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2/80)

41화

“아, 인하야. 왔어?”

“응.”

친구인가 봐. 인하가 정하에게 인사하자 그들이 눈치를 보며 작게 수군거렸다. 과연 제집처럼 소파에 기대어 누운 남자는 피곤한 듯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조각상마냥 위화감이 없어지자 힐끗 눈치를 보던 남고생들도 서서히 생기를 되찾았다.

“어쨌든 저희는 그 작가님 여기에 한 번은 꼭 왔었을 줄 알고 기대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소파를 넌지시 돌아보던 정하가 웃음을 참으며 응대했다. 타고나길 다정하고 세심한 그에게 남학생들 역시 그 나이의 아이들답게 금세 친숙함을 느꼈다.

“혹시나, 진짜 혹시나 여기 오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다못해 사인 같은 거라도 걸려 있으면 찍어 가려구요.”

“뭐 하러요. 작가는 작가일 뿐인데.”

부스럭, 뒤에서 들려오는 못마땅함이 배어나는 소리에도 정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미 책을 활짝 펼쳐 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이 났다.

“그쵸?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왜 그렇게 작가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데요?”

“아……. 그게…….”

정하의 질문에 남자아이 하나가 급격히 말이 없어졌다. 어쩐지 붉어진 얼굴에 의아해하자 다른 하나가 웃으며 냉큼 대신 나섰다.

“있잖아요! 사실은 얘가 좋아하는 애가 그 책 좋아하거든요!”

“야아, 그런 거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연아가 그 책 완전 좋아한다며. 그래서 혹시나 사인 받아 가면 걔가 고백 받아줄까 싶어 나 여기까지 끌고 온 거잖아.”

“아…… 저 새끼가.”

키득거리며 놀리는 친구의 말에 남자아이는 씩씩대며 이를 갈았다. 그래도 정하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고는 곧 시무룩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냥…… 뭐 혹시 모르니까요. 책에도 여기가 제일 자주 나오기도 하고.”

“그랬군요.”

“네. 저도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좋아한 시간도 아깝고……. 또 이만큼이나 좋아하면 뭐 기적, 이런 것도 있을지 모르니까요.”

주절거리며 덧붙이던 아이는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졌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곳에 오기 전 인터넷이며 신문이며 싹 다 뒤져봤지만 작가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기껏해야 청연 사람이겠거니 싶어 내려와봤지만 하루 종일 다녀봐도 꼬투리도 찾지 못했다.

“책 말고는 좋아하는 것도 없는 애라서 뭘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작가 사인이라도 얻어 오면 한 번이라도 쳐다봐줄까 싶기도 하고…….”

“그깟 사인이 뭐라고.”

“…….”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아이를 비롯한 세 사람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인하가 여전히 피곤한지 미간을 눌러 짚었다.

“사인 하나 받아준다고 돌아볼 마음 같으면 그게 더 우습지 않나.”

“인하야!”

“그렇잖아. 그런 거 없다고 하려던 고백 못 하겠다는 것도 딱 그 정도 마음인 거고.”

그만하라 말리는 정하의 눈짓에도 그는 시종일관 시니컬했다. 나름대로 클 만큼 큰 고등학생들도 쉽게 반박을 못 할 만큼 대단한 위압감이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남학생은 기어이 발끈하며 나섰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저 진짜 걔 좋아하거든요! 그깟 사인 없어도 돌아설 마음 아니라고요!”

“…….”

순식간에 으르렁대는 긴장감 속에 인하가 입술을 맞물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친구조차 미쳤냐며 뒤늦게 그를 말렸지만 남학생은 제대로 불이 붙었다.

“연아도 뭐 꼭 그렇게 사인 받아다 달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좋아하니까 그런 건데. 그냥 뭐든 다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구요! 내 마음 꼭 받아달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웃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가서 그대로 말해주면 되겠네.”

“…….”

“나 말고, 그 학생한테.”

무심히 듣던 인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남학생의 얼굴에 제대로 불이 붙었다. 웃음을 참은 정하가 학생에게 찬물을 가져다주며 인하에게도 ‘꼭 그랬어야 했냐’는 듯 눈치를 주었다.

“하여튼 강인하, 넌 진짜.”

“내가 뭘. 그리고 안정하 너야말로 그러는 거 아니지 않아?”

“……응?”

“너 그 작가 알잖아.”

“……”

이게 무슨 소리야.

인하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등 뒤에서 주르르 물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볼 새도 없이 바짝 달라붙은 아이들은 이게 무슨 얘기냐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 진짜 그 작가 아세요? 근데 왜 저희한테는 모르신다고 한 거예요?”

“별로 안 친하거든.”

“…….”

이번에도 정하 대신 인하가 나섰다. 눈을 가리진 않았지만 낡은 소파에 등을 기댄 그가 받친 팔 사이로 남학생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굳이 따지면 원수지간 같은 거랄까.”

“아……. 그래도 그렇지.”

남학생이 아쉬움과 함께 괜히 죄 없는 정하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정하가 이제 나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숙이자 그의 비극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인하가 저거 보라는 듯 날카롭게 턱짓했다.

“쟤가 원래 좀 그래. 음흉하달까.”

“그래서 사인 같은 것도 전혀 모른다고 하셨구나.”

“어, 어어…….”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그럼.”

겨우 입술을 깨무는 정하에게 남학생들이 도리어 그를 위로하듯 나섰다. 나름의 의리인지, 얼굴도 모르는 작가보다는 이곳에서 물이라도 한 잔 얻어 마신 정하에게 더욱 정이 가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저라도 원수지간이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기도 해요.”

“아, 아니. 뭐 꼭 그렇다기보단…….”

야, 너!

정하가 어찌 좀 해보라며 인하를 바라보았지만 그야말로 강 건너 불구경이 따로 없었다. 남고생들의 격려를 받는 원수의 모습을 충분히 즐긴 후에야 소파 등받이에 둘렀던 팔을 걷어냈다.

“그래도 그 작가가 너한테 마지막 시리즈 말해줬다지 않았나?”

“……어?”

내가 언제! 아니, 네가 언제!

장담컨대 정하가 이렇게까지 억울해 입을 벙긋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한번 몰려든 시선들이 더욱 집요해졌다.

“정말요? 다음 시리즈면 봄이요? 뭐래요? 뭐라고 했는데요.”

“뭐라고 했냐면,”

“…….”

이 이상 저대로 뒀다간 제대로 병이 나게 생긴 정하를 두고 인하가 그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을 자연히 제게로 돌리게 하는 완벽한 존재감이 서점 안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봄에 들어갈 첫 번째 구절을 말해줬더라 하더라고.”

“……네? 대, 대체 그게 뭐길래.”

“남자는 직진이다.”

“…….”

인하가 그들의 손에 들린 책을 훑으며 피식거렸다. 가벼운 듯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말에 남학생들의 목젖이 일제히 넘어갔다. 봄과는 일절 상관도 없는 농담 같은 한마디나마 그에게는 그 모든 말을 믿게 하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작점에서 내 마음은 돌이킬 곳이 없다. 기나긴 겨울을 뒤로하고 오로지 파릇한 봄을 내달릴 일만 남았다.”

“아…….”

“그렇게 전해주면 되겠네. 진짜인지 아닌지 같이 기다려보면 될 테니.”

인하가 감탄과 함께 눈을 빛내는 남학생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플 만큼 끄덕이는 고개에 다른 말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을 외우고 또 외우며 부리나케 서점에서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실없이 바라보던 그는 종소리와 함께 다시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강인하.”

“화내니까 무섭네, 안정하.”

그런 자신을 이 악물고 내려다보는 정하에게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안정하도 저러고 있으니 제법 성질이 나오는구나 싶었지만 그것마저 귀찮은 듯 눈을 감아버렸다.

“너 이러려고 여기 온 거야?”

“아니. 자러 왔는데.”

“…….”

“우리 집보다 너네 가게가 더 가까워서.”

이곳에 들른 이유라고는 정말이지 그뿐이라는 듯 단단히 등을 기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십여 분마저 견딜 수가 없었는지 졸음 가득한 음성은 점차 느려졌다.

“……며칠간 한숨도 못 잤거든.”

◇ ◆ ◇

“한희림, 너 내일 시간 있어?”

“아니. 나 내일 쌍둥이들 데리고 치과 가는데.”

“그럼 그다음 날은?”

무심히 필기하던 희림이 연이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싱겁기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 날도 안 돼. 아빠가 읍내 가서 옷 사준다고 했거든.”

“그럼 그다음 날은?”

“…….”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말도 없는 강인하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다니,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녀의 펜이 그제야 멈추었다.

“안 돼?”

“미안. 그날은 정하가 좀 보자고 해서 같이 정안 가기로 했어.”

“안정하는 왜?”

“왜긴 왜야. 친구니까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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