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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3/80)

42화

어딘가 마음에 안 들어도 단단히 안 든다는 그의 표정이 우스웠다. 동시에 어디까지 하나 놀려보고 싶기도 했다. 그녀가 여전히 제 앞에 버티고 선 인하를 느긋하게 올려다보았다.

“뭐야. 또 물어보려고? 그러다가 내년 봄까지 가겠다.”

“가보지 뭐.”

“……응?”

“그다음 날은 시간 돼?”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진지했으며 애초에 장난을 칠 성격도 아니었다. 얼굴이라도 보면 다를까 했더니 모자를 눌러쓴 인하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에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가 한 손으로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한희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한희림, 나 너한테 진짜 꼭 할 말 있어.”

“으응.”

“너 완전 꽐라 진상이고 이제 우리는 절교야.”

연주가 희림의 앞에 있는 소주잔을 신경질적으로 치워냈다. 그렇다고 이미 마신 소주 두 병의 취기가 어디 갈 리 없다.

“나 괜찮은데 왜 그래.”

“괜찮기는! 저기 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좀 봐라!”

“아…….”

희림의 흐릿한 눈이 연주의 손을 따라갔다. 자신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남자들을 보며 희림은 알 만하단 웃음을 머금었다.

“휴우, 정말 이놈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

“조연주, 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 뭐 팜므 파탈 그런 거 아닐까?”

“하아!”

결국 희림에게서 뺏은 잔은 연주의 입으로 꿀꺽 넘어갔다.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직장인의 꿀 같은 퇴근 후 시간에 여기에 달려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기만 해도 피곤한 듯 머리를 감싸 쥐는 친구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진심이라는 것이다. 

“너도 팜므 파탈 알지? 나도 모르게 자꾸 남자들을 막 파멸로 이끄는 거야.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사람까지 나한테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고.”

“……돌았네, 돌았어.”

“내가 뭘.”

“진짜 너 지진 나고 가게 망하고 회장님까지 돼서 많이 피곤한 건 알겠는데, 어쩌다 완전히 맛이 갔냐?”

으이그, 연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희림의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이미 가슴에 강인하라는 거대한 폭탄이 투하된 그녀에게 그 정도 손짓으로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아……. 나 이제 어떡하지.”

어쩌면 키스했을 때보다 더욱 떨렸다. 강인하가 제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나, 나 진짜 어쩌지.”

“어쩌긴 뭘.”

“정말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취기가 오르니 더욱 그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그 얼굴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제게 이런 시련을 내려서도 안 되는 거라고. 주정이나 다름없는 한탄이 입안에서 웅얼거렸다. 

“……내가 지금 걔 속이고 있는 건데.”

“또 뭐라는 거야, 진짜.”

“난 그냥 회장님으로 떠밀려 쇼 했던 건데.”

바로 그게 문제다.

갈수록 저를 짓누르는 죄책감에 희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처음부터 인하를 찾아가고 심드렁하던 애를 들쑤시다 못해 기어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그 막대한 책임감에 울컥해 눈가가 차올랐다.

“……다 싫대. 다 해준대도 싫대. 힘으로 하는 것도 싫고 돈으로 준대도 싫대.”

“누군지 몰라도 또라이네. 너랑 완벽한 한 쌍이네, 한희림.”

“으흐윽.”

연주의 감탄에 희림은 아주 테이블에 엎어져버렸다. 투덜거리며 욕을 하는 연주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 사귈까?”

다시 입안이 뜨겁게 말라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인하에게 지긋지긋한 회장 감투를 떠넘기고 서울로 뜰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그 생각 대부분이 인하로 바뀌어버렸다.

회장님 하든 안 하든, 강인하라는 남자 그 자체로.

“……설마 내가 팜프 파탈이었을 줄이야.”

“그냥 강인하 오면 대놓고 말해버려. 너 나쁜 년이라고.”

“그래야겠지.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으니까……. 잠깐만. 강인하가 여기 왜 와?”

한없는 슬픔에서 허우적대던 희림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인하가 온다는 소리에 미지근하게 남은 취기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렸다. 그제야 자신의 휴대전화를 흔드는 연주의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은 올지 안 올지 몰라. 난 그냥 딱 한마디만 했거든.”

“조연주!”

“희림이가 취했는데 너한테 할 말 있는 것 같다고.”

“…….”

잠시 말문이 막혔던 희림이 친구의 목을 조르는 대신 부랴부랴 제 짐을 주워 들기 시작했다. 얼른 나가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할 일이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정말 인하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희림.”

“…….”

툭, 손에서 힘이 풀려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굳이 돌아보거나 숨죽이지 않아도 그의 존재를 모를 수 없다. 밤에 더욱 짙어지는 그의 그림자에 손끝이 저릿했다. 인하를 불러낸 연주조차 그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뭐야. 누가 보면 한희림 전화만 기다리고 있는 줄 알겠네.”

“…….”

“으음.”

그렇게 상황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든 연주는 죗값을 짊어지듯 알아서 일어나 뒤로 빠졌다. 희림이 잡아보려 했지만 늦었다. 의미심장하게 인하만 한 번 흘깃거린 연주는 어느새 꽁무니를 내빼버렸다.

“야, 조연주! 너 어디로,”

“넌 또 어디 가게.”

“…….”

희림이 절 가로막은 인하의 앞에서 간신히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야 느끼지만 사실 그도 그리 여유로운 행색은 아니다. 매서운 봄바람을 가르고 달려온 머리칼이 정신없이 흩날렸다. 안경도 없이 살짝 찡그려 초점을 잡은 그가 더욱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한희림.”

“나, 나가서 이야기해.”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 같아 희림이 먼저 포장마차를 빠져나왔다. 수백 수천 번은 족히 걸었을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얼마 걷기도 전에 어둑해진 거리에 눈치도 없이 꽃향기가 감돌았다.

이런 순간에도 그가 반갑고 말았던 제 마음처럼.

“……저기.”

결국 어느 시골길 중턱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가 인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무리 봐도 인하가 마음을 돌이킬 것 같지 않으니 저라도 이쯤에서 말을 꺼내야 한다. 난 곧 멀리 떠날 사람이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법 음흉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줘야 한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른다. 아니, 언제마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왜?”

“…….”

이렇게 보기만 해도 가슴이 죄여오는 남자 앞에서 어떻게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수많은 감정 속에 희림이 억지로 마른침을 넘겨보았다. 취기를 빌리지 않으면 이 목소리마저 영원히 잠겨버릴 것 같다.

“나 진짜 나쁜 여자야.”

“…….”

“내, 내가 좀 그래.”

두서없는 말마다 희림의 눈가가 그렁해졌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인하의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일렁였다.

“아아, 그래?”

“웃지 말란 말이야.”

“…….”

넌 꼭 이런 와중에도 화가 나게 만들지.

절 보면 화가 난다는 인하의 말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원망스레 그를 흘기던 희림이 벅찬 마음을 억누르듯 입가에 손을 얹었다.

“난 네가 감당하기 힘든 여자라고.”

“뭘 새삼스럽게.”

“…….”

인하의 손이 그녀의 입술을 가린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흐릿한 시야에도 놀라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만은 한 번에 담아냈다.

“한희림 너 원래 나빴어.”

“야. 너.”

“한 번도 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 없어. 사람 마음을 알아주기를 하나, 한번 제대로 돌아보기를 하나. 한희림 너 나한테 한 번도 좋은 여자인 적 없었다고.”

“…….”

“그냥 좋아하는 여자인 거지.”

분명히 해두자는 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순식간에 코끝에 밀려오는 그의 푸른 향기가 잠시나마 그녀를 먹먹하게 했다.

“바보야. 그건 네가 날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그럼 알려줘.”

뭐든 배우겠다며, 인하가 싱긋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 역시 명확했지만 제 향에 취해버린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어졌다. 재촉하듯 서서히 낮아지는 그의 고개에 희림의 음성이 술잔처럼 찰랑였다.

“내, 내가 좀 음흉하기도 하고,”

“좋네.”

“좀 욕심도 많고,”

“그건 나도.”

“나랑 있으면 여기저기 휘말릴 일도 많을 거고.”

“여기서 더?”

“…….”

아마 그러기는 힘들 거라 단정 짓는 그에게 희림도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나 그녀가 서로에게 더 휘말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둘 모두에게 이게 버틸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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