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나저나 누나는 진짜 철의 여인이다!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냐!”
“맞아! 나랑 얘랑은 서울에서부터 통곡하고 왔는데 누나는 진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와아, 정말 역시 회장님은 다르다니까?”
“한우림, 한수림.”
“응? 왜애?”
대충 그만하라는 누나의 경고를 곧이곧대로 들어먹을 남동생들이 아니다. 할머니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쌍둥이들은 아주 제 세상인 것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맞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태워다 줬다는 사람이 누구야? 옆에서 목소리 들리는 거 보니까 남자 같던데?”
“…….”
둘이서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엄마와 아빠까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근처 큰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반쯤 정신이 나가 소식을 전했으니 정확한 것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러게. 정하야 처음부터 면허도 안 땄고, 그러면 누구지?”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감사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혹시라도 아직 여기 계시면…….”
“그만.”
“…….”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 나설 것 같은 엄마 아빠를 희림이 가로막았다. 멋모르고 기웃거리는 쌍둥이 동생들에게도 보다 확실히 해두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너넨 이것만 알면 돼.”
“응? 뭘 말이야, 누나?”
“내가 할머니 구했으니까 우리 집 재산 다 내 거야.”
“…….”
“엄마 아빠도 알아둬. 난 입으로만 해주는 칭찬 질색이야. 엄마 아빠가 바빠서 못 하는 일 내가 한 거니까 난 전부 다 악착같이 챙겨 받을 거라고. 엄마 아빠 가게도 다 내 거니까 다들 양심이 있으면 꿈도 꾸지 마. 알았어?”
이왕 철의 여인이 되기로 했으니 피도 눈물도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던 쌍둥이가 이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웃음을 지어보았다.
“에이, 누나 왜 그래. 누가 보면 누나가 돈 때문에 할머니랑 있는 줄 알겠다!”
“맞는데.”
“…….”
“내가…… 딱 그 정도밖에 못 했다고.”
이를 꾹 깨문 그녀의 흐릿한 대답을 따라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주먹을 쥐고 버텼다. 이런다고 전부 다 제 재산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더는 귀 따갑게 굴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그를 찾아 나서지도 못할 거고.
“……희, 희림아. 너도 여기서 눈도 좀 붙이고 해야지 어디 나가?”
“응. 공증 받으러.”
“…….”
순식간에 적막에 빠진 가족들을 뒤로하고 희림이 문을 열고 나섰다. 처음 오는 병원의 다른 모든 것은 다 하얗게 흐려졌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앉아 있었던 응급실 앞 까만 의자만은 기억했다. 온몸에서 힘이 풀려 벽을 짚은 그녀가 겨우겨우 그곳까지 찾아갔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흐으윽.”
대신 참고 참은 눈물이 빈자리를 채웠다. 눈물짓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응급실 앞인지라 눈에 띌 것도 없었지만, 유령 같은 희림의 눈물은 유독 이목을 끌었다. 마침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딱하게 혀를 차며 손수건을 꺼내어주자 부끄러운 것도 없이 그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버렸다.
“흐으윽, ……너무 미안해요. 내가 너무너무 미안해.”
◇ ◆ ◇
“가, 강인하. 나 어떡해.”
제 팔을 잡고서 가까스로 지탱하는 그녀는 언제든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손 하나만 닿아도 움찔하던 그녀가 그리 몸을 맡긴 것이 기꺼워야 했지만, 그 순간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저와 농구를 하던 정하가 들어선 수술실 위에서 초록빛 불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흐으윽. 저, 정하가. 왜 정하가…….”
“한희림. 정신 차려.”
“정하 잘못되면……. 정하가 만약에, 마, 만약에…… 나는 그러면……. 전부 나 때문에…….”
언제나 웃음기 가득하던 활기찬 입술이 퍼렇게 죽어 있었다. 초점 잃은 눈빛이 정처 없이 맴돌았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제 손등 위로 떨어지던 순간, 그는 태어나 처음 제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력함, 그 치가 떨리고 지긋지긋하던 감정 역시.
“차라도 들지 그러냐.”
“……아버지.”
생각에 잠겨 있던 인하가 저를 부르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새벽녘에 내려와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저와 비슷할 텐데, 아버지는 언제 봐도 굳건했다. 그제야 흐트러짐 하나 없는 양복 차림을 바라보자 강 회장은 괜히 헛기침했다.
“흐흠, 누굴 만날지도 모르는데 아무렇게나 올 수는 없지 않느냐.”
“네.”
역시나 아버지다운 면모였으니 놀라울 것도 없었다. 언제나 사업을 최우선으로 두는 분이니만큼 철두철미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다만 그런 분이 왜 아직까지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제 집에 같이 오셨는지를 모를 뿐이다.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긴 하지만.
“……박 비서한테 듣기는 했는데 집이 너무 작은 거 아니냐?”
“시간이 촉박했으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게 불편할 텐데.”
“외할머니 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작고 불편했어요. 물론 안 가보셨으니 모르시겠지만.”
“…….”
무난하게 시작되나 싶었던 대화가 결국은 적막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인하가 한 손으로 열 오른 이마를 받쳤다. 어머니가 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로서도 처갓집 생계를 책임질 이유는 없다. 아니, 그런 것치고 할 만큼 했을지도 모른다.
“……인하 너도 알겠지만, 네 외할머니가 여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하셨다.”
“네.”
할머니의 뜻이 어땠는지도 제가 모를 리 없다. 이제 와 아버지를 잡고 뭘 하는 건가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인하가 열 오른 뜨거운 한숨을 삼키자 강 회장은 흠칫 손을 내밀었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픈 게냐? 차라리 너도 아까 병원에 간 김에 진찰이라도 받았어야지!”
“아뇨. 괜찮아요.”
“…….”
이마에 손이 닿기도 전에 인하가 몸을 뒤로 물렸다. 다정하게 이마를 짚어준다든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부자 관계도 아니었다. 이렇게 회사가 아닌 곳에서 서로 마주 앉아본 것이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이만 돌아가보세요. 서울에서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 아니. 뭐. 거기야 매일 보는데.”
“…….”
“그래서 말인데. 인후가 제 형이 많이 궁금한 모양이더구나. 자꾸 네 얘기만 묻고 그래서. 조만간 한번 얼굴이라도 보면,”
“뭐 하러요.”
가볍게 거절했지만 그리 가벼운 문제도 아니었다. 스무 살에 가깝게 나이가 차이 나는 이복동생이 편할 이가 몇이나 된다고. 아버지가 내심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마저도 제 소관은 아니었다.
애초에 서로 줄 거 주고 내어줄 거 내어주는, 비즈니스나 다름없는 관계 아닌가.
회사밖에 모르던 가장이 느지막이 어린 새부인과 늦둥이까지 얻었으니 그건 그대로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비록 저까지 끼어들어 화목한 척 맏아들 노릇을 할 마음은 없지만,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했다.
지금은.
“어쨌든 여기까지 내려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 한 통만 해주셔도 됐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그 아가씨가 전에 그 애가 맞나?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만 잠깐 봤는데 아주 옛날 모습 그대로…….”
“이번 빚은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아버지의 말이라면 대부분 적당히 듣는 척 해왔던 인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까진 알 필요가 없다는, 나름의 선 긋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강 회장이 씁쓸하게 타박했다.
“빚이라니, 꼭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냐? 우리가 그 정도도 못 해줄 사이가……. 음. 아니다.”
“…….”
어색한 침묵이 부자 사이를 맴돌았다.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닌, 오랜 시간 쌓여 있던 무언가가 쉽게 털어지질 않았다. 고심하던 강 회장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예전 일은…… 네 미래를 위해서도 그게 훨씬 더 좋을 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러다 보니.”
“괜찮아요. 서로 합의한 약속이었으니까요.”
“인하야.”
“저도 아버지 뜻대로 미국 다녀오자마자 회사에서 일했고 아버지도 제가 못 하는 일 해주셨으니 불만 없습니다.”
적막을 끊고 시작된 그의 말에 오히려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달리 말해보려 해도 그것이 사실이다. 서로가 원하는 걸 주고받았으니 누구도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렇게 뒤늦게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눈길은, 불편할 뿐이다.
“……그래. 잘 알겠다.”
“…….”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뺏었구나. 하기야, 몇 년 만에 제대로 된 첫 휴가니까.”
더는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은 강 회장이 양복 재킷을 들며 일어섰다. 원래 별다른 말이 없는 데면데면한 부자 관계이니만큼, 언제 무슨 말을 꺼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나저나 박 비서 말로는 카페로 짓는다고 하던데 뭐 하러 번거롭게. 그럴 거라면 부지도 넓은데 차라리 리조트로 가면 후에 넘기거나 전문가한테 맡기기도 쉽지 않겠느냐?”
“알아서 하겠습니다.”
“1년간은 뭘 하든 아무 소리 않기로 했으니 반대야 않겠지만 나는 그저 너 회사 돌아올 때 정리를 하기 힘들어질까 봐.”
주절주절, 강 회장답지 않은 혼잣말이 길어졌다. 회사 일로는 안 되겠다 싶으니 이제는 새로 지은 집을 두고도 이야기가 길어졌다. 섀시가 너무 얇다느니, 바닥이 너무 차갑니 흠잡는 모습을 인하가 무심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