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제 사진을 꿈꾸는 듯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입술이 바싹 말라가는 지금의 자신처럼.
“사장님! 이건 여기다 달면 될까요?”
“…….”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인하가 공사장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미룰 수가 없어 다시 시작된 공사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 주문해두었던 조명을 바닥에 내려둔 팀장이 인하의 의견을 구했다.
“본사의 비서님께서 오늘은 조명 공사 들어가면 된다고 하셨거든요.”
“아아, 네.”
“그래도 정확한 위치 확인은 사모님한테, 아니다. 사모님 아니라고 하셨구나.”
“…….”
뒤늦게 말실수를 정정하는 팀장에 오히려 인하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그를 알 리 없는 팀장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동네 친구분이라 하시더라구요. 그날 같이 왔던 저희 팀원들이 그 소리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래요?”
“네에, 워낙 미인이시잖아요. 이런 시골에서 누가 그런 분 뵐 거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눌러쓴 안전모 때문에 제대로 고개를 들어 인하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여튼 안 그래도 다들 한 번이라도 더 와서 얼굴이라도 보려고 난리였지요. 오늘도 저렇게 기웃거리는 게 아무래도,”
“……잠시만요.”
팀장의 말을 무심히 흘려듣던 인하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짧은 한마디에도 눈빛부터 변하는 것이 누구인지 알 만했다.
“응, 왜 안 와?”
- 미안. 나 오늘 못 갈 거 같아.
“왜?
잠시 흔들리는가 싶던 인하의 목소리가 금세 고요해졌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희림은 어딜 그리 달려가는지 세찬 숨소리가 갈수록 거세졌다.
-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 방송국에서 갑자기 내려온다고 해서 얼른 가봐야 할 거 같아.
“……오늘?”
- 응. 갑자기 연락이 와서, 이번 기회는 놓치면 안 되잖아!
그때도 그러더니 희림은 새삼 신이 났다. 정말로 잘해보고 싶다는 그녀의 각오가 들뜬 목소리에 한가득 느껴졌다.
- 하여튼 집까지 들렀다 간다고 정신이 없네.
“집에는 왜?
- 왜긴 왜야. 잘 보이려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지.
“…….”
그걸 몰라 묻냐는 희림의 말에 해를 등진 인하의 그림자가 검게 일렁였다. 영문을 모르는 인테리어 팀장이 흘깃 바라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그린 듯 수려한 옆선의 목젖이 고요히 넘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 ……화났어?
“아니. 내가 왜.”
- 약속 못 지켜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이번 일 잘돼서 동네 잘되면 너도 나도 다 좋은 거니까, 그리고 아까 전화로 잠깐 들어봤는데 계절별로 4부작으로…….
잠깐 눈치를 보는가 했던 희림은 금세 종알거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되면 어떠한 효과가 있을지, 온갖 이유를 덧붙였지만 그의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신문 뒤로 받쳐 든 사진에만 가 있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예쁘려고 그러는지.
- 마치고 너네 집으로 갈게. 가서 어떻게 됐는지 다 얘기해줄게.
“응.”
- 참, 오늘 공사 어떡하지? 전에 다 골라놓긴 했는데 그래도 내가 제대로 하는지 가서 봐야 하는데.
“걱정 말고 천천히 와.”
새삼 부드러운 그의 음성에 희림도 안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살피던 팀장이 그제야 머쓱하게 웃었다.
“으음, 그럼 오늘 친구분 못 오시나 봐요.”
“네, 중요한 약속이 있다네요.”
“그렇구나. 하여튼 저기 우리 팀원들 실망 좀 하겠네요. 하하.”
그가 공사장에 한가득 모여 있던 남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공사장이라 해도 제법 신경을 쓰고 온 기색들이 역력했다.
“중요한 약속이시면 더 예쁘게 하고 나가셨겠네요. 막 입어도 예쁘신 분이 차려입으면 얼마나 더 빛이 나시려고.”
“그렇겠죠.”
“아…… 네에.”
정말로 별 사이가 아닌가.
아니라고는 들었지만 내심 그들의 사이를 궁금해하던 팀장이 뺨을 긁적였다. 시골이든 도시에서든 찾아보기 힘든 미남 미녀가 공사 내내 붙어 있으니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자신의 농담이나 직원들의 관심에도 질투하는 내색조차 없는 걸 보면 진짜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어, 그러면 오늘 조명 다는 건 그냥 저희가 하면 될까요?”
“제대로 확인받아야죠. 아니면 제가 혼나거든요.”
“아아, 네에.”
심지어 저리 나오는 걸 보면 더욱이 연인은 아닐 듯도 싶다. 어쨌든 저희야 본사에서 모든 대금을 받기로 했으니 하루 이틀 공사가 미뤄진다 해도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다. 둘둘 도면을 말아 든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철수하고 내부 공사는 다시…….”
“아뇨. 그럴 수는 없죠.”
“네?”
“외부는 따로 언급한 적 없으니까요.”
부드러운 듯 단호한 웃음의 인하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건축 자재가 가득 쌓인 공사장을 벗어나 걸어가던 그가 느닷없이 커다란 호수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오늘은 여기부터 시작하죠.”
◇ ◆ ◇
오늘은 제시간에 만난 이를 마주하고도 희림은 긴장이 가득했다. 명함을 받고 인사를 나누고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워낙 두서없이 움직이다 보니 오늘에야 시간이 났거든요.”
“아뇨. 별말씀을.”
“전에 저희 실수로 따로 연락도 못 드려서 고생시켜드렸네요.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잘 부탁드릴게요.”
기획피디라는 성진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초면에도 사람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이 이런 일에 꽤나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미인이실 줄이야. 처음에 마을 회장님이라고 해서 저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신 줄 알고. 처음 전화하고 목소리 들었을 때부터 놀랐거든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뇨. 그건 그냥 어쩌다 보니.”
“하여튼 이렇게 젊은 분이라 이야기가 더 잘 통하겠네요. 어쩐지 시작부터 잘 풀릴 징조 같아 더 좋지 뭡니까.”
성진은 희림의 앞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괜히 민망한 그녀가 미리 준비한 자료들을 주섬주섬 펼쳐놓았다.
“이건 군청에서 준비해주신 것들인데 여기 보면 기본적인 정보도 있고 또 촬영할 때 도움 될 만한 자료들도 꽤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어휴, 뭐 이런 걸 다.”
호탕한 말과는 달리 그는 그녀가 준비한 자료를 흘깃하는 게 전부였다. 대신 희림의 얼굴과 옷을 어찌나 뚫어지게 바라보는지 그녀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혹시 더 필요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있다면…….”
“그런 건 희림 씨가, 아니지. 회장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부르시면 돼요.”
“네에, 희림 씨. 저도 그렇게 부르는 게 더 좋긴 하죠. 어쩐지 더 친근감도 생기고.”
싱글거리는 그의 얼굴에 희림은 공연히 제 원피스 자락을 매만졌다. 역시 불편하구나. 이 자료를 챙겨 오느라 연주나 다른 군청 직원들을 꽤나 못살게 들볶았는데, 여러모로 미안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저어, 그럼 촬영은 확정이 된 건가요?”
“네. 그럼요. 사실 저희가 작년부터 계속 기획을 했었는데 작가님 허락이 안 떨어져서 이야기 나오다 말고만 반복 중이었거든요.”
“그랬군요.”
“그런데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해주실 줄이야. 하여튼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그분도 인기 좋을 때 한번 제대로 치고 나가야죠!”
보란 듯 팔을 쭉 편 성진은 말만큼 포부도 거창했다.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계획을 늘어놓던 그가 마을의 전경이 담긴 사진을 가리켰다.
“일단은 4부작으로 나누어서 여름부터 담아보려고요. 이번 주부터 저희 팀 내려와서 마을 곳곳 다니면서 구체적인 그림 하나하나 딸 겁니다. 참, 혹시 마을에 슬레이트 지붕 있는 집 어디 있을까요?”
“슬레이트 지붕이요? 요즘은 잘 없을 텐데 왜요?”
“왜긴 왜겠어요. 책 첫 장면에 들어가니까 그렇죠.”
“아…… 그러시구나.”
당연한 거 아니냐는 그의 말에 겨우 따라 웃는 희림의 미소가 어색했다. 이 동네에 슬레이트 지붕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왜 예전 그 집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없어져버린 집이건만, 아무래도 하루 종일 한 사람을 생각하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 쓴웃음을 삼킨 그녀가 나중에야 한번 알아보겠다 대답하자 성진은 잘됐다며 박수를 쳤다.
“제가 장담하는데 촬영 다 끝나고 방영되면 한동안 청연이 떠들썩할 겁니다. 관광객들도 지금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들이닥칠 거고 주변 상권이나 관심도나 훨씬 커지겠죠! 처음에 여기저기 찍는다고 성가셔하실 수도 있는데 결국은 주민분들께 좋은 결과로 돌아올 테니까요.”
“네에.”
“…….”
보통 이런 상황에선 제일 좋아할 만한 말을 꺼내는데도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처음 전화할 때 보였던 열정과는 새삼 다른지라 성진이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혹시 희림 씨.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네?”
“앞으로도 저희가 큰 도움 받게 될 거 같은데 뭐든 물어보셔도 돼요. 아니면 당부할 말씀이라든가.”
“…….”
“그런 거 있잖아요. 촬영 일정이라든가, 장소라든가, 아니면 책에서 어느 부분을 특히 살렸으면 싶다든가.”
성진은 얼마든지 물어보라며 그녀를 재촉했다. 작품에 대한 작업도 작업이지만 다른 쪽으로도 관심이 지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