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80)

46화

은근히 자신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그녀가 피곤한 듯 긴 머리를 쓸어넘겼다.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손짓이 남자의 마음에 어떠한 파동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안중에 없었다.

“나는 잡아먹으면 먹지 먹히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

“응. 알지.”

“근데 이 할머니들은 그게 안 돼. 일단 안 듣고 안 본다고. 앞을 안 봐.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아아.”

“못 알아들었으면서 알아들은 척하지 마.”

한발 늦은 그의 감탄사에 희림은 힘이 빠진 것처럼 발을 굴렀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며 거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로 걸어가자마자 그대로 쭉 뻗어버렸다.

“하여튼 강인하 너 이제부터 나 잘 따라다녀야 해. 누가 뭐라든 딱 붙어 있으라구.”

“그럴게.”

“함부로 샛길 같은 데도 다니지 말고, 할머니들 그런 데서 불쑥불쑥 잘 나오니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길게 엎드려 누워서도 희림의 당부는 멈추지 않았다. 제가 너무 오버하나 싶다가도 자신이 여기에서 겪었던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경각심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강인하가 바보가 아닌 이상 며칠 바짝 지도하면 알아서 생존법을 터득해갈 것이다. 서울에서 그렇게 크게 성공했다는 놈이 이 정도를 못 알아먹으면 그것도 사기다.

“한희림.”

“응?”

그나마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던 그녀가 부스스 고개를 들자마자 숨을 참았다. 막 제 남자친구가 된 훤칠한 남자가 저를 향해 걸어오는데도 어쩐지 눈가가 부쩍 뜨거워졌다.

“커피 마실래?”

공손한 자세와 반듯한 매너, 그 어느 때보다 만만하고 부드러운 웃음으로.

◇ ◆ ◇

청연군청 1층의 로비 복도, 이제 그곳은 드나드는 이들이 꼭 한 번씩 발걸음을 멈추는 명소가 되었다. 흩날리는 모래 속 강인한 눈빛과 검은 머리칼, ‘보다 젊은 청연’이라는 슬로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사진이었다. 삼삼오오 걸음을 멈추어 감탄하는 바로 그 사진 앞에서, 희림 역시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불안해. 아무리 봐도 허술하다구.”

“누가?”

그녀의 뒤에서부터 연주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제가 찍은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는 만큼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설마 강인하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뭐래.”

“너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인하 쟤가 3년 연속 천하장사를 내리꽂은 인물이라고. 안 그래도 우리 군수님 딸이 이 사진 보고 완전 상사병이 났다니까?”

“그럼 뭐 해. 정작 중요한 때는…… 아니다, 됐다.”

휴우우, 그녀의 한숨에 연주의 두 눈이 번뜩였다. 얼마 전 직접 인하를 술자리로 불러들인 인물이다 보니 안 그래도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해 몸이 꼬일 지경이었다. 

“왜? 강인하 중요한 때 별로야? 비리비리해?”

“그냥, 좀.”

“웬일이냐. 걔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사람은 다 가지지는 못하나 봐.”

연주가 새삼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희림은 희림대로 우울한 눈가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이러다 조만간 확 당해버릴 것 같다니까.”

“당하면 안 되지. 그래도 남자가 한 번은 힘 있게 덮쳐줘야지!”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잠깐만.

그제야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대화에 희림이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의 눈에 번뜩이는 음란마귀를 발견한 그녀가 연주의 팔을 마구 꼬집었다.

“하여튼 얘가 미쳤나 봐. 신성한 군청에서 무슨 소리야!”

“야,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데야. 그리고 뭐…… 그런 거 아니라면 다행이지 뭘 그래.”

“다행은 무슨. 그리고 너 왜 자꾸 나랑 걔랑 그런 식으로 엮는데?”

“……아니야, 그럼?”

이참에 희림이 시치미를 떼고 몰아붙이자 연주는 대놓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부터는 본인의 역작인 인하의 사진을 바라보는 눈도 영 심드렁해졌다.

“에이, 난 또 무슨 일 한번 제대로 나나 했는데.”

“어휴, 저런 걸 진짜 공무원이라고 믿고 산 내가 잘못이지.”

“근데 그럼 너도 완전 웃긴다. 강인하가 허술하건 불안하건 희림이 너랑 무슨 상관인데? 둘이 무슨 사이라고?”

“어?”

“…….”

마냥 몰아붙여 위기를 빠져나가는 데 치중해,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 희림이 못 들은 척 뺨을 문지르자 연주가 수상쩍단 눈길을 보냈다.

“말하고 보니까 더 이상하네. 너 어차피 인하한테 회장 자리 떠넘기고 여기 뜰 계획이었잖아. 그럼 인하가 알아서 착착 잘 당해주면 고마운 거지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이제 와 없는 양심이 따끔거려?”

“조연주, 너 말 되게 웃기게 한다! 야, 친구 사이인데 그 정도도 신경을 못 써?”

“친구라고?”

연주는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나도 어디서 당하고 다니면 이렇게 흥분해서 네 일처럼 나서주겠네?”

“당연하지! 나는 너랑 차원이 달라. 조연주 너나 정하나 어디서 무슨 일 당하고 그러면 악착같이 다 엎어버릴 거야!”

“…….”

“물론 강인하도 똑같이!”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인 희림이 숨을 쌕쌕거렸다. 과연 남의 직장에서 이 정도 진상을 부린 그녀의 패기에 연주도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고, 고마워.”

“알면 잘해!”

끝까지 큰소리를 친 희림이 친구를 아래위로 내리훑었다. 난데없이 우르릉 울리는 하늘처럼 그녀의 기세도 못지않았다. 인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은 그저 원수 같은 조연주를 저렇게 풀 죽게 만든 것에 극한의 만족감을 느꼈다. 

“너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알았어.”

“…….”

“근데 그러고 보니까 다행이긴 하네.”

웬일로 순순하게 인정을 하나 싶더니 팔짱을 낀 연주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저건 분명한 도발이라고, 저 빤한 수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희림의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저 마귀의 혼잣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군수님이 인하 정말 애인 없냐고 해서 아마 그럴 거라고 했거든. 아마 벌써 전화하셨을라나.”

◇ ◆ ◇

긴 테이블 앞에 앉은 인하가 신중히 손을 놀렸다. 꽤나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정하가 조심스레 턱을 괴었다.

“인하 넌 뭘 해도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이제 알았어?”

“응. 근데 참외 스티커는 도대체 왜 떼는 거야?”

생사만 무사하면 별 관심 없는 것이 남자들 사이라지만 도저히 안 물어볼 수가 없다. 명색이 잘나가는 타이틀을 두 개나 짊어진 성공의 표본 같은 남자가 이렇게나 열심히 매달리는 일이 기껏 참외에 붙은 스티커를 떼는 것이니, 평화주의자 안정하의 눈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도 아니고 그게 뭐야.”

“음…… 성의?”

“응?”

“그만큼 열심히들 하시는데 이런 거라도 가려드려야지.”

다 됐다. 마지막 붉은 스티커를 떼어낸 인하가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다소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정하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당히 비밀로 하라는, 그들 사이의 은어였다.

“난 봐도 봐도 모르겠다. 인하 네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이상해?”

“좀 이상하긴 한데……. 예전보다는 나아.”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정하는 거짓말하는 이가 아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인하가 참외의 향을 맡다 말고 피식 웃었다. 희림이 봤으면 ‘그렇게 만만해 보이게 웃으면 안 된다’ 기겁할 테지만, 지금은 저만의 자유 시간이었다.

어딘가 허전하고,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것만 같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혼자만의 시간.

“……내가 예전에 그렇게 이상했나 보네.”

농담 반 진담 반의 씁쓸한 혼잣말에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그 옛날 제가 어떠했는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길어봐야 9개월, 그 시간을 지난 10년간 되짚어왔으니까.

“뭐 어때.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거지.”

“그러게.”

“아니다. 희림이는 그대로인 거 같기도 하다.”

“……책 안 읽는 거?”

인하의 찡그림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하의 은근한 웃음이 깊어졌다. 말해 무엇 하겠냐만 이번에도 역시 말을 해보고 싶어졌다.

“인하 넌 안 서운해?”

“뭐가?”

알면서 묻는 인하의 눈짓이 능청스러웠다. 정하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그는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난 상관없어.”

“진짜? 쉽지 않을 텐데.”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는 여자니까.”

“…….”

“이제 와서 쉬우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한 팔에 머리를 기댄 인하가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굴렸다. 차라리 허세이면 좋겠다 싶겠지만 지금껏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조차도 사치스러운 말이다.

“난 지금도 좋아. 그걸로 됐어.”

“와아.”

멍하니 듣고 있던 정하가 놀란 듯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인하가 그만두라는 듯 날 선 눈을 들었지만 정하는 커다래진 눈을 감추지 않았다.

“그 정도였다니 놀랍네.”

“몰랐던 척하긴.”

“……그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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