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입이 언 탓인지 인사 한마디도 매끄럽지가 않았다. 그래도 기다리던 전화이니만큼 희림은 움츠려 있던 자세부터 달라졌다. 혹시나 근처에 와 있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다시 들려오는 말소리에 집중했다.
“네, 안 그래도 막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는데…….아, 그러세요?”
생각지 못한 소식에 말문이 막혔다. 빨리 대답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차게 굳은 입술이 쉽게 움직이질 않았다. 수화기를 따라 이어지는 상대방의 말을 차분히 듣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길 건너편의 꽃나무로 향했다.
여전히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무에게로.
◇ ◆ ◇
“왜, 희림이 늦는데?”
“아, 네. 할머님.”
휴대전화를 사납게 노려보던 인하가 할머니의 말소리에 얼른 고개를 내렸다. 그가 오자마자 쟁반 한가득 주전부리를 내온 할머니는 그러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어이구, 할머님은 또 뭐여. 희림이 친구면 나한테두 손자지. 그냥 할머니라고 혀.”
“네. 그럴게요. 할머니.”
인하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물론 손자에서 멈출 마음은 없지만 일단 이 정도 환대라니 시작이 좋다. 그가 쟁반을 대신 받아 들자 할머니는 으차차, 굽어 있던 허리를 폈다.
“하여튼 인하 네가 우리 집에 먼저 놀러 와주고 얼마나 반가운지 몰러.”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감사는 내가 해야지. 인하 네 덕에 우리 마을이 1등을 다 해보고!”
아직도 그 흥분이 가시지 않은 할머니는 주름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모르긴 모르지만 그날 일로 강인하는 영원한 안온마을 프리패스가 된 모양이었다. 먹을거리든 쉬어 갈 자리든 무엇 하나 아끼는 것이 없었다.
“근데 희림이 이놈의 기집애는 아무리 바깥일 한다지만 빨리빨리 좀 다닐 것이지.”
“그러게 말……, 네.”
“하여튼 얘가 어릴 때부터 투덜투덜거려도 할 건 또 잘혀. 내 손녀라서가 아니라.”
“알죠.”
인하의 입가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언제고 그녀가 어땠는지,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주체할 수 없이 피식거리고 마는 그의 웃음에 할머니가 신기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세월이 좋네. 인하 네가 그렇게 웃는 것을 다 보고.”
“……음.”
이제 와 웃음을 참기도 늦은지라 그가 느긋하게 물잔을 들어올렸다. 대충 몸에 좋다는 것들을 모두 넣은 듯한 복잡하고도 익숙한 향도 잘 참아냈다.
“일전에 희림이한테 들어보니까 네가 서울에서 엄청 크게 성공했다고 그러던디.”
“걔가 그래요?”
“응. 어마어마하게 성공했다고 그래서. 티는 안 내도 부럽고 그런가 벼.”
“아니에요. 저 아직 멀었어요.”
인하는 희림이 잘못 알고 있다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냐며 눈을 크게 뜨는 할머니에게 입가를 올렸다.
“저 아직 성공 못 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될 때까지 해보려고요.”
“아이고!”
우리 천하장사가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가 벼.
할머니가 무엇 하나 부족할 거 없어 보이는 그에게 ‘이해는 안 가지만 이해해주는 척’ 수긍해주었다. 그 표정마저 손녀와 꼭 닮은지라 인하는 웃음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그 어디로 시선을 두든 모두 그녀의 흔적이 묻어 있는지라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집이었다.
해가 모두 지고도 따스한 마당과 사람의 온기로 반질거리는 대청마루, 기둥마다 걸려 있는 희림의 상장과 임명장이 빼곡했다. 심지어 촐랑이듯 꼬리를 흔들어대는 새 식구에게조차 그녀의 손길이 선연히 느껴졌다.
“저것도 희림이죠?”
“잉, 꽃순이!”
아이고 이쁜 내 새끼!
알아서 추임새까지 넣은 할머니의 눈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송아지 대신 목에 꼭 매인 앙증맞은 목도리에 향했다.
“저거 아직 밤 되면 아직 춥다고 희림이가 매어놓은 거여. 처음엔 저런 애를 얻다가 키우려고 그러냐 투덜거리더니 다음 날 뚝딱 창고 치워서 집부터 만들어놓구.”
“……네. 정말 그랬을 것 같네요.”
이제는 정말 웃음을 참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멈춰 있던 그의 걸음이 천천히 송아지에게 다가가자 할머니는 느닷없이 하품을 했다.
“하암, 난 늙으니까 잠이 와서 안 되겄네. 희림이 올 때까지 기다릴 거여?”
“네. 그러려고요.”
“오믄 네가 한 소리 좀 해줘. 빨리빨리 좀 다니라고.”
“…….”
차마 그녀를 야단치라는 말이라 대답을 못 했지만 대신 보기 드문 미소로 할머니의 잠자리를 배웅했다.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한 걸음을 더 다가선 그가 송아지의 목에 손을 올려보았다. 음매에, 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제 목도리를 사수하듯 몸을 비틀었지만 애초에 그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야, 한꽃순.
너 참 부럽다고.
“……네. 박 비서님.”
그래서인지 늘 받는 사무적인 전화도 오늘만큼은 선선한 웃음을 머금었다. 다만 그 사실을 알아채기에는 상대가 매우 다급한 상황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 아뇨,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제작사 쪽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일정을 변경하는 바람에 이야기 좀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변경이라니요?”
언제 웃은 적이 있었냐는 듯, 단번에 그의 오른쪽 눈썹이 가팔라졌다. 잡고 있던 꽃순이의 목도리에서도 손을 떼어냈다.
“오늘 여기로 온다고 들었는데요?”
- 원래는 그랬는데 그쪽 윗선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일정을 좀 미루게 됐답니다. 저희 쪽에도 연락을 남겼는데 하필 회장님 보고 받던 중이라 저도 지금에야 연락을 받았네요.
“…….”
- 아무래도 일 좀 마무리되면 1, 2주 더 있다가 갈 모양이더라고요.
“벌써부터 나가서 기다리는 사람 있었을 텐데.”
인하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순식간에 서늘해진 그의 눈매에 꽃순이가 겁을 먹은 듯 주춤주춤 몸을 비틀었다.
“지금이 벌써 몇 시간째인데 그렇게 무책임하게!”
- 아아, 그래서 그쪽에서도 방금 마을 분께 연락을 드렸답니다. 워낙 급한 일부터 처리하느라 서로서로 연락을 한 줄 알았다지 뭡니까. 그리고 청연 쪽에서도 먼저 연락이 없다 보니까 으레 소식을 전해 들었겠거니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요.”
휴대전화를 부여잡은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사실 이제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드문드문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말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 걱정 마십시오. 늦게나마 연락 안 간 거 알고 전화하니까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있었으니 아무 신경 쓰지 마시고 다음에 오라 아주 친절하게…….
“끊겠습니다.”
좁은 시골집으로 막 들어서는 발소리에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와 있냐는 듯 커다란 희림의 눈에도 인하는 웃음기 하나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희림.”
“어…… 어? 뭐야. 너 언제부터 온 거야.”
오랜 추위에 달달거리는 그녀의 이 부딪히는 소리에 그의 인상이 더욱 사나워졌다. 얇은 옷차림도, 누구에게 보이려고 저리 공을 들였을지 모를 화장도 마찬가지로 화가 났지만 역시나 가장 열불이 치미는 것은 이 상황에도 싱긋 웃고 마는 그녀의 미소였다.
“할머니는 벌써 주무시나 보네. 하긴, 원래 주무실 시간 되긴 했으니까.”
“너는?”
“나는…… 뭘 물어. 지금 들어온 거 보면 모르니?”
으이그, 팔을 가볍게 문지른 그녀가 그를 향해 머뭇머뭇 다가왔다. 공연히 꽃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도 그 따스한 온기에 녹아내릴 듯 몸을 더 바짝 붙였다.
“으으, 춥다. 어쨌든 너도 오면 온다고 미리 말이나 하지.”
“너는 나한테 전부 말 다 했고?”
“……강인하.”
“이제까지 혼자 밖에서 뭐 하고 온 건데.”
“…….”
무언가 알고 있다는, 그의 단단해진 눈빛에 희림이 천천히 몸을 세웠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주저하던 그녀가 못내 다시 웃고 말았다.
“에이 뭐가 그렇게 심각해. 그냥…… 오늘 제작사에 일이 좀 생겨서 늦어가지고 다음에 다시 보기로 했어. 원래 큰일 하다 보면 한 번씩 그러기도 하는 거니까.”
“……그게 다야?”
“당연히 아니지. 혹시나 거기서 아예 취소해버리면 어쩌나 했는데 그건 아니래. 진짜 확실하대!”
희림은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듯 한껏 상기된 음성으로 조잘거렸다.
“조만간 꼭 다시 온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혹시 알아? 이번 일로 미안해서 더 신경 써서 진행해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는 뭐.”
“이 정도라고?”
“……왜 화를 내고 그래.”
그제야 이상하다 싶은 희림이 인하를 빤히 응시했다. 추워 죽겠다며 겨우 달려왔는데, 인하의 서느런 눈에 다시 얼어붙을 것 같다.
“아까부터 너 왜 자꾸 나한테,”
“넌 그걸 몰라서 물어?”
“…….”
인하의 커다란 몸이 바짝 다가섰다. 군청 복도에서도 그의 날 선 눈빛을 보았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물로 대하는 느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낮게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푸른 불꽃을 연상케 했다.
“멋대로 약속 어긴 인간들한테 화 한번 안 내고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애초에 네가 이렇게 나설 만한 일도 아니잖아! 도대체 네가 왜 이런 것까지!”
“너, 너 때문에 그랬어.”
“……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하던 그가 주춤하는 새, 희림이 힘겹게 그를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강인하의 주체할 수 없는 열기에 눈가까지 뜨겁게 달아오를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