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음, 저거 참외 맞지?”
마을로 들어서던 인하가 하우스 입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노란 열매에 눈을 좁혔다. 가뜩이나 안경을 쓰지 않고 와서인지 불투명한 비닐 안으로 제대로 구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다린 듯 문을 열고 나선 할머니들이 그 대답을 대신 했다.
“당연히 참외지!”
“우리 마을이 또 참외 하면 어딜 내놔도 안 빠지잖여!”
“아…… 네.”
적극적인 할머니들의 홍보에 인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 뒤에 서 있던 희림을 부르는데 그녀의 표정이 매우 복잡 미묘했다.
“한희림, 왜 그러는데?”
“……아니, 아니야.”
“너도 저기 참외 열리는 거 알았어? 원래 이렇게 빨리 나는 건가.”
“…….”
그가 신기한 듯 중얼거리자 희림의 눈가가 더욱 어둑해졌다. 목이 뻐근한지 여기저기 돌려보기도 하고 속이 안 좋은지 가슴을 쳐보기도 했지만 결국 할머니들의 성화에 밀려났다.
“참외 요새는 사시사철 다 나! 그럼!”
“그래도 어제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원래 세상만사 일어날 일은 다 하루 사이에 일어나구 그러는 거지! 어제랑 비교하고 그러면 발전이 없다니께.”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희림과 자신의 사이를 염두에 둔 그가 정씨 할머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인하가 제법 관심을 두는 기색에 다른 할머니가 벌써 한 움큼 준비한 참외를 비닐 가득 담아 나왔다.
“자아, 너두 이거 챙겨 가서 집에서 먹고 그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녀. 차기 회, 아니 인하 너도 아팠는데 수분 보충해야제. 이게 이래 보여도 얼마나 몸에 좋은지 몰러.”
“…….”
아, 저 사기꾼들.
희림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목뒤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젖혔다. 어디서 비싼 봄 참외를 구해 밭에 대충 뿌려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그만두시라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제 입도 참외에 틀어막힐지도 모른다.
하긴, 강인하가 아무리 서울 사람이라지만 바보 천치도 아니고 저걸 속을 리가,
“맛있겠네요. 요새 날이 좋아 빨리 열리나 봐요.”
“그럼!”
“…….”
“근데 회장님은 왜 또 거기에 주저앉아 있으셔?”
정씨 할머니가 하우스 앞에 주저앉은 희림을 흘깃거렸다. 척하면 척이라고, 그녀의 심사가 뒤틀렸다는 것은 한 번에 알아봤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못 짚었다.
“회장님, 걱정하들 말어.”
“…….”
종종걸음으로 다가선 정씨 할머니가 희림의 옆에 주저앉아 종알거렸다. 그 와중에도 인하가 눈치챌까 하우스 비닐을 바쁘게 펴는 척하는 손놀림이 깜찍했다.
“우리가 오늘 싹 다 준비해놨다니께.”
“여기서 더요?”
“무슨 말이여. 이제 시작이제. 꽃이며 풀이며 과일이며 하나도 안 빠지고 깔아놨다니께.”
“…….”
평소에 그렇게 혼자서들 좀 잘해보지!
희림이 자신만 믿으라 가슴 안 종이를 두드리는 정씨 할머니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모든 일의 발단은 자신이다 보니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따로 없다. 한가득 참외를 안은 차기 회장님 겸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만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이 졌다.
“인하가 참외 좋아하나 벼.”
“네. 좋아합니다.”
“인연이네, 인연이여. 참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청연만 한 데가 또 없다니께!”
“그런가 봐요.”
갑작스런 결론 도출에도 인하는 싱긋 웃기만 했다. 하지만 정씨 할머니의 말처럼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를 화단으로 데려간 다른 할머니의 열연이 이어졌다.
“올해는 장미를 좀 심어봤는디 어떨지 몰러.”
“장미요?”
“응. 시골이라고 뭐 무궁화만 심고 그러는 게 아니여. 그건 다 편협한 오해라니께.”
“네에.”
인하가 분명 어제는 없었던 묘목을 쓰다듬자 하우스에 기댄 희림은 완전히 뻗어버렸다. 또다시 그를 어딘가로 데려갈 기세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그녀가 부리나케 일어났다.
“강인하, 이제 너 가야지!”
“어딜?”
“…….”
야, 이 멍청아!
눈을 부릅뜬 희림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뚱하게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시선이 쏠릴수록 그녀만 마음이 급해졌다.
“아, 아니 너 약속 있다면서!”
“내가?”
“…….”
어, 네가! 약속 있다고! 있어야 한다고!
급박하게 눈을 깜빡이는 희림의 속눈썹이 도자기 인형처럼 가지런했다. 그러나 인하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만 있자 결국 그녀가 발을 굴렀다.
“아니, 너 오늘 저녁에 밥 먹고 시내도 나가고 그래야 한다면서!”
“누구랑?”
“그…… 되게 중요한 사람이랑! 네 인생에 엄청 엄청 중요한 사람이랑!”
“아아.”
그가 드디어 손을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할머니들을 뿌리치고 나서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듯 희림을 빤히 응시했다.
“저녁 먹고 차 마시고 우리 집에 같이 가기로 했던 그거?”
“어?”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럼 오늘이 아닌가…….”
“맞아! 맞댔어!”
생각지도 못한 일과에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녀는 본인이 사기꾼들의 소굴에 빠진 줄도 모르고 가당찮은 여유를 부리는 남자친구를 냉큼 구출해냈다. 아쉬워하는 할머니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후다닥 나서는 길에, 막 심어놓은 듯한 들꽃이 희림을 막아섰다. 왜 그러냐는 인하를 두고 그녀가 힘이 풀린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아.”
도시에서 온 강인하.
정말이지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가 따로 없었다.
◇ ◆ ◇
저녁을 어찌 먹었는지도 모른다. 내내 심각함에 잠겨 있던 희림은 그의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하가 끓여주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왜, 맛없어?”
“그게 아니라.”
“…….”
희림이 미간을 꾹 누르며 다시 그를 살폈다. 그 언젠가 산짐승 같던 강인하가 최근 며칠 이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 커피를 따르는 모습도, 건네주는 모습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강인하, 너 꼭 그래야 해?”
“음?”
“커피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따르면 어떡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보다 못한 희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왜 남자친구 커피 따르는 것에까지 눈에 불을 켜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계획을 취소할 수도 없고, 이제 와 저 때문에 불붙은 할머니들의 산통을 깰 수도 없다.
남은 거라곤 강인하를 개조하는 것뿐, 그녀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보았다.
“이렇게, 좀 더 벌리고.”
“…….”
이제는 반사적으로 꿈틀거리는 핏줄조차 그녀의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인하의 뺨이 떨려오든 말든 그의 팔을 부여잡은 희림은 이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커피 이런 거 막 따라주지 마. 응?”
“왜?”
“그러면 할머니들 마음이 어떻겠어! 생각해봐, 이런 동네에 와서 너같이 잘생기고 젊은 남자가 커피 막 따라주고 하면 가슴이 안 뛰겠어?”
“…….”
제발 생각 좀 해보라며 희림이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뒤늦게 아차, 움찔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실수를 내색할 때가 아니다. 세상에 강인하 잘생긴 거 모르는 사람도 없고 본인도 들을 만큼 들었을 테니 이 정도는 아주 평범한 일상일지도 모른다.
“하, 하여튼 막 잘해주지 마. 물건 같은 거 줄 때도 공손하게 두 손 말고 마지못해서, 정말 마지못해서 던져주듯이 쓱 밀어버려.”
“그렇게까지?”
“응. 꼭!”
희림이 다짐을 받듯 눈을 크게 뜨자 인하의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보았지만 희림은 그조차도 용납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진짜 성가신 것처럼.”
“……이렇게?”
“아니!”
결국 그녀가 직접 지도해주듯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최대한 귀찮게 이리저리 휘두르는 동안 인하의 고개도 정처 없이 수그러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에 웃음이 가득하자 그녀는 크게 엑스를 그었다.
“스톱. 그렇게 빈틈을 주는 순간 치고 들어올 거라고.”
“흠.”
“다들 쭈뼛거려서 말도 못 시킬 만큼 어깨도 펴고, 웃지도 말고, 커피 같은 건 더 주지 말고!”
몇 번을 강조한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 그를 향해 턱을 괴었다. 아무리 봐도 안심이 안 되는지 눈에 힘을 단단히 주고 심각성을 강조했다.
“잘 들어, 여기는 동물의 왕국이란 말이야.”
“그래?”
“나를 봐. 내가 어디 가서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