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인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아 두드리는가 하면 내내 종알종알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나저나 이제 다 괜찮아졌다믄서 무슨 검사를 자꾸 받으라 하는지 몰러.”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입원하신 김에 검사 전부 다 받아보시면 좋죠.”
“동네 사람들 말이 이런 데는 약속 잡는 것두 시간 많이 걸린다던데. 어제는 글쎄 원장님이 다 올라오셨더라고!”
마냥 황송해하던 할머니가 언뜻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봤던 신경외과 의사는 물론 원장까지 찾아와 안부를 물으니 동네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어깨가 올라갔다.
“나 다 나았어! 선생님들이 워낙에 잘 봐주셔가지고!”
“그러세요?”
“그럼. 이제 나야 아무 걱정이…… 맞어! 꽃순이!”
신선처럼 유유자적 웃음이 흐르던 할머니가 급격히 정색했다. 하지만 인하는 그마저도 예상한 것처럼 여유롭게 받아쳤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아침에 들러 밥 주고 왔어요.”
“어쩌믄! 세상에 어쩌믄 이런 선비 같은 애가 우리 동네에 다 와서!”
“뭘요.”
나왔다, 선비.
할머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작위까지 하사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인하가 사양하지 않고 눈웃음을 짓자 병실 안은 훈훈한 온기가 가득했다.
딱 한 사람, 창가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희림만 빼고.
“아주 친손자 나셨어, 우리 할머니 여한 푸셨네.”
“…….”
비아냥대는 그녀의 혼잣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쟤는 또 왜 저러냐며 손녀를 흘기는 할머니의 못마땅한 눈빛에서 그녀는 완벽한 2순위로 밀려났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또 왜 저랴. 애가 갈수록 삐딱하니.”
“내가 뭘?”
“뭐긴 뭐여. 앉아 있는 모양새부터가 삐딱하니 저러다 창문 밖으로 떨어져도 모르겄네.”
할머니는 굳이 쳐다볼 것도 없다며 다시 인하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온갖 칭송을 늘어놓던 할머니는 더는 할 덕담이 없어졌다 싶을 때쯤에야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하여튼 인하 넌 쟤 신경 쓰덜 말어. 내가 좀 이따 한 소리 할라니께.”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
스르륵 그녀를 향한 인하의 시선이 은근했다. 흠칫한 희림의 자세가 더욱 삐딱해졌다. 이제는 정말로 할머니 말처럼 창문 밖에 떨어져도 모르게 생겼지만 아슬아슬하게 버텨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도 푹 쉬시구요.”
“그려 그려.”
“…….”
조금만 더 버티자. 강인하 금방 간다.
주문처럼 되뇐 그녀가 창틀 난간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저는 당장 인하의 얼굴을 보는 것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 같은데 그는 싱긋이 잘도 웃었다.
저놈이 정말 제가 알던 강인하가 맞는지.
정말이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낯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녀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나서는 인하를 두고도 끝까지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갈 때 조심해서 운전허고, 응?”
“그럼요. 걱정 마세요……. 참, 한희림!”
“……어어?”
돌아서던 인하가 제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화들짝 손끝을 말았다. 할머니도 있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주고 싶지만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강인하에게는 원래도 그리 웃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
“괜찮으면 나 좀 따라 같이 내려가자고.”
“왜애! 내려가서 뭐 하게!”
“할머니 주려고 빵 샀는데 깜빡하고 차 안에 두고 왔으니까 가져가라고.”
“…….”
인하의 태연한 대답에 희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할머니의 한심해하는 시선 속에 폴짝 창틀에서 내려왔지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어딘가 분한 듯, 또 어딘가는 억울한 듯. 이렇게 또 영문을 모르고 휘말리고 마는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손잡아줄까?”
“됐거든.”
병원 복도를 걸으면서도 가슴은 쉴 새 없이 뛰어댔다. 옆에 선 그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져 도저히 멀쩡하기가 힘들다. 이것도 벌써 며칠째인지, 나름대로 이골이 날 법도 한데 갈수록 두근거림은 더해져만 갔다. 그렇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인하의 병문안을 막을 수도 없으니 뭘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강인하……. 너 우리 할머니한테 너무 잘해주고 그러지 마.”
“신문에 날까 봐?”
“하, 하여튼.”
9개월간 함께 학교를 걸어다니던 그때에 비하면, 병원의 복도는 지극히 짧았다. 하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려오는 걸음걸음이 그녀를 울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는.’
이제 세상 모든 잘못은 강인하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제게 그런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도, 그래놓고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도, 하다못해 간호사들이 유독 그를 힐끔거리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무엇보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는 할머니에게만 매달렸다 가는 것은 더욱 마땅치가 않다.
“우리 할머니는 순진해서 네가 그러면 진짜인 줄 아신단 말이야.”
“누가 그래? 내가 진짜가 아니라고?”
“……하.”
일단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강인하를 막아보려던 희림이 입안을 질근거렸다. 말대답을 꼬박꼬박 잘하는 것까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난 진짜야. 누구한테든.”
“……그러시겠지.”
입술을 삐죽거리는 희림의 걸음이 부쩍 빨라졌다. 계단의 난간을 잡고 내려서는 그녀의 옆에서 인하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 내려섰다.
“질투해?”
“…….”
뭐래.
휙 돌아보는 희림에 맞추어 인하의 고개도 함께 움직였다. 며칠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가볍게 동요했다. 그 떨림을 이기지 못한 희림은 공연히 코웃음 쳐보았다.
“지, 질투는 무슨.”
“……진짜?”
“그걸 말이라고.”
떠보는 듯 눈썹을 든 그에게 두근거리는 마음도 애써 붙잡았다. 강인하는 자존심이 세니 이런 제게 지쳐 알아서 손을 떼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저도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일도, 가만히 있다가 울컥 가슴이 끓는 일도, 병원 창가에서 추락할지 모르는 위험도 전부 해결이 될 것이다. 그녀가 보란 듯 두 손을 탁탁 털어냈다.
“그래, 그럼 다 네 마음대로 해. 우리 할머니한테 찾아오든 손을 잡든 둘이 하하호호 난리가 나든 나는 그냥,”
“우리 사귈까?”
“…….”
무심한 듯 그가 던진 말에 희림의 걸음이 멈추었다. 완만한 병원 계단이 천 길 낭떠러지라도 될 것처럼 막막해졌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막막한 아래로는 차마 한 계단도 내려설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산짐승과 한 계단에 서 있는 지금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닐 테지만.
“너, 너 무슨 갑자기.”
“잘해줄게.”
“…….”
“너네 할머니한테보다 더.”
병실에서 보였던 그 많은 웃음기가 모두 사라진 그의 눈은 지극히 고요했다. 시끌거리는 주변의 소리를 모조리 빨아들인 것처럼 이곳을 오직 둘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희림 네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잘할게.”
“……무,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어.”
“네가 그랬잖아. 내가 자꾸 그러면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인하가 조금 전 그녀의 말을 꺼내어 되묻자 희림의 목젖이 눈에 띄게 넘어갔다. 이제 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우길 수도 없으니 겨우 어설픈 웃음만 꾸며낼 뿐이다.
“그, 그건 우리 할머니 이야기고. 너도 알다시피 할머니는 순진하시니까.”
“넌 아니야?”
“…….”
“더 좋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잠시나마 짓누르는 듯한 그의 강한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하며, 인하는 하나둘 계단을 내려섰다. 그제야 들려오는 주변의 말소리와 웅성임 속에 희림이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그래봐야 여긴 여전히 병원이고, 아직 갈 길이 많은 계단 중턱일 뿐인데.
달라진 거라곤 눈앞에 강인하의 커다란 등이 보인다는 것뿐이건만 이상하게 더는 막막하지가 않았다. 난간에서 손을 떼어낸 그녀가 웃음을 깨물며 한 걸음을 내려섰다.
◇ ◆ ◇
저녁 6시 30분, 보석책방의 불이 밝았다. 그 순간에 대한 묘사가 책 곳곳에 많다 보니 일부러 그때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많은 편이다. 문고리를 잡고 사진을 찍고선 지금 막 들어서는 남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마침 책을 정리하던 정하가 어린 손님들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들이나 제게 하는 질문들도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그럼 이 책 작가님은 여기 안 오신 거예요?”
“글쎄요. 그건 잘.”
역시나 작가가 이곳에 온 적이 있냐는 질문에 정하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마다 희림과 연주는 ‘와도 백번은 더 오고 몰라도 알아야만 하는 인생의 동반자 수준’이라며 연습을 시켰지만 그는 그런 거짓말에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저 한 번 더 웃고 말 뿐이다.
“음, 작가님 작품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저희는 당연히 여기 사장님이랑 아시는 사이일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건…….”
댕그랑, 울리는 종이 정하의 대답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관광객들이 아닐까 했는데 예상을 완벽히 빗나갔다. 훤칠하다 못해 위압적인 남자의 등장에 떠들썩하던 남고생들의 목소리가 괜히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