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서울서 오늘 내려오는 거야?”
“응. 와서 미리 동네 쭉 둘러본다고 했거든. 이왕이면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자료도 좀 챙겨주고 잘 보이면 좋지.”
“그럼 그 작가라는 사람은?”
“그건 모르지. 나도 그냥 갑자기 허락해줬다는 소리만 들어서.”
그러고 보면 정말 고마운 분이긴 하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작가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진행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나?”
“그럴 리 있냐, 네 인생이.”
“…….”
기어이 한 대 맞겠다 설치는 연주에게 눈을 부릅뜬 희림이 쌩하게 돌아섰다. 하지만 막상 돌아선 복도에 누군가를 보자 저절로 온 얼굴에서 힘이 풀려버렸다.
“저거 뭐야.”
왜 저 얼굴이, 저렇게, 아니 여기에.
차라리 실물이면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을 텐데, 벽 한 면에 커다랗게 걸린 인하의 사진을 보고 희림은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이 사진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다. 며칠 전 씨름판을 뒤흔들었던 바로 그 격동과 야성의 사진이 군청의 벽면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조연주, 너 돌았냐? 저걸 왜 여기 걸어놔!”
“아아, 진짜 잘 나왔지 않아?”
“……저거 강인하가 알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죽고 싶지!”
“뭐래. 다 허락받은 거거든!”
“…….”
얘는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충격적 광경에 이어진 충격적 소식에 희림은 잠시 어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강인하가 그럴 리 없다고. 안 그래도 눈에 띄는 것을 지긋지긋해하던 그였으니, 사람 앞에 드러나는 일에는 더욱 정색하던 놈이다. 물론 최근 체육대회에서 일탈을 하긴 했지만 저렇게 두고두고 남는 기록을 순순히 용납할 성격이 아니었다.
“지, 진짜 허락을 했다고? 강인하가?”
“그렇다니까. 그뿐만 아니라…… 됐다. 그냥.”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하던 연주가 입을 꾹 닫았다. 다행히 그의 압도적인 사진에 넋이 나가버린 희림은 더 파고들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그 또렷하고 자신감 넘치던 눈은 어느새 힘이 풀려 인하의 얼굴에서 떼어내지 못했다.
“청연에도 이런 인물이 다 있다고 군수님이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시는데.”
“…….”
이 얼굴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니.
희림의 입술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버석거렸다. 씨름판에서 돌아서는 들끓는 그의 눈빛이 꼭 제 앞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피할 수도 없는 그 강한 눈빛 앞에 희림이 천천히 눈을 깜빡여보았다. 언제라도 제게 말을 걸어올 듯, 사진 속에서조차 강렬한 남자였다.
“……그런데 내 사진은 또 왜 찍는 건데.”
“아하하.”
그의 커다란 얼굴에 압도되듯 고요해졌던 희림이 소심하게 찰칵거리는 연주에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여튼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인다 싶더니, 희림이 얼른 치우라며 손을 흔들었다.
“너 또 농민일보에 내 사진 넣기만 하면 진짜,”
“아냐! 진짜 아냐! 나 못 믿어?”
“……믿겠냐.”
“어쨌든 진짜 아니라니까. 이번엔 정말 그런 거 아니라구!”
머쓱해하며 카메라를 뒤로 숨긴 연주가 결백을 주장했다. 어차피 말로 해서 들을 인간도 아닌지라 희림도 두 손을 들었다. 사실 여기선 제가 뭘 하든 강인하가 전부 지켜보는 기분이라 뺨이 따끔거렸다.
“어쨌든 너 내가 주목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응, 응!”
“하여튼 대답은.”
피식 웃은 그녀의 뒤에서부터 이제는 안전하다 싶은 연주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찍은 당사자가 봐도 감탄이 날 만한 인물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나 그래도 이번에 진짜 소원 풀었어.”
“소원?”
“왜 우리 3학년 때 다 같이 학교에 있는 목련나무에 소원 매달기 행사 했었잖아. 기억 안 나?”
“…….”
안 날 리가.
그리 크지도 않은 학교의 유구한 전통을 잊을 수는 없다. 3학년이 되는 첫날, 교정의 목련나무에 소원을 비는 줄이 길게 늘어졌다. 주로 대학 진학을 기도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간혹 연주처럼 큰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기는 했다.
“나 참. 그래서 네 소원이 강인하 사진 찍는 거였어?”
“아니. 그냥…… 진짜 사진작가 되어보는 거.”
“…….”
“나도 한 번쯤은 그래보고 싶어서.”
한때는 로이터 통신의 기자가 될 거라 했던 연주의 웃음이 이 순간에는 그다지 장난스럽지가 않았다. 그 마음을 잘 아는 희림이 으이구, 두 배로 장난스레 팔꿈치를 찔렀다.
“바보야. 그거 다 선생님들 농간이야. 소원 무조건 이뤄주니 마니 전설의 나무 해가면서 우리 어떻게든 붙들어놓고 졸업시켜보려고 그런 거라고.”
“그런가?”
“당연하지. 애들 싹 다 당한 거야.”
“그럼 한희림 너는 처음부터 안 빌었겠네?”
“……그거야 뭐.”
고개를 갸웃하는 연주를 두고 희림이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더욱 불편해졌다. 사진을 등지며 돌아서는 그녀에게 연주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고 보니 인하는 소원 못 빌었겠다. 갑자기 훌쩍 가버렸으니까.”
“음, 그렇겠지.”
주춤하던 희림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는데도 마음이 급해졌다. 점점 빨라지는 그녀의 발걸음 뒤로 연주의 한숨만이 맴돌았다.
“그런데 인하 쟤는 너 서울로 가는 거 아직 모르겠구나.”
◇ ◆ ◇
“너도 소원 빌 거야?”
오늘도 한 번에 가는 법이 없이 느지막이 따라나서는 인하에게 물어보았다. 그나마 교복이라도 입고 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혹시나 도망이라도 갈까 감시를 하려면 옆에 꼭 붙어야만 했다.
“왜 있잖아. 목련나무에 소원 비는 거.”
“나무가 뭐?”
“아아, 넌 모르겠구나. 학교 후문 쪽에 커다란 목련나무 있는데 거기다가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고 그러거든. 목련꽃 필 때랑 딱 맞아서 봄기운을 그대로 받아서는…….”
안다. 유치한 거.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말을 걸어야 했다. 대입을 앞두게 되는 고등학생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런 미신이라도 간절해질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훅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인하에게 뭐라도 남아 있을 구실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안 믿으니까 그만두라고 하면 ‘넌 꿈도 희망도 없냐’ 받아칠 준비도 미리 해두었다. 그렇지만 웬일로 조용히 경청하던 인하는 처음으로 질문이라는 걸 했다.
“그래서 한희림 넌 뭘 빌 건데?”
“…….”
아직 채 피지 않은 건너편의 꽃나무를 바라보던 희림이 눈을 내렸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데, 아직 올망졸망한 봉오리조차 맺히지 않은 지금은 뭐든 믿기질 않았다.
지금 제게는 필지 안 필지도 모르는 꽃 대신 눈에 확실히 보이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 공원 쉼터의 야외 테이블에 앉은 그녀가 부랴부랴 가져온 자료를 펼쳤다.
“그러니까 이건…….”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연습을 했으니 외우고도 남았지만 어김없이 브로슈어를 다시 훑었다. 그도 아니면 약속 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지금, 초조함을 달랠 방법이 없다.
“…….”
그래도 너무 늦지 않나.
망설이던 희림이 휴대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혹시나 싶어 시간과 장소를 다시 확인해봤지만 변한 것은 없다. 청연을 가볍게 둘러보고 싶다는 이에게서 연락이 없자 그녀의 마음은 불안해졌다.
“후우.”
시간이 지날수록 꽃 대신 제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제가 먼저 전화를 할까 싶다가도 너무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그러지도 못했다.
그래, 일단 내가 을이니까.
제 입장을 잘 아는 희림이 쓴웃음으로 재킷의 깃을 세워보았다. 오늘따라 안 부리던 멋을 내느라 아직은 찬 공기가 얇은 옷감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곧 봄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다. 그렇게 멈춰 있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어어, 여보세요.”
화면에 인하의 이름이 뜨는데도 처음으로 실망하고 말았다. 입김을 참듯 이를 꼭 문 희림이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다.
“어디기는. 나와 있지.”
얼 것 같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전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서서히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다. 왜 이렇게 늦는 거냐는 그의 말에도 대답 대신 싱거운 웃음만 흘렸다.
“당연히 바쁘니까 그런 거지 뭘 물어.”
믿든 안 믿든 제가 할 말은 그뿐이다. 미주알고주알 말해서 걱정을 보태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제가 그에게 떠넘긴 것들이 많으니 초봄의 추위까지 나누어 지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상대방의 전화를 떠올린 희림이 얼른 끊자 서둘렀다.
“하여튼 난 잘 있으니까 너도 네 일이나 해. 알았지? 응, 그래. 알았다고? 응. 안녕. 또 봐.”
그래, 이렇게 툴툴대야 너답지.
홀로 빠르게 주절거리던 그녀가 인하의 퉁명한 말소리에 웃음을 흘렸다. 아마 저 성격에 멋대로 전화를 끊었다 불만이 가득하겠지만 지금은 선약이 먼저다. 이를 다시 사리문 그녀가 꽁꽁 언 발로 서성거렸다. 연이어 울리는 벨 소리에 보나마나 강인하일 거라 전화를 들었지만 화면을 보자마자 표정이 달라졌다.
“아…… 네에.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