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할머니가 인하의 손목을 끌어오며 희림은 급격히 고요해졌다. 흩날리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아봤지만 인하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 멈춰 있었다. 연거푸 다섯 번의 경기를 하고도 그는 숨소리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마에 맺힌 땀이 전부였지만, 희림은 그마저도 온전히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왜, 넌 안 좋아?”
“아, 아니. 좋지. 그럼.”
좋다는 말이 왜 이렇게 모래알마냥 입안에서 굴러다니는지 모를 일이다. 뭔가 부족하다 싶어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세상에 자그마치 무려 글쎄 줄다리기 1등 했는데 안 좋은 사람이 어딨겠어!”
“……그렇긴 하지.”
“…….”
페트병을 기울인 인하가 그대로 목을 축였다. 목에 걸친 수건하며 땀에 젖은 앞머리가 당장이라도 스포츠 화보를 찍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넋을 놓고 그를 보던 희림이 인하와 눈이 마주치자 냉큼 고개를 돌렸다.
“너, 너는 안 좋아?”
“나도 좋아.”
“…….”
“난 원래 좋아했어.”
정확한 목적어 대신 꿀꺽대는 목 넘김 소리가 이어졌다. 어쩐지 볼이 화끈해진 그녀가 괜히 손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혔다. 그나마 무아지경에 빠져 줄을 당긴 탓에 달아오른 얼굴 정도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음.”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올랐지만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만은 고요했다. 먼저 움직이지도, 빠져나가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어느 곳에도 이만한 긴장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깨어질 것 같지 않은 둘만의 긴장감을 깨트린 것은 카메라를 들이댄 연주였다.
“이야, 강인하 넌 네가 주인공인데 왜 뒤에 빠져 있어? 너도 사진 한번 찍어야지.”
“난 그런 거 됐어.”
“에이.”
영양가 없는 할머니들 사진만 잔뜩 찍은 연주가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정하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하 원래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뭘. 그리고 줄다리기는 어차피 다 같이 하는 거니까 할머니들 찍었으면 됐지.”
“으응.”
“희림이 너도 고생 많았겠다. 이거 마셔.”
다정한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 정하는 잊지 않고 희림도 챙겼다. 인하의 팔뚝에 푸른 핏줄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비교적 평화로웠다.
“…….”
아직까지는.
“음, 너네 할머니들 오늘 안에 안 끝나실 거 같은데 우리도 이만 가서 밥이나 먹자.”
“그럴까? 연주 너는 지금 가도 돼?”
“아아, 아직 씨름 남았잖아. 나 저거 찍어야 해. 원래 씨름 천하장사가 1면이라서.”
누가 보면 대단한 특종이라도 되나 싶겠지만, 시골마을 특성상 천하장사라면 단연코 최고의 관심거리였다. 그걸 아는 희림은 벌써부터 시끌벅적한 씨름판을 넘겨다보았다.
“진짜 사람 많긴 하네. 송아지 줘서 그런가?”
“그러니까. 아까 갔다 왔는데 상현이 씨름 나간다고 웃통 까고 있더라고. 희림이 너도 상현이 기억나지?”
“야, 말도 꺼내지 마.”
불쾌한 이름을 듣자마자 희림이 대번에 눈을 찡그렸다. 며칠간 워낙 정신이 없어 잊고 지냈을 뿐이지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들끓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정에 없던 반딧불을 발견해서 인하로부터 그런 심란한 말을 들었던 것도 전부 상현 때문이나 다름이 없다.
“구상현 나한테 다시 한번 걸려보라고 해. 아휴, 쟤한테서 불쌍한 송아지 뺏어 와야 하는데. 크기도 전에 자기 가게에 내다 팔아버릴걸!”
“왜애? 쟤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몰라. 쟤가 지난주에 나 불러다가 고깃집 매니저 하라잖아. 거기까지는 동창이니까 그럴 수 있는데 무슨 지네 집에 며느릿감 선보이는 것마냥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들고……. 음.”
그런데 강인하 어디 갔지.
생각도 하기 싫은 일에 짜증스레 고개를 흔들던 그녀가 순간 허전해진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연주와 정하 역시 느닷없이 자리를 비운 그를 찾아 고개를 들다 입을 쩍 벌렸다.
“아…….”
정확히는 스웨트셔츠를 한 번에 벗어내며 씨름판으로 걸어가는 인하의 구릿빛 상체를 향해.
◇ ◆ ◇
“자아, 여기 봐주세요!”
오늘 조연주는 기자 인생 최고의 날을 맞이했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씨름판에서 그야말로 역동적인 근육으로 상대방을 말뚝처럼 내리꽂는 사진을 건졌으니 아직도 그 흥분을 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의 동네 뒤풀이 잔치까지 따라온 그녀는 할머니들에게도 사진기를 들이밀었다.
“먼저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안온마을 줄다리기 1등의 주역이자 청연군 33회 천하장사! 안온마을에 혜성같이 등장한 주민 강인하 씨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아유, 아니여. 됐어. 나 이런 거 잘 못하는디.”
“에이. 그래도 한 말씀만이요! 이왕이면 주민분들이 축하해주시면 좋죠!”
연주가 못 하겠다 손을 휘젓는 희림의 할머니에게 매달렸다. 과연 한두 번 입을 맞춰온 사이가 아니다 보니 할머니는 금세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목을 풀었다.
“흐흠, 네에. 그럼 이 늙은이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지요. 우리 인하도 어릴 적부터 볼 때마다 참 애가 됐다. 이대로만 크면 아주 큰 인물이 나겠다 하나같이 입을 모았는데 이렇게까지 번듯하게 자라 천하장사까지 됐으니 이 훌륭한 모습을 못 보고 떠난 감나무 집 북안골을 생각하면 내가 눈물이…….”
어휴, 저 인터뷰 중독자 같으니.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희림이 할머니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 안 된다고 하던 사람은 어디 간 건지, 저렇게 차렷 자세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할머니를 보니 기가 찼다. 의기양양 트로피를 들고 있는 정씨 할머니나 할 말도 없으면서 우르르 몰려선 다른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는 건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희림 네가 너네 할머니 닮았던 거구나.”
“……그거 욕이지?”
그녀가 넌지시 고개를 기울이는 인하를 흘겼다. 아직도 팔뚝에 남아 있는 모래를 보고 피식 웃으며 털어주려 했지만, 손이 닿자마자 푸른 핏줄이 크게 움칠거렸다.
“아…….”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희림이 아프도록 입안을 질근거렸다. 강줄기도 메마른 이 동네에서 젊은 남자 핏줄을 다 구경하다니, 평소라면 계 탔다고 즐거워했겠지만 상대가 강인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뒤풀이 장소까지 따라온 것 자체가 의외였다.
왜 씨름판까지 뛰어들었는지는 더욱 모르겠고.
“…….”
차라리 옆에 누구라도 앉아주면 좋겠건만.
마당에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막상 제 옆에는 인하뿐이다. 지겹도록 들러붙던 할머니들마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리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인하와 함께 있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저기, 있잖아. 사실은 나 오늘 너 안 올 줄 알았어.”
술잔을 채운 그녀가 자연스레 그에게도 하나 건넸다. 전력이든 뭐든 인하가 와서 큰 보탬이 된 것은 사실이니 최소한 오늘 이 자리만큼은 흥겨워야 했다. 괜히 높여보는 음성의 끝자락이 들떴다.
“연주가 너 못 올 거 같다고 그래서.”
“그때는 네가 온단 말 없었으니까.”
“아…….”
그렇구나. 이번에도 그런 거구나.
의미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그의 잔을 가득 채운 술이 이내 옆 잔으로 쪼르르 흘러내렸다. 건배조차 잊어버린 희림이 제 몫의 술잔을 들어올렸다.
‘뭐야.’
이번에도 착각인 걸까? 아니, 착각이 아니라면?
안 그래도 가득 찬 머릿속이 시시각각 술잔처럼 차올랐다. 이러다 넘치면 어떻게 될지 감당을 할 수가 없다. 마당 중앙에 피워놓은 모닥불만 집요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금 따른 술잔을 한 번에 비워냈다.
“하하, 진짜 웃긴다.”
“…….”
“하하하. 너무 웃기네 정말.”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갈수록 웃음만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 큰 막걸리 주전자를 모두 비우고 눈앞이 핑 돌기 직전이 되어서야 다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지탱했다.
“괜찮아?”
“아니, 나 안 괜찮은 거 같아.”
술기운을 빌린 게 아니라 진짜 술에 취해버렸다. 옆자리에서 저렇게 죽일 듯 절 바라보는 건 차기 회장님 강인하, 그 외의 다른 모든 사실은 깜깜했다. 배시시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희림이 무슨 생각인지 그의 곁에 은근슬쩍 당겨 앉았다.
“저기, 사실은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뭐?”
“며칠 전부터 꼭 말하고 싶었거든.”
반쯤 풀린 눈빛, 들썩이는 어깨.
이미 고삐가 풀린 희림은 안달복달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한숨을 쉰 인하가 아프도록 이를 깨물었다.
“너 또 지난번처럼 취해서 회장님 어쩌고 할 거면 나 정말,”
“너도 잘생겼다구.”
“…….”
멋대로 그의 귓가에 동그랗게 만 손을 댄 희림의 웃음기 어린 숨소리가 인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또 그의 몸이 얼마나 꿈틀거리는지, 제 몸이 더 흔들리다 보니 미처 알지 못했다.
“한희림 너.”
“근데 있잖아. 난 너한테 화가 안 나.”
“…….”
서서히 고개를 떼어낸 희림이 그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강인하. 정말 넌 봐도 봐도 화가 나질 않는다며, 그녀가 배시시 끌어안은 무릎에다 머리를 기대었다.
“나도 똑같이 화내고 싶은데……. 화가 안 나는 걸 어떡해.”
“…….”
무릎에 머리가 닿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희림의 눈이 까무룩 감겼다. 지극히 낮은 한숨으로 스스로를 다스려보던 인하가 그녀를 지탱하듯 몸을 당겼다. 차마 모래판 위로 던져버릴 수도 없는 존재의 뜨거움이 그로 하여금 이마를 파묻게 했다.
“후우……. 너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 재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