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80)

6화

읍내로 옮긴 중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 회장이었다는 이유로 회장이 되었고, 고등학교에서도 같은 이유로 믿음직한 회장이 되어 있었다. 스리슬쩍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다 보니. 2년 전 그녀가 이 마을에 뜻하지 않게 눌어붙게 된 사유와 매우 비슷하게 흘러가는지라 희림으로서는 더욱 진절머리가 났다.

뭐 대단한 권력이나 줬으면 말도 안 하지.

이 시골에서 회장 소리 들어봤자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선생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산골짜기 아이들의 등교를 책임지고, 특히나 삐딱한 아이들은 두 번 챙기고, 그러고도 낙오되는 아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챙겨야 했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가장 많이 받은 회원이라면, 단연코 한 사람이었다.

“……저기 할머니. 혹시 저어기 예전에 감나무 집 할머니네 기억나?”

“북안골? 거기는 왜.”

“그냥. 할머니는 기억 좀 나시나 해서.”

슬쩍 돌아누운 희림이 머리를 괴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분답게 그새 바느질거리를 찾아낸 할머니의 옆모습이 정겨웠다.

“당연히 기억나지. 내가 노망난 것도 아니고 수십 년을 이웃지간으로 살았는데 그 정도도 기억 못 할까 봐.”

“그래도 이제는 없어진 지 오래됐잖아.”

어느새 소리도 없이 다가선 그녀가 할머니의 손에서 바늘을 빼앗았다. 좁은 구멍에 억지로 무언가를 맞춰보려 하는 손짓이 예전 기억을 더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동네의 어느 한 집이라면 모를까, 이미 그 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만약 그곳이 제가 기억하는 이의 집이 맞는다면.

“그치. 터널인지 뭔지 만든다고 강제로 싹 밀어버렸잖여.”

“응.”

“그 집 할매 죽고 나서 그리된 게 다행이지. 아무리 나랏일이라지만 살다가 갑자기 쫓겨나면 기분이 어땠을라고. 안 그래도 딸내미 하나 있는 거 일찍 가고 얼마나 속 끓이던 사람인데.”

쯔쯧, 바늘을 받아 든 할머니가 혀를 차는 것을 보아하니 그 집이 그 집이 맞는 모양이다. 쭉 뻗은 감나무가 보기 좋던 안뜰, 볕이 예쁘게 들던 자그마한 집이었다. 바늘귀에 가느다랗게 이어지던 실 자락이 그 안마당의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근데 그 집에 외손자 하나 있었더랬지?”

“으응? 그랬나?”

“으이그, 어제도 이야기해놓고 그런다. 너는 젊은 애가 그래서 어쩌냐.”

타박하던 할머니가 눈을 찡그리며 웃자 희림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사실 ‘그 집 손자’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못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 우리 동네에 애들이 뭐 한둘이었나.”

“한둘은 아니라도 서너 명이었지.”

“…….”

“하여튼 그 집 손자 걔는 애가 영 그래서는 잘 살고 있나 모르겄어.”

결코 지진 이재민이 할 만한 걱정이 아니건만, 할머니의 진지한 대답에 희림은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갑작스레 떠오른 옛 기억이 꽤나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걔가 즈그 집 나무만큼 키가 훌쩍해가지고는, 인물 하나는 참 좋았는데 인물값이나 하고 살면 좋겠구만.”

“…….”

아니야 할머니. 인물값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세포 단위로 팔아먹은 모양이더라고.

어제 그 커다란 호수와 근사한 건물을 떠올리는 희림이 점차 웃음을 잃어갔다. 제가 기억하는 인하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그가 근사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 번지르르하지도 못했다.

웬걸, 다들 고만고만한 농가에서도 눈에 띄게 남루한 집이었다. 감나무 집 할머니가 갑작스레 찾아온 외손자 하나에는 지극정성이라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집에 있는 건 햇볕을 제외하곤 모두 낡아 있었다.

“무슨 복권이라도 맞았나.”

“음, 무슨 복권?”

“아냐. 아무것도.”

설명할 기력도 없는 희림이 다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째서 그때의 그 꼴통이 그런 사업가가 되어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로서는 몹시 복잡한 심경이었다.

‘미치겠네.’

단순히 그런 식으로 재회한 것에 대한 부끄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지던 순간 이미 그런 사소하고도 비실용적인 감정은 같이 무너져버렸다. 지금은 그저 과연 옛 동네 주민이 새 동네 주민이 되어줄 것인가, 그리하여 제 회장 감투도 함께 물려줄 수 있을지에만 집중했다. 사실 그놈과는 그 이상으로 복잡미묘한 여러 문제가 얽혀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억지로 지워버렸다.

‘아무리 봐도 만만치가 않던데.’

싱긋 웃으며 안경을 빼어내던 인하의 모습이 고스란했다. 10여 년 만에 만난 저를 두고도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쭉 자신을 보아온 것처럼 익숙한 눈짓이 장난스러웠다.

“더 있다 가지, 왜.”

그 느긋하고도 나른한 눈빛을 보는 순간, 왜 그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한두 번 보아온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매 아침 가장 많이 서로를 마주했을지도 모르는데.

“……휴우우.”

좀 잘해줄걸.

이제 와 10년도 더 지난 일을 후회해서 뭐 하겠냐마는 한숨이 깊어졌다. 그때 이 악물고 좀 더 잘해줬더라면 오늘 같은 날이 왔을 때 자연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지금의 강인하를 상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상가 번영회 회장님으로 임명하는 것은 더더욱.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부쩍 심란해진 그녀가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체격이나 덩치나, 어떻게 강제로 밀어붙여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젊은 사람이 청연에 들어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친구를 팔아먹고 내가 뜨느냐.

내가 남고 우정을 지키느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간지옥에 빠진 희림의 고뇌를 끝내준 것은 의외로 할머니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였다.

“맞다, 희림아. 너 다음 달 마지막 주말에 시간 되냐?”

“……뭐야. 할머니는 언제부터 그런 걸 물어봤다고.”

그녀가 별 싱거운 걸 다 묻는다며 손을 저었다. 이제 와 미안해서 저러시는 건지. 매번 느닷없는 일거리를 만들어 오는 할머니에게 삐죽거리면서도 막상 할머니가 제 눈치를 살피면 마음이 좋지 않다. 희림이 어디 말을 해보라며 귀를 열자 바느질을 마친 할머니는 야무지게 이로 실을 툭 끊어냈다. 

“아니. 그날 우리 회장님 취임식 때 읍내 한 바퀴 돌면서 가두행진 한번 하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

◇ ◆ ◇

때로는 불변의 진리처럼 믿어온 강한 믿음이 아주 사소한 계기로 깨어지기도 한다.

저를 둘러싼 세상 모두가 지긋지긋하던 그때, 이미 모든 것이 최악이라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제 모든 착각을 사정없이 깨트리는 존재가 있었다. 열여덟 강인하에게 있어 한희림이 바로 그런 여자였다.

“……저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전형적인 사춘기의 발악 같은 말이었지만, 외할머니네 방 한구석에 기댄 인하에게는 살려고 하는 말이었다. 

답답해 죽을 거 같아서. 이러다 정말 무슨 일이 날 거 같아서.

그런 이유로 평생 얼굴도 몰랐던 외할머니를 불쑥 찾아왔지만 이곳이라 해서 탈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저만 보면 죽은 딸 생각에 눈물부터 닦아내리는 할머니의 존재는 어쩐지 부담스러울 뿐이다. 주름진 손으로 제게 뭐든 해주려 바삐 움직이는 할머니를 보면 안 그래도 답답한 가슴이 더욱 타들어갔다.

그렇지만 그 손을 떨쳐내고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하루아침에 갓난쟁이 이복동생을 데리고 눌러앉은 아버지의 비서, 아니 계모가 있는 집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래. 네 멋대로 살아봐라. 그런 시골 촌구석에서 썩다 보면 너도 인생 얼마나 편하게 살았나 깨닫는 날이 오겠지!”

아버지의 역정처럼 그런 날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처음 한동안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새벽마다 매캐하게 채우는 시골의 향도, 차 소리 하나 없는 고요한 귓가도, 대청마루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별조차도 서울과는 달랐다. 딱 개학 시기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적당히 얼굴만 비치려 했던 학교에 며칠간 빠지게 되며 그를 향한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아버지처럼 호통을 치는 거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할머니의 걱정 가득한 한숨은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무심과 무의욕이 끝에 치달았던 바로 그날,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얇은 문풍지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여기 계셨네요!”

“어이구, 그래그래. 회장님 왔어?”

저건 또 누구야.

들리는 건 제 또래의 가녀린 목소리인가 했는데 할머니의 환대가 남달랐다. 그래봤자 어디서 간절한 도움의 손길이라도 요청하셨나 본데, 열여덟 남고생에게는 헛웃음 한번 칠 거리도 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귀찮은 그가 세상을 차단하듯 모자를 꾹 눌러썼다. 드르륵, 열리는 미닫이문에도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다.

“안녕. 강인하랬지?”

대답하기 싫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꽤 예쁘긴 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난 한희림이야.”

이름도 목소리만큼 예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알 바 아니었다.

“개학했는데 이틀째 안 오면 어쩌자구 그래. 할머니도 걱정하시고 선생님도 기다리시니까 얼른 준비해서 나가자.”

저런 고리타분한 말을 할 거라면 더더욱.

“……미안한데 좀 나가줄래?”

“미안하면 그냥 좀 일어나줄래?”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던 고개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며 흠칫 멎었다. 학생이니 당연히 교복을 입었을 테고, 저런 목소리의 주인이니 얼굴도 어느 정도 예쁘기야 할 테지만 그녀는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