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정씨 할머니를 필두로 다른 할머니들까지 모두 동참했다. 희림이 이리 달라 손을 뻗어보기도 전에 보물처럼 꼭꼭 접은 종이는 다시 정씨 할머니의 품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얼마 전에 병원 갔을 때 회장님이 새 회장님 그렇게 챙겨주라고 악착같이 하는 거 보고 우리가 참 느낀 게 많어.”
“……뭐, 뭘요.”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여기를 뜨고 싶으믄 저럴까, 우리 회장님이 그렇게까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선 제대로 좀 해보라고 사람을 개 후려잡듯 잡는 걸 첨 봐가지고는.”
“…….”
“우리가 너무 안이했어. 염치도 없이 너무 회장님 손에만 맡기고 있었지 뭐여.”
아니, 왜 2년간 안 하시던 반성을 지금 하시는 건데요.
말 못 하는 희림의 얼굴이 점차 어둑해졌다. 병원에서 제가 왜 그렇게나 흥분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무엇보다 하루 사이에 뒤집혀버린 자신과 인하의 관계가 그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저기……. 그러니까 일단은 너무 서두르지 마시구요. 차근차근 천천히,”
“안 돼. 그건 안 될 말이여.”
“그려. 회장님이 그렇게까지 새 회장님 붙들어놓으려고 애를 쓰는데 어떻게 우리가 모른 척하겄어!”
각성한 나무 정령들의 반발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거세게 번져나갔다. 이로써 인하와 자신 사이에 모종의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힐 기회는 지나갔다. 원래도 없었지만 완전히 끝이 나버렸다. 이미 철저히 강인하의 취향에 맞춘 모종들을 들고 있는 할머니들이 비장하게 주먹을 쥐었다.
“이제 회장님은 아무런 걱정하덜 마! 우리가 아주 꽉 붙들어놓을 테니껜!”
◇ ◆ ◇
“참외가 벌써 나오나 보네요.”
인하가 제 앞에 놓인 노란 참외들을 바라보았다. 간만에 어깨가 으쓱한 박 비서는 싱글싱글 웃었다.
“원래는 여름에야 나온다는데, 이게 하우스 첫 출하라 하더라고요. 백화점에서 연락 오자마자 받아 왔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솔직히 처음 나온 거나 마찬가지라 구하기 좀 힘들긴 했는데 상무님 참외 좋아하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넘어가겠습니까.”
이렇게라도 그의 마음에 들려는 박 비서의 노력이 가상했다. 좋다 싫다 표현이 별로 없는 인하에게 이 정도 미소는 아주 좋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단 1, 2주 만에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상무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뭐, 그냥 그렇죠.”
심지어 아니라는 말도 없다. 박 비서가 새삼 놀라운 듯 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는 유려한 선이 청연에 오고 나서부터 미세하게 느낌이 달라졌다. 봄볕에 약간은 그을린 듯한 피부와 탄탄한 근육에서 야성의 매력이 두드러졌다. 조금 더 깊어진 눈가 역시 마찬가지다.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런가요?”
“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드셔서 어떤가 했는데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들도 많고.”
어휴, 박 비서가 주방 안팎으로 가득 찬 농작물들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는 시장인가 싶을 만큼 꽉 차 함부로 발을 들이지도 못했다. 일단 저라도 치워보려 냉장고를 열었다가 말문을 잃었고, 다시 싱크대와 창고를 열었다가 크나큰 깨달음에 숙연해졌다.
그러니까 이 농작물들은 안 치운 것이 아니라, 치우고 남은 것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보셔도 못 드립니다. 선물받은 거라서요.”
“아, 네에.”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인하의 말에 박 비서가 얼른 눈을 떼어냈다. 그래도 상무님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으니 그로서도 기쁜 일이다. 지난 수년간, 인하가 얼마나 일에만 매달렸는지 옆에서 똑똑히 보았다. 겨우 비서로서 보필하는 자신도 질려버릴 정도였건만 인하는 단 번도 싫은 내색은커녕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오히려 쉬었다 하라는 저조차 물려냈다. 누군가는 일 귀신이 붙은 게 아니냐 수군거렸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박 비서의 생각은 달랐다.
일이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그때의 인하에겐 일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일의 완벽함과는 상관없이 그래 보였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삶에 오직 일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멈추어버릴 사람처럼 어딘가 권태로움이 서려 있었다.
아주 간간이 본인은 하지도 않는 누군가의 SNS를 넘겨볼 때라든가, 정체 모를 신문을 잡고 있을 때라든가, 혹은 겨울 끄트머리에서 막 다가오는 봄을 구경하듯 창가에 서 있을 때도 그랬다.
“이제 봄이 오려나 보네요.”
사업용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음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박 비서의 이런 생각은 2년 전 확신이 되었다. 회사 일 외에는 할 것이 없어 보이던 분이 다른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일말의 짜릿함마저 느꼈다.
역시 우리 상무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오래 지켜보며 기다린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제가 이럴진대 본인은 오죽했으리라고. 이제는 비서를 넘어서 비밀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박 비서는 더욱더 인하를 지극정성으로 보좌했다. 아무리 돈이 좋아 하는 일도 사심 어린 덕질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다.
“참, 그래서 말인데 전에 말씀드린 제작사에서 조만간 다시 내려올 생각인가 봅니다.”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할 겁니다.”
“물론이죠! 제가 따끔하게 한 소리 했습니다.”
박 비서가 절 믿으라며 가볍게 가슴을 쳤다. 비서로서도, 팬으로서도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절대로 안 된다는 걸 특별히 허락까지 해줬으니 자기들도 아마 알 겁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으니까요.”
“네.”
“참, 마지막에 아주 잠깐이라도 직접 인터뷰 가능하냐 했는데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함부로 메일도 안 쓰시는 분이라 일러두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싱글싱글 박 비서가 참외를 든 인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이라도 화폭에 옮기고 싶을 만큼 싱그러웠다.
“청연군청에서도 그렇고 마을 차원에서도 그렇고 아주 적극적이시라고.”
“……네.”
그림 같기만 하던 인하의 웃음이 더욱 선선해졌다. 웃음을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가가 슬며시 늘어났다. 같은 남자의 시선마저 꼭 붙들어둘 만큼 온통 달콤한 봄의 향기가 넘쳐났다.
“왜 그러세요, 박 비서님?”
“아, 아뇨.”
왔구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이어, 또다시 무언가에 빠져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홀린 듯 인하를 바라보던 박 비서가 괜히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아아, 그리고 원고는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쉬신 지 한 달 정도밖에는 안 됐고,”
“여기요. 얼마 안 되긴 하지만.”
“……네?”
조금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박 비서가 커다래진 눈을 끔뻑거렸다. 얼마 전에도 그런 기미도 보이질 않았는데 그새 또 제가 무엇을 놓쳤는지 가슴이 뛰어댔다.
비서로서도, 팬으로서도.
“저는 여름까지는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대체 이걸 언제…….”
“글쎄요. 저도 모르게 어느 순간 떠오른 거라서.”
“……하지만,”
“봄이니까요.”
그 외에 이유가 더 있겠냐는 듯 인하가 그쯤에서 돌아섰다. 더는 물어도 대답이 없으리라는 것 정도는 서로가 알고 있다. 신기한 듯 입을 벌렸던 박 비서가 역시나 영특하게 물러났다.
“제가 잘 전하겠습니다. 혹시 다음 일정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할지.”
“음……. 제가 내일 약속이 있거든요.”
“네?”
“그러고 나면 알겠죠.”
인하가 어느 때보다 즐겁게 눈을 가늘였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의 눈에서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열망이 아른거렸다. 벌건 대낮에도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박 비서가 말없이 신발을 주워 신었다.
“……저어, 상무님.”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쉽게 물러나지 못했다.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는 그에게서 고뇌의 흔적이 가득했다. 참외의 향을 맡던 인하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세요?”
“사실은 그 참외……. 회장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는 이미 선택이 내려진 이후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서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때가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상무님이 다른 무언가에 흠뻑 빠져들어 새로운 시작을 앞둔 오직 지금에서만.
“……네. 그렇군요.”
과연 인하는 여느 때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주제넘는다는 불쾌함이나 안 하던 일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의아함조차 비치질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참외를 제자리에 돌려두며 쓴웃음을 짓는 것이 전부였다.
“어쩐지 너무 달 것 같더라니.”
◇ ◆ ◇
청연의 여름은 노랗게 무르익는다. 학교로 가는 길목마다 널려 있던 이름 모를 초록색 열매들은 하루하루 뜨거운 태양 아래 그 빛을 닮아갔다. 그중 가장 커다랗고 탐스러운 열매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이자, 나는 그것이 참외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 좀 보라며 내미는 그 달콤한 향이 꼼짝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끈적하고 달큰하게 내 온몸을 묶어버렸다. 당황함을 감추려 여름은 다 이러냐 투덜거리는 내게 그녀는 봄은 조금 다를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거짓일 거라 단정 지었다.
내가 아무리 시골을 몰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있을까.
‘여름’ 5장, 달콤한 거짓말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