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80)

7화

허리까지 오는 길고 검은 생머리가 찰랑였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가 조금 유행을 지난 듯도 싶었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단정한 듯 새침한 이미지에 약간은 올라간 고양이 같은 눈매가 상큼했다. 햇볕이라고는 받아보지도 못한 듯 뽀얀 피부에도 뺨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아마 제가 살던 서울 어딘가에서 보았다면 한참을 쳐다보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세상만사 모두 질려버려 찾아든 시골구석만 아니었더라도.

“나가.”

“……뭐?”

“나가라고.”

긴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문틈으로 기웃거리는 할머니 때문이라도 큰소리를 내고 싶지가 않다. 한 걸음 더 다가와 창문 너머 해를 받으면, 곧 녹아버릴 것 같은 하얀 여자애를 울리고픈 마음은 더더욱 없다.

“내가 알아서 간다고, 아니 가든 안 가든 내 마음이니까 그렇게 가고 싶은 너나 가.”

“……그렇구나.”

축 가라앉은 그녀의 음성에 어쩐지 불편해졌다. 저따위가 뭐라고. 애써 신경을 끊으려 해도 안 그래도 엉킨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나갔다. 한숨과 짜증, 당시의 저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권태가 한꺼번에 들끓었다.

“네 말뜻은 잘 알겠어. 그렇지만…….”

설령 울어버린다 해도 별수가 없다. 들릴 듯 말 듯 한 그녀의 한숨도 끝까지 모른 척했다. 아니, 모른 척하고 싶었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강인하, 진짜 오랜만이다!”

그가 아침부터 자신을 찾은 희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어제 본 얼굴이나마 감회가 제법 새로웠다. 그건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니, 마침 근처를 지나다가 생각이 나서.”

“……그렇구나.”

아직 10시도 안 된 시계를 흘깃 바라보던 인하가 웃음을 참았다. 일단 들어오라 한켠으로 비켜서자 희림은 거절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남의 집 안방 문을 멋대로 열고 들어와 끝까지 버티고 섰던 대단한 기개가 어디 갈 리 없었다.

“커피 마실래?”

“아, 응. 주면 고맙지!”

“…….”

안 주면 줄 때까지 버틸 거면서, 희림은 10여 년 전과 달리 제법 예의를 차렸다.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아서 커다란 눈망울로 연신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흡사 지붕 위 고양이 같기도 하다. 물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고양이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시작이 좋아!’

자고로 그녀에게 친분이란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워낙에 마루에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이렇게 벨 누르고 문 두드려 주인을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이 어색하긴 했지만, 한번 발을 들인 이상 곱게 나갈 마음이 없었다.

여기서 빈손으로 나가는 즉시 자신은 꽃가마를 타게 생겼다. 재작년, 청년회 회장 취임식 때 머리에 썼던 화관을 생각하면 일말의 양심조차 사라졌다. 희림이 저 대신 꽃가마에 앉아줄 인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김이 오르는 커피머신 앞 달그락대는 티스푼의 소리.

새삼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 그래도 큰 키가 10여 년 만에 더 자란 듯싶다. 얇은 와이셔츠 아래 느껴지는 건장한 가슴과 팔뚝, 길게 쭉 뻗은 다리가 놀라울 따름이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 그에 대한 그녀의 감상이란 매우 단순했다. 

‘……젊어. 젊다구. 참 젊단 말이지.’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달까.

어제는 워낙 당황해 자세히 바라보지도 못했지만 이제 보니 이렇게 딱 맞춤일 수가 없다. 저 건장한 팔은 볏짚을 열 단씩 번쩍 들어올리고도 남겠지. 저 긴 다리는 또 어떻고. 그 어떤 농기구든 한 번에 기어를 넣기에 딱 적당했다. 지난 2년, 남자에 대한 외적인 기준도 오직 하나로 맞춰진 그녀답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한희림. 너 어제도 설탕은 안 넣는다고……. 음.”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서던 인하가 주춤했다. 물론 그녀가 저렇게 자신을 웃으며 바라봐준다면 나쁠 거야 있겠냐마는, 지금 턱을 괴고 저를 바라보는 희림의 눈빛은 단순한 반가움이나 호감 그 이상이었다.

뭐랄까,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에 둔 것 같다 해야 하나.

“아아, 맛있겠다. 좋다. 정말.”

“…….”

“물론 커피 말이야.”

두 손을 내민 희림이 제 몫의 잔을 받아 들었다. 그간 온갖 눈빛을 다 받고 살아온 그에게조차 낯선 눈빛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아니, 나쁘기가 힘들었다.

“그런 애가 어제는 그렇게 도망을 치고?”

“도망은 무슨.”

새침하게 내리깐 눈매도 그럴듯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로서는 이 시간이 꽤 즐거워졌다. 

그가 맞은편에 앉는 대신 식탁 뒤 자리한 선반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190에 가까운 큰 키다 보니 잠깐 몸을 걸치는 정도가 다였지만, 적어도 그녀가 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와 다양한 표정을 지켜보기에는 딱 좋은 위치였다.

“신문 보니까 너도 카페 했었다는 것 같던데.”

“아…… 응.”

생글생글하던 희림의 얼굴이 처음으로 어둑해졌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금세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가 알기로 저건 ‘더 큰 목표를 위해 슬픔 따위는 집어삼키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조금 더 지켜보면 축 처진 어깨로 차오르는 슬픔을 감춰보려 머리칼을 넘긴다든가, 가만히 입술을 맞물 것이다.

“우리 가게는 그냥……. 아.”

“뭐 해. 좋아한다면서.”

챙그랑, 머리칼에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인하의 잔이 그녀의 잔에 부딪혀왔다. 저 멀리 앉아 있나 싶더니 언제 다가온 건지. 놀란 희림이 그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느라 방금까지 울컥하던 마음도 하얗게 잊혀져버렸다. 머리칼을 넘기려 했던 손도 다시 아래로 내려와 찻잔을 꼭 움켜잡았다.

“응. 진짜 맛있네.”

“…….”

“강인하 너 은근히 커피 끓이는 데 재능 있나 보다.”

진심 반 농담 반 말을 꺼내던 그녀가 그를 흘깃거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뚱하게 눈짓할 때는 언제고 그는 다시 느긋해졌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싶으면서도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잊지 말자, 한희림.

오늘 자신은 저 남자의 속을 마구 뒤흔들어놔야 한다는 것을.

“물이 좋아서 더 맛있나? 하긴, 청연 물이 좋기로 유명하니까.”

“이거 생수인데.”

“아…….”

뭐든 순순한 적 없는 인하의 성격에 이 정도는 예상을 했다. 조금도 굴하지 않은 그녀가 본격적인 주민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저기,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안 살겠다는 거야?”

“음?”

“어제 그랬잖아. 생각 중이라고.”

그녀가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그의 반응을 살폈다. 한 팔을 뒤로 뻗어 선반을 짚은 인하의 모습은 여느 오피스 드라마의 주인공마냥 그럴싸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꽤나 큰 성공을 거두고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냥 여기 살지.”

“왜?”

“……응?”

“내가 왜 여기 살아야 하는데?”

넋 놓은 듯 그를 보고 있던 그녀가 인하의 반문에 움찔했다. 검은 머그잔 너머 절 바라보는 눈동자가 짐승처럼 고요했다. 만약 희림이 일주일에 진짜 산짐승들의 눈을 대여섯 번씩 목격하지 않았다면 순간 흔들릴 뻔했다.

“너도 참, 청연만 한 데가 어디 있다고!”

“그게 다야?”

“아…… 당연히 아니지.”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희림은 이참에 제대로 팔을 걷어붙였다. 청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다. 눈을 감고도 이곳을 그려낼 수도 있다.

“왜 서울은 공기도 되게 나쁘잖아. 출근길 같은 데 미세먼지랑 황사도 많다고 뉴스 나오고.”

“그건 그렇지.”

“여긴 그런 것도 없거든. 출근길이 아니라 새벽 언제 돌아다녀도,”

“너 아직도 밤에 다녀?”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녀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인하의 질문에 잠시 김이 샌 것처럼 입술을 맞물었다. 물론 향토방범위원회 회장 직함상 밤에 자주 다니긴 하지만 그만큼 동네가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점을 어필하려는 희림이 똑똑 가운데 놓여 있는 테이블 위를 경쾌하게 두드렸다.

“그렇게 다니고도 이렇게 멀쩡한 거 보면 몰라?”

“아직까지는, 이겠지.”

“……어휴.”

뭐가 저리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몰라도 어딘가 말려들고 있었다. 제가 들어설 때만 해도 피식하고 말던 웃음이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잔을 내려둔 인하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뭐 다른 이유는 없어?”

“다른 이유 뭐?”

“내가 여기에 있을 만한 좀 더 확실한 이유.”

“…….”

슬쩍 고개를 낮춘 그의 고개를 따라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예전엔 늘 이렇게 눈을 가리고 다녔는데, 문득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 희림의 눈망울이 크게 번졌다. 기다렸다는 듯 인하의 팔이 불쑥 그녀의 앞을 짚었다.

가까이, 테이블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가락에 닿을 듯 말 듯.

“한희림 너 예전에도 그랬잖아. 나 학교 끌고 갈 때.”

“……내, 내가 언제.”

“그때는 확실한 이유라도 있었지.”

조금은 허망한 듯 인하의 웃음이 흩어졌다. 마치 그때처럼 이유라도 대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듯 보인다면 착각일까. 머쓱해진 희림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인하와 함께 학교에 간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일일이 이유를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끌고 가다니.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못 할 짓이라도 한 줄 알겠다.”

“아니었나?”

“와……. 얘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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