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80)

38화

툭, 타던 차와 커피까지 내려놓은 희림이 쌀쌀맞게 재킷을 챙겨 들었다. 앞으로 어디 한번 잘 살아보시라는 듯, 희림이 곁눈으로 그들을 훑으며 나가버리자 그녀의 기에 눌려 있던 회원들이 어리벙벙해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벌써 갔다 왔는디.”

◇ ◆ ◇

봄 감기로 앓아누운 지 사흘 차, 인하는 청연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희림이 곧 안온마을이고, 안온마을은 곧 한희림이다. 특별히 이 지역에만 나눔과 걱정에 대한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지난 며칠 그는 태어나 가장 많은 방문객을 맞이했다.

시작은 정씨 할머니였다.

떡을 좀 쪘으니 먹어보라 가져왔다가 그의 해쓱한 얼굴을 보고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크게 비틀거렸다. 무심한 당신을 얼마나 탓하는지, 인하는 괜찮다는 말을 열 번쯤 한 다음 다른 분들께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 비밀로 해달라 부탁했다. 손가락까지 걸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씨 할머니를, 인하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정확히 삼십 분 후, 그의 집에는 온갖 식량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잣죽, 호박죽, 깨죽, 쇠고기죽 등등 죽이란 죽은 모두 진상되었으며 과일과 각종 이름 모를 차, 그리고 각 집마다 보유한 전통 처방들도 곁들어졌다. 대체 이걸 다 어쩌라고 그러시나 한마디쯤 할 만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마을에서 이곳까지, 노인들의 걸음으로 달려오는 최단 시간이 딱 삼십 분이라는 것을 알아서.

“…….”

그래도 많긴 많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인하가 테이블에 넘치는 음식을 보고 빈 목젖을 울렸다. 이마를 가볍게 짚자 아직도 미지근한 열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그다지 아파본 적이 없다 보니 이런 증상 하나하나가 낯설기 짝이 없다.

그나마 그제보다는 어제가, 또 어제보다는 오늘이 나아졌으니 내일쯤이면 얼추 낫지 않을까 짐작했다. 중단시켰던 공사도 다시 시작해야 하고 남은 일들도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도……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인하야. 괜찮겠지? 정말 괜찮겠지?”

제게 기대어 희림이 글썽거리던 눈물이 썼다. 맛을 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럴 때일수록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막상 그녀의 눈물을 보자 가슴이 굳어버렸다. 10년 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변한 것이 없는 스스로에게 한숨이 났다.

만약 다시 한번 기회가 있다면.

물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제가 조금 더 침착하고 어른스러웠다면, 조금은 저를 달리 보지 않았을지. 서두르지 않겠다 마음먹고도 아직 남은 미열 때문인지 가슴이 쉽사리 달아올랐다.

“…….”

어김없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인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몸을 세웠다. 이번엔 또 누가 오셨을지, 마을 사람들 중 빠진 분이 누구 있나 생각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자신은 그저 감사하게, 최대한 공경을 담아 이제 다 괜찮아졌으니 더 이상 걱정은…….

“강인하!”

“…….”

지금이라도 안경을 가져와야 하는 건가.

잠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인하의 굵은 목젖이 아주 천천히 넘어갔다. 약간은 흐릿한 시야 속의 그녀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안경을 가져오는 사이에 없어져버릴까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몇 초가 흘러갔다. 

“강인하, 너 괜찮아?”

“…….”

설령 열에 들떠 보는 환상이라 해도 좋았다. 숨이 차는지 살짝 굽힌 무릎을 손으로 짚은 채 희림이 격하게 가슴을 들썩거렸다.

“정하가 그러더라고. 너 며칠 전부터 아파서 꼼짝도 못 한다고.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강인하!”

“잠시만.”

저도 모르게 내밀어진 인하의 한 손이 스스럼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넘겼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사이 느껴지는 선선한 봄바람에 그의 초점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진짜 맞구나.”

“바, 바보같이 그게 무슨 소리야.”

깜짝 놀라 굳어 있던 희림이 뒤늦게 붉어진 얼굴을 가리듯 그의 손을 치워냈다. 제 뺨을 스쳐 지나는 손끝 뜨거운 체온에 가슴이 아릿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이곳까지 오며 하고자 했던 말들이 부질없이 흩어졌다.

“아…… 그러니까 내가 왜 왔냐면, 너 괜찮은가 해서.”

“응.”

“너 할머니 병원 데려가준 날에도 아팠다면서. 내가 바보같이 우리 할머니한테만 정신이 나가서…….”

“그게 다야?”

전에도 그랬지만, 인하가 이렇게 물을 땐 그저 막막했다. 마음 같아선 뭐든 해주고 싶은데 그리 말하지도 못한다. 제 마음 하나 빼고는 다 줄 수 있다는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다.

“나 병원에서 나오면 더 열심히 도와줄게. 너 하는 거 다 도와줄게.”

“……그건 전에도 그러기로 했잖아.”

“그, 그렇지.”

울상이 된 희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얘는 아픈데도 이런 데는 참 철저하구나. 사람이 이래야 성공하는 건가 싶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더 해줄 만한 게 없다. 점점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손끝 못지않게 흔들렸다.

“……미안해. 그래도 너 괜찮은 거 같아서,”

“아니. 안 괜찮아.”

“강인하!”

머뭇거리며 돌아서던 그녀의 뒤에서부터 인하의 팔이 단단히 감겨왔다. 예전에도 귓가에 뜨겁게 닿던 숨이 이제는 아주 녹아버릴 것만 같다. 하나처럼 이어지는 그의 커다란 심장 소리가 희림의 두 발목을 묶어버렸다.

“나 죽을 거 같아. 감기 아니라도.”

◇ ◆ ◇

시골의 밤은 도시와는 달랐다. 서서히 해가 저물며 하나둘 빌딩에 불이 켜지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곳과는 많이도 달랐다. 정말로 딱 한순간, 아차 방심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뒤덮여버린다. 

강인하의 집도 다르지 않았다. 아픈 그에게 방심해 주저하는 순간, 이미 인하의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하던 인하 역시 한순간에 중병 환자가 되어버렸다.

“나 아파. 혼자 놔두고 가지 말라고.”

“……어어.”

이게 진짜 어떻게 된 건지.

희림이 그에게 잡힌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몸에 열기가 가득 느껴지는 걸 보면 아픈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저를 붙잡아둔 힘은 조금도 빠지질 않았다. 느닷없는 간병인 노릇은 할머니를 돌보며 제법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산이었다.

“……왜?”

쳐다보기만 해도 입이 마르고, 눈이 뻑뻑하고, 숨결이 뜨거워졌다. 환자보다 더 아픈 간병인이 되어버린 그녀가 울상을 짓자 정면으로 누워 있던 인하가 희림의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힘들면 같이 눕든가.”

“미, 미쳤어? 내가 어떻게 너랑,”

“난 너랑 해도 상관없는데.”

“…….”

그냥 누울걸. 눕고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의 뜨거운 목소리에 희림의 눈동자가 크게 방황했다. 어쨌든 그럴 수는 없다며, 모르는 척 물러나려 하자 인하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왜애. 넌 누워 있지!”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나 혼자 무슨 수로 누워 있으란 거야.”

“네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신경 썼다고.”

“말해줘?”

“…….”

이번에도 희림이 먼저 눈을 피했다. 하마터면 고개를 끄떡일 뻔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강인하는 환자고, 자신은 그를 돌보러 왔다. 오직 그것만을 염두에 둔 희림이 일부러 힘을 주어 침대를 쓸어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누워.”

“너도 누워. 아니면 나도 같이 바닥에 내려가 있을 거니까.”

이미 인하도 온몸에 열기가 아른거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인지라 차마 그를 말리지도 못했다. 짧은 침묵 속 결국 인하가 발을 아래로 내리자 그녀가 저도 모르게 침대 끄트머리에 올라앉았다.

“돼, 됐지?”

“되긴 뭐가 돼.”

“흐읍.”

그녀의 몸을 제 곁으로 바짝 끌어당긴 인하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놀란 그녀가 벗어나려는 움직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단한 숨소리가 뜨거웠다. 꼼짝없이 그에게 잡힌 희림이 그제야 달빛 속 은은하게 비치는 그의 퀭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 

며칠 만에 처음 제대로 잠이 든 것처럼, 그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넌 어떻게 이런 순간에 잠이 올 수가 있는지. 조금은 원망스레 그를 바라보던 희림의 눈꺼풀도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어떤 부끄러움도 어둠 속에 감춰줄 수 있는 시골의 밤 한가운데에서.

“강인하, 밖에 잘 보고 있어야 해.”

견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버스에 앉자마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저 혼자 잠이 들어버리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애초에 학교에서 대절한 미니버스에 타지 못한 것도 전부 강인하 때문이다. 혼자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버스가 떠나자마자 어슬렁대며 나타나는데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야, 내가 깨우랬잖아!”

그런 그가 단 두 시간 만에 얄미움의 한계치를 갱신했다. 어쩐지 푹 잤다 개운하게 눈을 뜬 순간부터 불길했다. 이제 어쩔 거야. 강인하의 교복 자락을 잡고 마구 흔드는데, 그는 무덤덤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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