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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2/80)

21화

얼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그 한마디에 깨어지며 발끈했다. 하지만 들고 있는 반찬 꾸러미들 때문에 멋대로 팔을 휘두를 수도 없다. 인하 역시 그녀의 품을 힐끗 내려다보며 어쩔 수 있겠냐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내려달라니까!”

“내려주면 뭐 해줄 건데?”

“…….”

이래서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건가.

화낼 의욕마저 사라진 희림의 몸에서 축 힘이 풀렸다. 사실 오전부터 회관과 그의 집을 쉬지 않고 뛰어다닌 탓인지, 아니면 너무 어이없는 상황을 겪은 탓인지 눈을 감으면 그대로 정신을 놓을 것도 같다.

“하…….”

그런데도 우습긴 했다.

멀리서 그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지킬 때보다 이렇게 품에 찰싹 안겨 있는 지금이 덜 어색하다니. 이 아이러니한 깨달음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강인하의 팔뚝이 정말로 쌀가마니를 몇 개는 번쩍 들고도 남을 만큼 단단하다는 것 역시.

‘그래. 최소한 어색하지는 않으니까!’

아랫입술을 질근거린 희림은 그 와중에도 긍정의 여왕다운 면모를 빛냈다. 앞으로 인하와 주구장창 붙어 지내야 할 텐데 이 정도 일로 동요할 수는 없다.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이러면 내가 당황할 줄 알고.

아주 보란 듯 고개를 들어올린 희림이 인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12년 차 회장님이다. 느닷없이 번쩍 들려 꽃가마도 타보고 소 등에도 앉아봤는데 강인하라고 못 안길 거 없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듯이 강인하 같은 놈에게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그 후는 안 봐도 뻔했다.

절대 네 생각대로 되지 않을 거란 말이야. 알겠니?

눈을 먼저 깜빡이지 않으려는 그녀가 단단히 힘을 주었다. 서울서 좀 살다 오더니 아주 툭하면 업고 안고 난리가 난 친구 놈 하나 정도는 우습다. 그러느라 시골에 쭉 살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을 쭉 지키고 살아온, 대낮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산책뿐인 점잖은 유교 소년소녀들의 존재를 미처 잊고 말았다.

“……야 이 미친, 한희림.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냐.”

◇ ◆ ◇

시골마을 회장님을 하다 보면 세상 어지간한 일은 웃으며 넘기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예기치 못한 스킨십이긴 하지만 자신을 쌀가마니 대용으로 들어올린 인하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거기에 몹시 놀란 순둥이 정하까지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스킨십과 기삿거리에 목마른, 태생적 애정결핍자 연주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야, 회장님 하나 잘 들어온 덕에 진짜 청연 많이 좋아졌다. 참 살기 좋아졌어! 미국인 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계속 설명했잖아.”

“……그러니까 강인하가 쌀가마니 대신 마침 옆에 있던 너를 들어올렸다고?”

에라이. 이년아!

주먹을 움켜쥔 연주가 희림을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희림이 아무리 그런 게 아니라며 차근차근 상황을 이해시켜주려 했지만 어차피 연주에게 이 모든 광경은 한마디로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너 혼자 실컷 꿀 빨고 있었단 거잖아.”

“……꿀은 무슨.”

“야, 너 진짜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강인하 그렇게 찜해놓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봐! 너 강인하 처음 보자마자 그러기로 계획해놓은 거지?”

“아니라니까.”

“야, 저 얼굴 저 몸을 좀 보고 얘기하라고!”

휙, 연주가 저편 호숫가에 서 있는 인하를 돌아보았다. 실로 청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충격적인 비주얼에 입가를 가리자 희림 역시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강렬한 인하의 두 눈이 환각 같은 뿌연 연기 속에 아른거렸다.

“쟤네 벌써 배고픈가. 표정들이 왜 저러지.”

그의 곁에 선 정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담배나 한 대 하겠다는 인하와 따로 나왔지만 막상 멀리 자리를 비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인하는 담배를 피울 마음 자체가 그다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뭐.”

그가 시종일관 물고만 있던 담배를 다시 빼냈다. 뒤늦게 인하가 정하에게도 담뱃갑을 내밀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난 안 피워. 피우면 아주 난리 날걸.”

“한희림이?”

“아…… 응.”

정하가 뺨을 긁적이며 웃자 인하가 손에 든 담배를 꺾어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이미 입안은 충분히 쓴 것 같기도 했다.

“나 때문이라면 인하 넌 그냥 피워도 되는데.”

“아니.”

정하의 배려 아닌 배려에도 인하는 천천히 고개를 그었다.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긴 하지만, 사실 이렇게 둘이 서 있는 것도 나름대로 익숙한 일이다.

10여 년 전에도 한 번씩 머리가 복잡하게 꼬여 이러다 조만간 미치겠다 싶을 때가 어김없이 존재했다. 자극적인 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시골 바닥에서 일탈이라고는 한정되어 있다. 

그렇게 체육관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빨아들일 때, 종종 안정하와 마주치고는 했다. 물론 그때도 정하는 상냥했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도 자신은 개의치 말라며 소리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다.

제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없는 듯, 보는 이를 조바심 나게 하는 말간 얼굴로.

“혹시 한희림이 또 나 찾아?”

“아, 아니.”

“…….”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 비밀 되게 잘 지키거든.”

그러고도 정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와 조금 떨어진 담벼락에 기대어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남고생 둘이서 그렇게 큰 불편함 없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싱겁기는.

하얀 연기 속에 어쩌다 정하의 옆모습이 비칠 때면, 인하도 잠시 숨을 참았다. 저야 세상 모든 것이 짜증 나 이곳을 찾았다지만 안정하는 태생이 저와 다른 부류다. 그럼에도 멍하게 하늘이며 땅을 바라보는 정하의 얼굴을 보면 저런 놈도 세상에 불만이 있나 싶어 우습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안정하라는 존재는 제가 이곳에 머무는 데 그 어떠한 방해도 되지 않았다. 어려도 남자의 본능이니 정확했다.

아니, 정확할 거라 믿었다.

“안 그래도 희림이랑 연주한테 너 돌아왔다는 소식 듣고 궁금했어. 꼭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응.”

이제 그 시절의 담배 연기는 사라지고 전과 다르게 말수가 늘었지만,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정하가 먼저 저를 보며 웃자 인하도 못내 피식거렸다.

“너도 잘 지낸 것 같은데.”

“뭐 여기야 늘 비슷비슷하니까. 이제 이것도 적응돼서.”

정하가 한쪽에 짚고 있던 목발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인하의 눈이 약간은 찡그리듯 가늘어졌지만 정하는 뭐가 재미있는지 조용히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이거 짚고 다니는 덕에 청연은 구석구석 돌덩이 하나까지 내가 제일 잘 알걸? 아니다, 두 번째로 잘 알아.”

“처음은 한희림이겠네?”

“아니. 희림이는 솔직히 명함도 못 내밀지.”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아래 실없는 농담들이 이어지는 시간이 느긋했다. 그렇지만 두 여자들이 저희를 저리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이상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그만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난 정하가 목발을 내짚으려는 순간 인하가 그를 막아서듯 팔을 잡았다.

“여기 조심해.”

“아…….”

“비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풀숲에 가려서 그렇지, 여기 웅덩이에 물 한번 고이면 잘 안 빠져.”

짧게 인상을 쓴 인하가 발끝에 물컹대는 진흙을 털어냈다. 정하 넌 그냥 다른 길로 가는 게 좋겠다며 먼저 나서서 방향을 바꾸자 정하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아…… 역시 그랬구나.”

담담한 듯 신기하게, 타고난 성격답게 놀라는 모습마저 얌전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놀란 것이 맞는다면.

“……뭐가?”

“이 길은 나도 잘 모르는 데거든. 아마 다른 사람들은 더 모를 테고.”

다시 목발을 짚은 정하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농담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미묘한 그 말투에, 인하가 본능적으로 희림을 가리듯 정하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정확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

인하의 눈에 초조한 듯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희림의 웃음소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혹시 나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아니.”

그러나 10년 전에도 그랬듯, 정하는 인하의 찡그림에도 전혀 주춤하지 않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목발이 있든 없든, 손을 내밀며 활짝 웃는 웃음 어디에도 구김살이 없었다.

“그냥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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