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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4/80)

43화

“…….”

아마, 여기서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것도.

“이제 더 없지?”

“……왜 나는 너랑 안 되는지?”

“아니. 너랑 키스하면 안 될 이유.”

그렇게 인하가 희림의 입술을 뒤덮었다. 작게 머금었던 웃음은 두 입술이 닿는 순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의 두 손이 희림의 등과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그녀의 모든 체온을 빨아들였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집요하게 파고들던 인하가 제 입술을 부드럽게 핥는 순간, 또다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희림이 질끈 눈을 감았다.

“아…….”

강인하와 이래도 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혀는 꼭 집어넣어보고 싶다고.

◇ ◆ ◇

시골에서 감투를 쓰게 되면 술을 마실 일이 잦았다. 남의 잔칫집에 대신 들렀다 한 잔, 농번기에 들판을 지나다 한 잔, 철철이 각종 술을 마실 구실이야 넘쳐흘렀다. 그 결과 희림은 그에 따른 온갖 숙취에도 익숙했다.

막걸리 한두 병은 다음 날 잠깐 머리가 죄는 정도, 소주 한두 병은 오전까지 속이 쓰리는 정도, 거기다 강인하의 키스가 곁들어진 지금은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는 신세계에 다다랐다.

“아…….”

독한 놈 같으니라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그녀가 제 입술을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다른 건 다 가물거리는 와중에도 강인하가 얼마나 저를 잡아먹을 듯 굴었는지는 잊을 수가 없었다. 아주 머릿속에 그의 생각만이 가득하도록 입안 곳곳에 자신을 새기고 또 새겨 넣었다.

“일어났으면 이것 좀 마셔.”

“가, 강인하…… 너 왜 아직 여기 있어.”

희림이 마음의 준비도 할 새 없이 들어서버린 인하를 보며 울상을 했다. 하긴, 어젯밤 그런 키스를 퍼부은 남자가 곧이곧대로 돌아갔을 리 없다. 본능적으로 움찔한 그녀가 조심스레 이불을 들춰보는데 인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볼 필요 없어. 아직 안 잤으니까.”

“너, 넌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대놓고!”

“왜. 넌 더한 말도 잘하던데.”

“…….”

응답해라, 열 시간 전의 한희림아.

인하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무리 저 스스로를 탓해봤자 이미 나간 기억이 되돌아올 리가 없다. 그저 인하에게 제 실체를 밝히겠다 그토록 비장하게 결심한 바가 있다 보니 추측 정도만 해볼 뿐이다.

“……혹시 내가 어디까지 말했어?”

“으음.”

“괘,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내려놓을 대로 내려놓은 희림의 목소리가 처연해졌다. 엎질러진 물, 지금부터라도 두 손 오목하게 모아 가능한 한 퍼담아볼 생각이었다. 제 침대에 걸터앉은 인하의 고심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수명도 째깍째깍 짧아져갔다.

“네가 나 처음부터 젊어서 찍어놨다는 거부터? 아니면 그동안 회장 떠넘기려고 그만큼 드나들었다는 거부터?”

“아…….”

죽자, 한희림.

그녀가 두 다리를 끌어안고선 얼굴을 파묻었다. 어제까지는 팜므 파탈인 줄 알았던 제가 이제는 입을 꿰매어 놓아야 할 중죄인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제 곁에 이렇게 꼭 붙어 머리칼을 만지는 인하의 손길에 안심이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괜찮다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정말?”

“응. 나야 뭐 아주 모르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새삼 이해심이 넓어진 그가 특유의 느른함으로 한 발을 침대 위로 올렸다. 지금 인하에게 중요한 것은 들으나 마나 한 희림의 고해성사가 아니라 제 남은 발을 어찌하면 그녀의 위화감 없이 한 침대에 올릴까 하는 것뿐이었다.

“전부 잊어줄 테니까 한희림 너나,”

“그럼 내가 너 놔두고 서울 뜬다는 것도 말했겠네?”

“……너 지금 뭐라고.”

10년 전 술기운까지 모두 말려버릴 그녀의 한마디에 인하의 두 눈썹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하지만 죄지은 사슴처럼 쭈뼛쭈뼛 올려다보는 희림의 눈동자 앞에서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했다간 안 그래도 도망칠 생각만 가득하던 그녀의 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내가 너 가두행진 하기 전에 먼저 서울로 가버리면…….”

“가두…… 아냐, 응. 그래.”

뭐든 됐다 싶어 인하가 이마를 짚었다. ‘가두’가 제가 아는 그 뜻이냐 구태여 물어볼 필요는 없다. 장담하건대 한희림은 늘 제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여자였다. 

그래서 더욱 좋았던 거고.

“휴유, 차라리 다행이다. 강인하 네가 다 알고 있다니까.”

“……어어. 참 다행이네.”

가슴에 손을 얹고 급격히 마음이 편해진 그녀와는 달리 인하의 표정은 음울해졌다. 그래도 당장 그녀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다. 피식 웃은 그가 희림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벌써 제 무릎 위로 가만히 고개를 기대었다. 새삼 아침 햇살을 가득 머금은 밤색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두 눈이 새침해졌다.

“어, 어쨌든 난 전부 다 말한 거야. 다 말했는데도 네가 좋다고 한 거야.”

“그래.”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 말구.”

어떻게 이걸 쉽다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지만, 희림의 앙다문 입술은 그런 괘씸함마저 지워버리기에 충분했다. 투명한 붉은빛이 반들대는 그녀의 입술이 두 눈 만큼 도도했다. 아니, 도도하려 애썼다.

“난 책임 못 져.”

“내가 책임질게.”

“…….”

망설임 없이 단호한 그의 대답에 그녀의 두 뺨이 곧장 반응했다. 가볍게 휘어진 인하의 눈가가 차차 열기를 띠며 희림도 사르르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새 남은 다리까지 모두 침대에 올린 그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눈 감아.”

이 작은 머릿속에 든 걱정과 속셈은 모조리 괜찮다며 안심시켰으니 더는 절 가로막을 수 없다. 등교할 학교도, 도망칠 가게도 없다. 천하의 한희림이라도 더 이상은 없을 거라며 그의 굵은 목젖이 이른 아침의 욕망으로 일렁였다. 

“자, 잠깐만.”

하지만 지난 2년 사이 그녀는 또 한 번 진화했다. 머리 위 요란스레 울리는 알람시계를 집어 든 희림이 그것으로 인하의 입술을 막아냈다.

“너.”

“……우리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지.”

8시, 회장님의 출근 시간이었다.

◇ ◆ ◇

농민일보 주간 일정 공지

오는 월요일부터 봄맞이 파종과 마을 환경 정비가 시작된다. 군청 농업지원과에 따르면 올해는 최신 작물들의 파종 시연이 있을 예정이니 각 마을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한편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마을 회의를 통한 주민들의 소통을 독려하며, 아울러 7만 청연군민의 영원한 동반자, 농민일보의 후원에도(계좌 아래 첨부) 더욱 큰 관심과 사랑을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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