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도 지금 막 깬 거라서.”
“그걸 말이 돼? 밖에 잘 보고 있기로 했잖아.”
“그냥…… 그렇게 돼버린 걸 어쩌라고.”
제 눈을 피하듯 훌쩍 고개를 돌린 인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없었다. 대신 멋대로 그녀의 가방을 짊어 들었지만 그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대책도 없이 잠이 들어버린 거지?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몇 번을 노려보아도 그는 담담하게 제 뒤를 따라왔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둘만 됐더라도 진작 내쫓아버렸을 텐데, 도시에 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난 모르니까 이제 네가 다 책임져!”
“응. 책임질게.”
차라리 대답을 말든가.
재깍재깍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할퀴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을 달리던 차 한 대가 빠르게 스쳐갔다. 제대로 비켜서기도 전에 저를 단숨에 가로막은 인하는 결코 본인이 해서는 안 될 소리를 쳤다.
“앞에 잘 보라고!”
자다가 방금 깬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날렵한 몸짓으로.
“……일어났어?”
“아니!”
“…….”
“마, 막 깨버렸네. 하하.”
새벽녘 눈을 뜬 인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희림은 10년 전 그리도 답답하던 순간의 답을 얻었다. 어떻게 그 순간 잠들어버렸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만큼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내 네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후우, 몇 시야.”
“…….”
팔꿈치를 세워 살짝 몸을 일으킨 인하가 이마에 한 손을 올렸다. 시간을 확인한 그가 다시 털썩 눕는 순간 그 반동으로 침대가 덜컹거렸다. 그 작은 진동에도 온몸과 마음이 모조리 뒤흔들려버린 희림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어어.”
차라리 무신경하게 다시 잠들어버리기를 바랐지만 강인하는 한 번도 제 생각대로 해준 적이 없다. 기어이 따라 일어난 그의 눈이 막 깨어난 사람답지 않게 번뜩이자 희림은 머쓱한 웃음으로 서둘렀다.
“어디 가긴. 할머니한테 가봐야지.”
“이 시간에?”
“어제는 아빠가 급하게 내려왔는데 가게 때문에 이 시간에는 올라가셔야 해서. 내가 가서 바통 터치해야 돼.”
내 가게도 망한 판에 그깟 가게 문을 열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이 순간만큼은 효녀 역할에 충실했다. 여기서 더 인하의 침대에 둘이 있다간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희림이 부랴부랴 옷과 가방을 들자 인하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또 어디 가게!”
“태워다 줘야지.”
“……무슨 그 몸으로. 아직 열도 다 안 떨어졌을 텐데.”
“만져볼래?”
셔츠를 채우던 인하가 불쑥 고개를 낮추며 앞머리를 들자 희림은 본능적으로 폴짝 물러났다. 무슨 고라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뛰어들어 사람 놀래는 데는 이골이 났다. 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가 숨을 고르는 새 이미 인하는 옷을 모두 챙겨 입었다.
“지, 진짜 가게?”
“간 김에 나도 병원 가보려고.”
“아…….”
이러면 그녀로서도 더 말릴 방법이 없다. 이미 차 키까지 든 그를 따라가는 길이 10년 전 걷던 시골길처럼 낯설었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홀로 쓸쓸히 병석에 누워 있을 강인하를 떠올리고는 무작정 쫓아왔으니 그 뒤의 일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새벽 공기에 머리를 식히며 조금이나마 정리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그 아침도 인하와 함께였다.
“…….”
아직 어스름한 도로를 달리는 차 안도 어젯밤의 침대 못지않았다. 아니, 그때는 인하가 아프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지금의 그는 지나치게 건장했다.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한 저와는 달리 핸들을 쥔 옆모습이 수려했다. 그나마 저를 궁지로 몰지 않는 그의 침묵이 고맙긴 하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다.
‘언제까지 이렇게 모른 척 굴 수는 없을 텐데.’
키스 하나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비록 모두가 짐작할 만한 그런 일은 없었다지만 적어도 쌀가마 대신 절 번쩍 들던 그때처럼 일상인 양 넘어갈 수도 없다.
……차라리 다른 남자애들 같기라도 하든가.
강인하를 아는 만큼 고민도 깊어졌다. 남자의 일생에 가장 가볍고 충동적이라는 고등학생 시절조차 인하는 한숨이 날 만큼 진지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 변했다 한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음을 내뱉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프겠지만.
“한희림.”
“응? 나 왜애? 내가 뭐?”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순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꼭 잡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절로 배어났다. 창문 밖으로 병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복잡한 생각만큼 하고픈 말도 많은데 인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너네 할머니 뵈러 같이 올라갈까 해서.”
“아, 아니야. 절대 안 돼!”
“……내가 부끄러워?”
“그게 아니라, 너 거기 잘못 올라갔다가 연주라도 마주치면 내일 신문에 날지도 몰라.”
“…….”
아, 그건 좀.
설핏 오른쪽 눈을 치뜨던 인하가 마지못해 수긍했다. 벌써부터 그 모습이 상상되는 희림은 제 일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너 할머니 어떻게 모시고 여기까지 몇 초에 왔는지 다 캐물을 거라구. 안 그래도 너 지금 할머니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되어 있는데.”
“…….”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며 희림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지난밤 일에만 너무 빠져 있어 그렇지 인하는 엄연한 생명의 은인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감사조차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저기, 정말 고마워.”
“음?”
“이, 이제부턴 반찬 같은 것도 다 가져다줄게. 우리 할머니 구해줬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갚아주고픈 마음도 변함이 없다. 그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며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떼어냈다.
“집안일 같은 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봐. 내가 가서 다 치워줄게.”
“한희림.”
“너 아직 아프잖아. 아픈 거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인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흡족할지, 더 저당 잡힐 것도 없는 무일푼 신세에 쥐어짜서 나올 수 있는 건 체력뿐이다. 드디어 멈춘 그의 차에 시동이 꺼지자 시계 침의 째깍대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는 것도 같다.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거겠지?’
피곤한 듯 눈을 감은 채 헤드레스트에 기대어 있는 인하는 말도 표정도 없었다. 핸들에다 또르륵 울리는 손가락의 움직임만이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줄 뿐이다. ‘그게 다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희림은 더욱 간절해졌다.
“아, 그리고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웃긴 거 아는데 사실은 우리 엄마 아빠 좀 부자야!”
“…….”
침묵 속에 홀로 쫓기던 그녀는 급기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다다랐다. 인하가 자신을 어찌 볼지 몰라 고개도 못 들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조, 종로에 한정식집 엄청 크게 해가지고, 안 믿기겠지만 나랑은 다르게 부자거든. 그런데 이번에 그거 다 나한테 준다고 했어. 그럼 그때 내가 너 잊지 않고 우리 할머니 목숨 구해준 거 지분 꼭 떼어주라고 할게……. 유치한 거 아는데, 난 이렇게라도 너한테,”
“내가 더 부자야.”
“…….”
“종로에 한정식집은 없는데 그래도 내가 더 부자야. 나도 유치한 거 아는데 네가 뭘 가져다주든 내가 더 부자라고.”
“강인하!”
“나 가질 만큼 다 가졌어.”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변할 것 없는 진리 속에 눈을 뜬 인하가 그녀의 손등을 강하게 눌러 짚었다.
“한희림, 너 하나만 빼고.”
◇ ◆ ◇
107번 버스를 타고 읍내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길가가 펼쳐진다. 여전히 지도로는 짚어낼 수 없는 길이지만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누구든 그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고 창을 열어, 가장 진한 향기를 내뿜는 그곳.
조금 이르게 피어난 가을꽃들이 좁은 양 길가에 흐드러졌다.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꽃망울을 터트려버린 그 마음이 어찌나 급했는지, 더는 감출 수도 없는 진한 향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참고 참다 터져 나온 내 마음처럼.
‘가을’ 5장, 마음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