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80)

20화

오도카니 앉아 다리를 끌어안은 희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핏 저와 눈이 마주친 인하가 조금은 놀란 듯 피식거리니 더욱 뺨이 간질거렸다. 보아하니 더 이상 친해지기도 어려운 절친이 된 모양인데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꼭 할머니들 사이에 있는 그가 낯설어서는 아니고.

“자아, 오늘은 이만하면 됐으니까 다들 보내주세요. 할머니도 얼른 가게 나가보셔야죠.”

“벌써?”

“인하 바쁘다니까요. 다음에 또 데려올 테니까 그때 다시 보시라구요.”

멋대로 못을 박은 그녀가 인하의 손을 이끌고 먼저 나섰다. 쪼르르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희림에게만 보이도록 허리 아래로 검지와 엄지를 말아 쥐었다. 합격이란 뜻이다.

‘그거 보라니까요!’

하여튼 그놈의 낯가림은 다 어디 갔나 싶은 희림이 웃음을 꾹 참았다. 그렇지만 기어이 따라 일어서는 할머니들의 집착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회, 아니 인하야!”

“아유, 왜들 그러세요.”

하여튼 주책이셔!

그녀가 기어이 자신들을 불러 세우는 할머니들에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10년 만에 본 번듯한 청년에게 홀딱 빠지셨다지만 이건 진도가 너무 빠른데. 이러다 일을 그르칠까 싶은 그녀가 얼른 두 팔로 할머니들을 가로막았다.

“다들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오늘은 그냥 얼굴만,”

“그게 아니라, 이것 좀 챙겨 가라고.”

“…….”

“인하 온다기에 예전에 좋아하던 반찬하고 좀 챙겼는데, 아무리 성공하고 그래도 혼자 살면서 밥은 제대로 먹어야 할 거 아녀.”

정씨 할머니가 주섬주섬 보자기를 내밀자 다른 할머니들 역시 각자 가져온 꾸러미들을 내밀었다. 맛이 있든 없든, 보기에 그럴듯하든 아니든, 미리 준비해 온 마음이라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었다.

설령 그가 번듯한 청년이 아니었다 해도.

인간이 안 될 것 같은 구제불능의 청소년이었다 해도.

“뭐 도시 사람 입맛에 맞지는 않겠지만 그래두…….”

“아뇨. 그럴 리가요.”

예상치 못한 할머니들의 선물 공세에 당황한 희림 대신 인하가 얼른 나서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뒤늦게 발견한 보자기의 김치국물 자국에 정씨 할머니가 당황했지만 인하의 커다란 손이 얼룩을 단단히 덮었다. 

“잘 먹을게요. 하나도 안 남기고.”

◇ ◆ ◇

마을에서 인하의 집이 있는 읍내 부근까지, 오늘따라 이렇게 멀 수가 없었다. 그와 나란히 걷지도 못하고 몇 걸음 뒤에 선 희림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내 덕에 반찬 많이 생겼잖아.”

“한희림.”

“……대낮에 반딧불 보러 가자는데 따라온 강인하 너도 문제가 있는 거야.”

그래,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난데없이 찾아와 반딧불을 보러 가자면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대뜸 그러자 따라나선 그를 생각하자 희림의 미안함이 서서히 의문과 답답함으로 변해갔다.

이 바보가 정말, 이래서 어떻게 여기에서 버티려고.

천년 묵은 능구렁이들이 득실대는 이 마을에서 겉모습만 멀쩡한 백로가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희림, 넌 내가 여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러엄!”

하지만 그런 울컥함과는 별개로 절대로 이십 대 후반에 그런 꽃목걸이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본능으로 맞장구부터 친 그녀가 바짝 인하의 뒤에 따라붙었다. 강인하가 보기보다 순진한 호구일지언정 제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남은 시간 저라도 잘 달래서 사람 하나 만들어놓는 수밖에.

“할머니들도 너 엄청 좋아하시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반찬까지 다 만들어주시지.”

“……그런데 나 그때도 그닥 김치나 나물 같은 거 좋아하진 않았는데.”

“에이.”

작게 웃은 그녀가 인하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휙 낚아챘다. 이렇게 뭘 모르다니. 가볍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를 흘겼다.

“총각김치 이건 정씨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거거든. 여기 이 나물은 김천댁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거고 깻잎 절임은 구둣방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거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그만큼 널 좋아한다는 거지.”

“…….”

“원래 여긴 그래. 할머니들 유일한 낙이 먹는 건데 그걸 내주는 건 마음이라구, 마음.”

슬그머니 그의 옆까지 다가간 희림의 웃음이 그럴싸했다. 웬일로 곧장 비웃을 줄 알았던 인하가 담담했다. 쟤가 저럴 애가 아닌데, 분명 표정은 그렇지 않을 거라 바라보았지만 봄의 해를 등진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런 거야?”

“으응. 그런 거지.”

“그럼 넌 왜 나한테 커피 줬는데?”

“……뭐?”

싱글거리며 웃던 희림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냐며 따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술이 버석거렸다. 

“무, 무슨. 그렇게 따지면 너도 나한테 커피 줬잖아!”

“난 커피 제일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

“…….”

그건 그러네.

갈수록 머리 위 해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희림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팔도 급격히 무겁게 늘어졌다. 당장 다 내팽개치고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기엔 그 안에 담긴 정성이 가득했다. 이걸 어쩌나 싶어질 때쯤 그녀의 머릿속이 번개가 친 것처럼 번뜩했다.

“아니지! 나도 제일 좋아하는 게 커피라고 안 했거든?”

“아아.”

“아아, 가 아니라구. 나도 안 했어. 정말 안 했잖아.”

뒤늦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낸 희림이 안달복달했다. 아아, 짧게 내뱉는 그의 시큰둥한 추임새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연 그는 결국 제 입이 다물리게 만들어버렸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는데. 한희림 네가 커피 제일 좋아한다고.”

“…….”

“마시는 거든 내리는 거든.”

해를 등지고 있던 그가 비스듬히 제게로 돌아서며 드디어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외로 비웃지 않는 눈, 아니 조금 더 진지한 눈. 그 덕에 희림의 표정만 더욱 어색해졌다.

“무, 무슨!”

“…….”

심지어 코웃음조차 어색했다. 할머니들이 내던진 낯가림을 모조리 제가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다. 이쪽저쪽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보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눈을 들어올렸다.

“하여튼 난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아아, 그래?”

“응.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이제 그의 집이 코앞이다. 얼른 반찬만 던져주고 도망칠 생각만 가득한 그녀가 마지막 뻔뻔함을 긁어모았다.

“난 맞는 말만 하거든. 약속도 꼭 지키고.”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넌 아까 할머니들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어?”

어색함에 말을 돌리려는 것도 있지만 내심 계속 궁금하긴 했다. 정씨 할머니가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속닥거리자 인하는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10년 만에 본 주제에 둘이 뭘 그리 주고받을 이야기가 있기에, 희림이 인하의 알 듯 모를 듯 한 얼굴을 훑었다.

“할머니들 엄청 신나셨던데. 너도 그렇고.”

“뭐, 조금.”

“왜애. 네가 그런 거 보니 진짜 재미있었나 보네. 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솔직히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거든.”

“…….”

이제 두 손이 가뿐해진 인하는 위로 쭉 팔을 풀어내는 동작도 가뿐했다. 혼란에 빠진 희림의 눈썹 간격이 점차 좁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직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나도 조금 더 일찍 알았을 텐데.”

“……아니, 내가 뭘.”

모르는 척했지만 이미 희림의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마음을 돌리고자 인하에 대해 온갖 칭찬을 쏟아내느라 정작 자신이 어디까지 무리수를 뒀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아니, 그나저나 그걸 싹 다 말해버리다니. 대책 없는 배신감에 더불어 급격한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서너 시간 전 살고자 발버둥 치느라 할머니들 앞에서 영혼까지 쏟아냈던 한희림과, 일 분 전 어색함을 피하고자 말을 돌렸던 한희림에게.

“……무,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다 믿지 마. 내가 할머니들한테 네 이미지 좋게 해주려고 그랬던 거니까.”

“아까는 넌 맞는 말만 한다며.”

“그거야, 아이 참!”

발걸음을 뗄 힘조차 사라져버린 그녀가 말뚝마냥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런 그녀를 빙글빙글 천천히 맴도는 인하의 눈빛이 걸음마다 달라졌다.

“한희림 네가 그랬다던데. 나 힘 엄청 세서 쌀도 한 가마니씩 들어올릴 거라고.”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천하장사도 아니고 무슨.”

“……확실해?”

“으응?”

제 앞에서 우뚝 멈추는 발에 그녀가 서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아무려면 당연한 거 아닌가. 쌀을 한 가마씩 번쩍 들 만한 사람이 청연에 있을 리가…….

“야아!”

있다.

미처 생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번쩍 들려 올라갔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이렇게 또 깨닫고 말았다.

이게 다 뭐야! 

입술을 벙긋거리는 그녀가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굳어 있는데도 인하는 지극히 담백했다. 한낮의 봄볕에도 얼음장마냥 꽁꽁 얼어붙어 있는 희림의 눈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대충 쌀 한 가마 되지 않나?”

“미쳤나 봐!”

대낮에! 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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