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할머니, 왜 그러세요! 어디 갔다 오셨어요?”
“말도 말어! 내가 진짜 갈 때가 됐지 됐어.”
“아니, 왜요!”
그녀가 정씨 할머니를 부축해 온 다른 할머니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의 얼굴도 시무룩하긴 마찬가지였다. 답답해진 희림이 연거푸 재촉하고야 다른 할머니 한 분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정 씨가 오늘 북진마을 이장네 마실 갔다지 뭐여. 거기가 정 씨 사촌올케네잖여!”
“그래서요?”
“북진이 작년에 체육대회에서 줄다리기 그거 1등 해서 그거 트로피인지 뭔지 올려놓은 거 좀 구경하자 만졌다고, 어차피 형님은 평생 못 타볼 상 왜 헛꿈을 꾸냐고 우세를 주더랴!”
“아이구, 내가 이 나이에 그거 한번 만져봤다고 사람을 아주 쥐 잡듯이 잡아부려, 으흐윽.”
“…….”
못내 억울한 정씨 할머니의 신세타령이 추임새처럼 곁들여졌다. 서러움 가득한 할머니의 훌쩍임에 다른 할머니들 역시 어깨에서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한참 주저앉아 줄다리기 루저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희림을 의식하고 멋쩍어했다.
“아유, 우리가 또 주책이야. 회장님이 한번 안 된다고 했던 건데.”
“그러게 말이여. 늙으면 이래서 주책이지. 젊은 사람 마음만 불편하게 하고 우리도 그만 집에 가서,”
“가시긴 어딜 가세요?”
“…….”
자고로 안온마을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할머니들, 둘째는 회장님의 권위, 그리고 셋째가 바로 한희림의 승부욕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합쳐진 지금, 희림은 두 팔을 바짝 걷어붙였다.
“할머니, 저기 빨랫줄 좀 걷어 와봐.”
◇ ◆ ◇
아침부터 카메라를 든 연주가 운동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체육대회를 주관하는 군청의 직원이자 농민일보의 명예기자로서 한 시도 자리에 앉을 새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저보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누군가를 찾아내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갔다.
“이열, 우리 회장님, 장난 아니네!”
질끈 묶은 머리와 더욱 질끈 올라간 눈매, 상큼한 레몬색의 트레이닝복이 멀리서도 한눈에 띄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지난 이틀간 안온마을이 안온선수촌으로 탈바꿈했다고 하더니 과연 단장의 기세부터가 남달랐다. 그래서일까, 막상 친구의 곁에 다가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게 누구여. 기, 연주잖여!”
“네에, 할머니들. 안녕하셨어요?”
“안 돼! 절루 가! 우리 염탐하러 온 거 모를 줄 알고!”
“……아니, 제가 그딴 짓을 왜 해요.”
“아니여. 우리 회장님이 기자는 천하에 못 믿을 것들이라고 했어. 그러다 우리 전력 노출되면 네가 책임질 거여!”
“…….”
도대체 노출될 전력이라는 게 있기는 하는지.
대뜸 가로막힌 연주가 목구멍에 간질거리는 말을 집어삼켰다. 전력이라고 해봐야 쪼르르 순서나 바꾸고 말 거 같은데 할머니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거셌다. 결국 희림이 나서 ‘얘는 멍청해서 전력을 봐도 외우지도 못한다.’라고 연주를 편들어준 이후에야 친구와 말을 해볼 수 있었다.
“한희림 너 지금 나 멕인 거지?”
“알면 가. 나 지금 바빠.”
“바쁘긴 뭘. 너 어제 그제 인하네도 안 갔다면서.”
아령을 들며 손목을 풀던 희림은 인하의 이름이 나오자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덜컹거리는 것과 별개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연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집애. 나 공무원이거든? 걔가 여기저기 국공유지까지 다 사들이면서 서류 오갈 게 많단 말이야.”
“그, 그래 뭐.”
“하여튼 전에도 인하한테 너도 심심하면 체육대회 구경 오라고 했더니,”
“온대?”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물어버린 희림이 주변을 의식하며 다시 아령을 든 팔에 힘을 실었다. 워낙에 시끄러운 곳이다 보니 연주도 그저 심드렁하게 카메라를 매만질 뿐이다.
“걔가 이런 데 오겠냐? 안 온대.”
“으응.”
“솔직히 강인하한테 이런 노인네들 체육대회가 어울리지도 않겠지. 우리 나이에 이런 데에 유치하게 힘 빼는 사람이라 봐야…… 너네. 한희림.”
“……가라, 기러기.”
여전히 그의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워하던 연주가 새삼 살벌해진 친구를 보며 슬그머니 몸을 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 줄다리기를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조만간 두고 보자 연주를 위협하던 희림도 어쩔 수 없이 할머니들을 불러 모았다.
“자아, 여기요! 다들 준비되셨죠?”
“으응.”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이틀간 연습 많이 하셨으면서.”
그녀가 벌써부터 벌벌 손을 떠는 할머니들을 보며 피식거렸다. 청심환 한 알도 나눠 먹는 인정은 매우 좋았지만 이래서 제대로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 우리도 열심히 해볼라고 했는데 저짝은 남자들이 둘이나 나왔잖여.”
“어디요?”
희림이 할머니의 손짓을 따라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과연 육십 대 할아버지 두 분이 몸 푸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이 동네 기준으로 따지면 새파란 청년이나 다름없으니 할머니들이 기죽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어깨 떡 벌어진 것 좀 봐. 딱 봐도 우리는 상대도 안 되겠구만.”
“안 되긴 왜 안 돼요? 제가 이런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우리한테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구요!”
“지, 진짜?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요. 전력 유출되면 안 되니까 지금은 표정 관리부터 하시라구요!”
희림이 짝짝 박수를 크게 치며 할머니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곧 시작될 시합을 앞두고 그녀가 면장갑을 있는 힘껏 당겨 올렸다.
‘있긴 뭐가 있겠어요.’
하여튼 잘들 속으신다니까.
벌써 힘이 치솟는 할머니들을 앞세운 희림이 쓴웃음을 삼켰다.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면 제 인생부터 고쳐 썼겠지. 거짓말이 내키지는 않아도 이미 버린 양심, 할머니들의 사기까지 떨어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 저까지 기가 죽으면 이 게임은 시작도 전에 끝나고 말 것이다.
“자아! 청팀 안온마을 이쪽에 서시고 홍팀 북진마을 저쪽에 서세요!”
“와아아!”
누가 디펜딩 챔피언 아니랄까 봐 상대편은 처음부터 괴성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꽹과리를 쳐대는 주민들의 응원 속에 메인 전력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두 분이 과하게 몸을 풀어나갔다. 점차 의욕이 사라져가는 희림이 안온마을 할머니들을 바로 세웠다.
“정씨 할머니 제일 앞에 서시구요. 나머지는 연습하셨던 대로, 그리고 할머니는 그냥 당기는 시늉만 해. 쓰러지면 안 되니까.”
“그라믄 안 돼. 중심이 딱 받쳐줘야지!”
“……네에.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할머니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희림은 체념했다. 저러다 쓰러지면 어쩔까 싶지만,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막았다가 화병으로 쓰러지는 것보단 낫다. 할머니가 힘을 못 쓰면 제가 두 배로 쓰면 되는 일이다.
“다 준비되셨죠?”
삐이익, 사회자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일 마지막에 선 희림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하아.”
정말이지, 이렇게 긴장이 안 되는 경기가 있을 수 있다니.
옹기종기 붙어 선 할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못내 웃음이 났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휩쓸려 이틀을 불태운 저 자신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미 판은 벌어졌다. 지든 이기든, 아니 질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이긴 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한다.
“후우…… 응?”
하지만 잠들어 있던 그 모든 긴장감을 두 배로 증폭시켜줄 누군가가 그녀의 등 뒤를 단단히 받치고 섰다. 이럴 리가 없는데. 팔꿈치에 닿는 드넓은 가슴팍에 희림의 머리가 부스스 돌아갔다.
“거기, 안온마을 반칙 아닌가! 용병 부르면 어떡해!”
“용병 아닙니다.”
“…….”
“주민입니다.”
강인하!
우렁차게 울리는 그의 대답과 함께 희림의 숨이 멈췄다. 네가 여길 어떻게 온 거냐고, 굳어버린 입술이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심술궂은 그의 서느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의 환호와 비명이 소용돌이쳤다. 공연한 승리에 대한 장담 대신, 인하는 입에 물고 있던 장갑을 손목 끝까지 당겨 올렸다.
“다들 꽉 잡으시죠. 넘어져도 책임 못 집니다.”
◇ ◆ ◇
“자아, 그럼 줄다리기 우승팀은…….”
단상 앞에 선 희림이 바짝 마른 입술을 꼭 깨물어보았다. 아직도 놓지 못한 줄을 따라 느껴지는 흥분의 박동이 제 심장으로 이어지는 것도 같다. 할머니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인지 들썩이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안온마을!”
“와아아아아아아!”
“우워어어!”
뻔히 아는 결과를 발표하는 것임에도 그 반응은 열렬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난리가 났다. 두둥실 은색 머리들이 구름처럼 떠오르는데 천국이 따로 없다.
“회장님! 우리가 1등이랴!”
“네에, 네! 그럼요!”
뜨거운 기쁨의 현장에 희림도 빠질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휩쓸린 희림이 할머니들을 얼싸안고 콩콩 뛰어댔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세리머니는 할머니들이 기어이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이면서 끝이 났다.
“이게 다 우리 차기 회장님 덕이지!”
“내 말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