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인하의 싸늘한 핀잔에도 정하는 웃기만 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 만큼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이런 순간에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하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신, 정하는 어울리지도 않는 장난기로 맞은편의 인하에게 몸을 당겨 앉았다.
“그럼 너 나도 싫겠다. 희림이랑 계속 붙어 다녀서.”
“별로.”
“……응?”
아무리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생각지 못한 대답에 정하의 눈이 또 한 번 커다래졌다.
“왜애?”
“한희림이 너 좋아하니까.”
“…….”
내 마음이 그 정도라는 것을, 인하는 설익은 참외의 향을 맡는 것으로 대신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정하가 입가를 가리는데도 시선을 내린 그는 끝내 담담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달콤한 향을 풍기는 노란 과일만 내려다보며 가만히 숨을 들이켤 뿐이다.
“……물론 친구로서.”
뒤늦게 덧붙인 말은 무의미했다. 그 어색하고도 견딜 수 없는 적막에 정하는 서서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 취소할게. 너 진짜 많이 이상해졌어.”
“그러시든가.”
싱겁게 웃은 그가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연주가 곧 들르겠다 문자를 보냈는데,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런 것치고 너무 이르긴 하지만, 뭐 어떨까. 이왕 이상한 놈으로 낙인찍힌 김에 저 같은 사람이 하나쯤 더 있어도 나쁠 건 없다.
“벌써 왔……, 한희림?”
“강인하! 너 뭐 했어?”
“……어?”
좁은 문틈 사이로 그의 세상은 더욱 이상해졌다. 최근 며칠 저만 보면 쭈뼛대며 눈을 피하던 그녀가 이렇게나 절 반가워할 줄이야.
“너 혼자 있었지? 그렇지?”
“……어어, 뭐.”
간절히 그러기를 바라는 희림의 눈망울 앞에서 인하는 문을 살짝 닫는 것으로 정하의 존재를 지워냈다.
“당연하지.”
“하아, 그렇구나아!”
제 등 뒤에서 강제로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정하가 무슨 표정을 짓든, 그는 눈앞의 그녀가 안도하는 모습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완전히 안도할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는 희림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그럼 혹시 누구 오기로 한 사람은 없어?”
“없어……. 아니. 조연주 온다고 하긴 했는데.”
“나와, 얼른 나와!”
“…….”
문틈에 걸쳐진 그의 팔을 잡아당긴 희림이 등을 곧게 세웠다. 조금 전까지 숨이 차 허리도 못 펴던 게 누구라고, 당장 폭탄이라도 터질 것처럼 인하를 강하게 끌어냈다.
“가자, 얼른 가야 해!”
“…….”
어디에 가냐 물어보는 것도 이제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그녀의 팔을 뿌리칠 거라는 선택권이 있을 리도 없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바삐 따라나서던 인하가 잠시 고개를 돌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두 눈을 향해 은근한 웃음을 던졌다.
“…….”
이거 보라고.
세상이 이렇게 즐거울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이상해질 걸 그랬다고.
◇ ◆ ◇
“여기로 가면 안 돼.”
“왜?”
청연 어디든 제집처럼 쏘다닐 것 같은 그녀에게도 단 한 군데,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금지구역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얄밉고 성가신 강인하에게까지 알려줄 정도면 정말로 주의를 기울일 만한 곳이긴 했다.
“잘못 들어가면 못 나와.”
“왜?”
“위험하니까 그렇겠지!”
그냥 그런 줄 알 것이지.
말도 별로 없는 주제에 ‘왜’냐고 꼬박꼬박 묻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산짐승이 우글거린다거나, 위험한 것들이 묻혀 있다거나, 그런 겁을 줘서 통할 놈도 아니다. 결국 한숨을 쉰 그녀가 인하에게 가까이 와보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너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들어봤지?”
“……어.”
음, 그렇다고 그렇게 가까이 오란 말은 아니었는데.
한순간에 제 코앞까지 고개를 내린 인하 때문에 잠시 주춤했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심각해졌다. 정말이지 대단한 비밀인 양, 철없고 겁 없는 그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왜냐면, 우리 동네에서 딱 저기에만…….”
“핸드폰 안 터지네?”
“어어. 그, 그랬어?”
엄지손가락으로 휴대전화를 눌러보던 인하의 혼잣말에 희림이 벌어지는 입가를 가렸다. 문득 고개를 들었던 그도 생각보다 가까운 그녀의 얼굴에 휴대전화를 내려두었다. 사실 던져버려도 크게 상관없는 표정이었다.
“뭐 어쨌든. 요새도 이런 데가 있네.”
“그, 그러게 말이야.”
고맙다, 우리 동네 시골.
못내 안도한 그녀가 처음으로 안온마을에 감사했다. 오지 산골도 아니건만 요새 세상에 휴대전화가 안 터지는 곳이 어디 있을까 했더니, 여기에는 엄연히 있다. 그래봐야 등산길로 이어지는 외진 공간이지만 오늘만큼 이곳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강인하 너 혹시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럼 됐네! 너도 참!”
방글방글 웃음을 되찾은 그녀가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지난 2년간 늘 그래왔다. 지금 이 순간은 제 남자를 여우의 농간에서 지켜냈다는 만족감만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 여긴 또 왜 데려온 거야?”
“어?”
하지만 미처 그 남자가 이유를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희림의 눈가와 입가가 동시에 흔들렸다.
“여기에도 뭐 있어?”
“그럼!”
“…….”
“내가 뭐 아무 이유도 없이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봐?”
일단 말문이 막히면 강한 반박으로 대처한다. 2년간 이 동네 수장으로 지내며 얻은 가장 강력한 대처법이었다. 진짜 대답은 상대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만들어내면 그만이다.
“전에 말했잖아. 강인하 넌 나만 따라다니면 된다고.”
“…….”
“너도 이제 이 동네 사람인데 여기저기 알아둬야 하니까 잘 따라오기만 하면 돼.”
다행히 인하는 그다지 반박하지 않았다. 저렇게 순순히 따라오는 그를 보자 희림은 안도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얘가 진짜 어쩌려고 그럴까.’
이러다 호랑이가 형님 하고 물어 가도 모르겠네.
안 그래도 불안한 남자를 산속에 데려다 놓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하의 곁에 붙어 섰다.
“발 조심해야 해.”
“알았어.”
“자,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 거냐면…….”
그녀가 덤덤히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그를 피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간신히 연주와 정체 모를 군수 따님을 피해 도망쳤다 싶으니 그제야 제가 처한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산속, 저물어가는 해, 막 연인이 된 강인하와 나.
“……아아, 저기 꽃 좀 봐.”
“어디?”
몰라, 있겠지 뭐.
그의 집요한 시선에 대충 어딘가를 가리켜보던 그녀가 자박자박 숲길에 들어섰다. 그래도 저 까칠한 인하가 웬일로 순순하니 의외로 크게 어색함은 없었다. 사실 인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언제까지 이렇게 거리를 둘 수도 없다.
“어, 저기!”
다행히 진짜 꽃을 찾아낸 희림이 신나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너 왜 이제 나타났냐는, 그녀 특유의 새침한 미소를 짓는데 인하가 여지없이 고개를 숙였다.
“예쁘네. 이름이 뭔데?”
“이름이 뭐가 중요해. 예쁘면 됐지.”
굳이 이름을 모른다는 말 대신, 희림은 그를 향해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하얗게 피어난 꽃잎 가운데에 엷게 물든 노란빛이 수줍은 듯 은은했다. 아마도 예전에도 수차례 스쳐갔을 꽃이겠지만 지금처럼 오래도록 바라본 것은 처음이다. 이렇게나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꽃에게도 처음일 거라, 그녀의 미소가 더욱 뿌듯해졌다.
무릎을 굽힌 강인하의 그림자가 하얀 꽃잎을 덮을 때까지.
“…….”
문득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그녀의 숨이 멈춰버렸다. 정작 인하는 아무런 말이 없건만 그녀의 마음만 조급해졌다.
“하, 하여튼 조심하라구.”
“…….”
누가 누구에게 뭘 조심하라는 건지, 두서없는 말끝이 떨려와도 애써 무시했다. 그사이 더욱 가까워진 인하의 몸에 눈을 얻다 두어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여우를 피해 산에 들어왔다가 호랑이를 만난 기분이 이런 걸까. 어떻게든 이 위기를 떨쳐보려는 그녀가 공연히 주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산에 독버섯 같은 것도 엄청 많거든. 아무거나 먹으면 절대 안 돼.”
“…….”
“버섯 말고 나물도 독성 있는 게 있어서 그것도 조심해야 해. 아! 동네 할머니들도 그렇지만 조연주는 아예 가까이 가서도 안 되니까,”
“그럼 난 누구랑 있어?”
“어……?”
부쩍 가까워진 그의 숨결이 제 앞으로 기울어졌다. 처음부터 궁금한 건, 아니 듣고 싶은 대답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처럼 인하는 느긋하게 희림을 재촉했다.
“한희림 네 말 들으면 청연에 세상 위험한 것들만 가득한데, 도대체 난 누구 옆에 있으란 거야?”
“……저, 전에 말했잖아. 그냥 내 옆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
“이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