸 왜 선생님께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면서요.”
그의 손짓에 팔랑이는 신문 위로 제 초췌한 얼굴이 함께 흔들렸다. 하얗게 질린 희림이 성큼 다가서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느긋했다.
“회장님께 정말 실망이군요.”
“회장님 소리 좀 그만하시라니까요!”
“그럼 회장이라고 부를까?”
“…….”
“우습네.”
굳어버린 그녀의 곁으로 신문을 곱게 내려둔 그가 피식 웃으며 몸을 세웠다. 안 그래도 큰 키가 한 뼘은 더 커진 듯한 그는 마지막으로 은테 안경을 가볍게 벗어냈다.
“회원 하나 못 알아보는 회장님이라니.”
◇ ◆ ◇
희림이 떠나고 홀로 남은 인하가 무의식적으로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전면에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큼지막한 유리창도, 2층 침실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도 제법 그럴싸했지만 지금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부스럭, 신문을 든 그가 테이블로 돌아왔다. 마주 앉았던 이는 없어졌지만 다행히 그 얼굴을 대신할 사진이 있어 그리 허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서 초조하면서도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그건 굳이 무너져가는 벽 옆에 울상으로 주저앉은 사진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어떤 사진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원래도 알던 사실을 오늘 얼굴을 맞대고 앉으며 다시 알게 되었다.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만, 뭐 어쨌든.
“…….”
조금은 미소가 걷힌 인하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어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한 오후의 티타임이 그로서도 새로웠다. 꼭 수년 만에 처음 가져보는 여유가 아니더라도 커피가 이렇게 달게 느껴지는 건 오랜만이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고.
“네, 박 비서님.”
느긋하게 휴대전화를 받아 든 인하의 시선은 아직도 신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따로 이름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이 시간에 제게 전화할 사람은 그뿐이었다.
- 아, 제가 방해드린 건 아니겠지요. 혹시 지금도 한참,
“아닙니다. 지금은.”
그제야 한구석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흘깃한 인하가 피식거렸다. 박 비서가 이렇게까지 제 눈치를 보는 이유야 모를 리 없지만 다행히 지금 자신은 인생을 통틀어 매우 드물게도 딴짓을 하는 중이었다. 수화기 너머 박 비서가 내뱉는 안도의 한숨이 적나라했다.
- 다행이네요, 조마조마했는데.
“혹시 회사에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공사 때문에요.
휴대전화 저편에서 부스럭대며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꽤나 두터워 보이는 종이의 두께가 제법 철저히 준비한 티가 났다.
- 일단 머무실 집은 워낙 급하게 세워서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인하가 테이블 너머 빈 의자를 물끄러미 넘겨보았다. 그의 표정을 알 길 없는 박 비서가 헛기침했다.
- 그래도 갑자기 그리로 내려가셔서 지내시기 쉽지 않으실 텐데요.
“괜찮습니다. 도와준다는 사람도 있고.”
- 네? 아아, 군청에 직접 다녀오셨다더니 거기서 도와주셨나 보네요. 하긴 시골 인심이 좋기는 좋은가 봅니다.
“그러게요.”
박 비서의 맞장구에도 그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친절하게도 이것저것 챙겨준 물건들이 한가득이다. 물론 그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은 따로 있었지만.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나 다른 데서 연락 오거든 그리 말씀하시고요.”
- 네에. 안 그래도 공사 때문에 건설사에서 조만간 내려가긴 할 겁니다. 바로 본관 공사 시작하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하네요.
“아뇨. 그건 잠시만 홀드해주시죠.”
- 하지만 전에 상무님께서 최대한 빨리 진행해달라고…….
당혹스러운 박 비서의 반응에도 인하는 확고했다.
“생각을 좀 해보려고요.”
- 네에? 이제 와서요?
내내 조심스럽던 박 비서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하긴, 그만큼 서둘러 추진해왔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 혹시 다 그만두고 돌아오시려는 겁니까? 솔직히 상무님 같은 분이 지내시기에는 지루하시긴 하겠지요.
“제가 왜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 그래도 방금 생각해보신다고……. 회장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지.
“됐습니다.”
단호히 잘라낸 인하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쪽 회장님이야 제 알 바 아니었고, 여기도 못지않게 좋아할 회장님이 한 분 있기는 했다. 신문을 펼쳐 든 그의 두 눈이 천천히 휘어졌다.
“그냥, 생각을 오래오래 할수록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 ◆ ◇
심층기획, 지진 특집 - 청연, 과연 지진에서 안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9일 밤, 청연을 강타한 진도 1.1의 지진으로(오타 아님. 문의 사절) 안온마을에서 성업 중이던 가게 하나가 무너졌으며 20일 6시 기준 청연군청 추산 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28세 한희림 씨(안온 청년회 회장 겸 차기 상가 번영회 회장)로 예기치 못한 사태에 현장은 비탄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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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의 기자가 인터뷰를 청했지만 크나큰 충격 때문인지 한 씨는 몹시도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대신 이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보았다는 안온마을 김 모 할머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밤중에 온 마을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에 뛰쳐나가봤더니 딱 거기만 무너져서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