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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3/80)

52화

“저희 측에서 따로 사례도 드릴 테니 미리 생각하신 금액이 있으시면 말씀하셔도 되고. 아니면 희림 씨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좋구요.”

“개인적인 건……”

눈을 내리깐 그녀가 생각에 잠기자 성진의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아무리 봐도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림의 미모에 침이 꿀꺽 넘어가려던 차, 그녀가 서서히 잠겨 있던 눈을 들었다.

“그냥 잘 찍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천천히.”

◇ ◆ ◇

그녀가 인하의 집 앞까지 갔을 땐,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난 첫 미팅에도 희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촬영이 다 끝나면 그때는 어찌 되는 걸까.

아직 시작도 안 한 일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인하에게 카페가 잘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둘도 없는 기회가 될 텐데 이상하게 기분이 우울했다.

밀려드는 손님들에 둘러싸인 강인하를 떠올리면.

그 많은 이들 중 저만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하…….”

전화 한 통 없을 건 뭐람.

화풀이하듯 휴대전화를 꼭 움켜잡은 그녀가 분한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전화할 때부터 그는 데면데면했다. 비록 자신이 약속을 어기긴 했지만 전부 제게 좋으라고 그러는 건데, 한 번이라도 자세히 물어줄 수는 없었을까.

적어도 서운해하는 기색이기라도 했다면.

이젠 제게 순순한 태도까지 별게 다 원망스러워졌다. 지금 기분으론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뭐든 괘씸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전화로 따질까 했지만 이 정도면 직접 가는 게 더 빨랐다.

‘어디 두고 보자고.’

저 없이 얼마나 잘해뒀을지 샅샅이 살펴볼 셈이었다. 실낱같은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처럼 희림이 씩씩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강인하!”

집으로 먼저 가보았지만 불이 꺼져 있다. 혹시 몰라 공사 중인 분관으로 가보았지만 역시나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았는지 꼬투리를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

“……얘가 어딜 간 거야.”

제집에 제가 없는 것처럼, 그저 강인하의 집에 강인하가 없을 뿐인데 반사적으로 가슴이 덜컹했다. 이곳은 서울과 달라 이 시간에 갈 만한 곳도 없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거라면 모를까.

“왔어?”

“아…….”

멀리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희림은 그제야 가슴에 손을 올려 멈춰 있던 숨을 내쉬었다. 인하가 여전히 이 집에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막상 그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확인하자 탄식을 터트렸다.

“미쳤니? 위험하게 거기 왜 있어!”

“내 집이니까.”

호수 앞 선착장에 앉아 발을 내린 그는 무심히 걸친 셔츠 자락처럼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한 팔을 뒤로 기댄 채 비스듬히 돌아보는 얼굴은 한여름이 따로 없다.

비록 뜨거운 슬레이트 지붕 아래는 아닐지언정.

“……왜?”

“아냐, 아무것도.”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졌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희림이 얼른 그에게로 다가섰다. 잠시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지만 저도 지금껏 떠올린 적 없던 사실을 저 무심한 남자에게 물어봤자다. 또각또각, 달빛 아래 선착장 바닥을 밟고 지나는 걸음 소리가 제 귀에만 어색한가 싶어 공연히 입안이 말랐다.

“아, 이거. 오늘 거기 피디 좀 만난다고.”

“…….”

역시나 흘깃 돌아본 인하의 시선이 깊어지자 괜히 뺨이 붉어졌다. 공들여 꾸민 모습이 민망하다가도 내심 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딱 한 번, 이런 차림으로 마주했을 땐 서로의 입술밖에 기억에 나는 게 없었으니까.

“하하, 역시 좀 이상한가?”

“잘 안 보여서.”

그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선수를 쳐봤던 희림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강인하 성격에 대단한 칭찬을 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 정도로 솔직한 건 예상 밖이다. 이제야 그에게 단단히 따질 심산으로 찾아왔던 각오를 떠올린 그녀가 새침하게 그를 흘겼다.

“상관없어. 다른 사람들은 다 예쁘다고 했거든.”

“아아. 그래.”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든가.

그러냐 맞장구치는 무심한 감탄사에 더욱 속이 부글거렸다. 희림이 그만두자며 그에게 닿기 직전 걸음을 돌렸다.

“내가 오늘 누구 때문에…… 아아!”

파앗, 호숫가 가득 밝은 조명에 희림이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호수의 끝에서 끝까지, 마치 대낮처럼 밝아온 불빛에 숨이 저절로 멈췄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은 강인하뿐이었다.

“나는 오늘 누구 때문에 뭘 한지 알아?”

“강인하!”

“확실히 예쁘긴 하네.”

딸깍, 이 드넓은 호수의 주인처럼 연이어 불을 껐다 밝히는 그의 턱선이 오만하게 빛났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멍한 희림의 눈에서 끝내 시선을 떼어내지 않은 인하가 그대로 자신의 셔츠를 벗어 던졌다.

“안 입으면 더 예쁘겠지만.”

◇ ◆ ◇

풍덩, 호수에 뛰어든 인하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른 물놀이가 춥지도 않은지 그는 능숙하게 호수를 헤엄쳤다. 긴 팔이 호수의 검푸른 물살을 가를 때마다 그의 건장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뭐 해. 안 들어오고.”

“……”

혹시 세이렌이 남자였던가.

신화 속 이야기를 되짚어볼 만큼 호수 속 인하는 아찔했다. 이리 오라 손을 흔들면 언제든 거기에 홀려 발이 닿지 않는 곳까지 빠져버릴 것 같다. 

“한희림!”

“아, 안 들어간다구.”

“…….”

“난 그냥 여기가 좋아.”

또 한 번 저를 부르는 그에게 희림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그가 앉았던 선착장 끄트머리에 앉아 간신히 발만 담갔을 뿐인데 어쩐지 가슴까지 찰랑이는 기분이다. 제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여기서 잘못 발을 헛디뎠다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도 같다.

“왜, 마음에 안 들어?”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불쑥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그녀가 어느새 제 발치에서 고개를 든 인하에게 눈을 피했다. 멀리서 볼 때는 뭐든 홀려버릴 것 같은 신화 속 인물 같았다면, 이렇게 제 발끝에 닿을 듯 말 듯 구는 그는 그야말로 남자였다.

더 이상 어떠한 말을 보탤 것도 없는, 신체 건강한 남자.

“한희림, 너 전에 여기에서 수영하고 싶다며.”

“바보야. 그건 영화니까 그런 거지.”

“그럼 너도 영화 속에 들어오면 되는 거잖아.”

원하면 언제든 그리 만들어주겠다는 듯, 인하의 음색이 은근했다. 그보다 더욱 은근한 손이 슬쩍 그녀의 다리를 잡아보았다.

“미, 미쳤나 봐.”

“응. 맞아.”

발끈하면 그 김에 빠져나오려 했는데, 오늘의 강인하는 그런 얕은수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난 상반신 아래에 꼬리가 있다 해도 믿을 만했다.

“미쳤으니까 이런 짓을 벌였지.”

“하아…….”

“너 오기만 기다렸다고.”

그의 손이 이제 종아리까지 타고 올랐다. 어느새 희림의 두 다리 사이에 단단히 자리 잡은 그에게선 온통 뜨거운 열망만이 가득했다.

“들어오라니까.”

“……뭐, 뭐야.”

이제 무릎 위를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에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쩌면 키스를 할 때보다 더욱 농도 짙은 움직임에 숨이 차올랐다. 희림이 마지막 반항처럼 겨우 소리 높여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래봐야 소용없어. 안 속아!”

“뭘?”

“나 오는 것만 기다렸다면서 전화 한 통도 안 했잖아.”

“…….”

“내가 서울 가는 거 다 알면서도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결국 묻어둔 마음이 터져 나왔다. 뻔히 알면서 잡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인하에게 서운함이 울컥했다. 잡는다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냐마는, 적어도 강인하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기어이 싫다는 제 마음을 잡아 흔들어 제 뜻대로 해버린 강인하만은.

“너, 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음.”

“이래서 내가 우린 처음부터 안 된다는 거였다고. 내가 당장 서울로 가버리면, 야아!”

“가봐.”

“…….”

풍덩, 그녀를 잡아당긴 인하의 손이 이내 희림의 허리를 감쌌다. 놀란 그녀가 원망마저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미 인하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깊이 묻었다.

“뭐랄까, 넌 한 번씩 너무 순진할 때가 있어.”

“그, 그게 무슨!”

“정말로 갈 수 있을 거라 믿다니.”

널 어쩌면 좋을지.

짓궂은 웃음을 참는 그의 속삭임이 진득했다. 두 손 가득 움켜쥔 그녀의 몸 위로 그 소유욕이 더욱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만약 그녀가 단 한 발짝이라도 물러나면 어찌 나올지, 그의 잔혹한 본성이 그녀를 부추겼다.

“가봐. 응?”

언제라도 깊이 이를 박아 넣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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