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인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인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희림의 표정에도 점차 걱정과 불안이 휘몰아쳤다. 그 틈을 노린 성진이 그녀의 뒤로 붙어 섰다. 새 남자의 등장이 반갑지 않지만 저 기세로 혹시나 막말이라도 내뱉는다면 제게도 기회가 될지 모른다.
“강인하, 정말 너 여기는 어떻게…….”
“고마워.”
“…….”
“역시 네 말이 맞았어.”
나직한 음성의 인하가 희림의 앞에서 서서히 고개를 내리자 여자 스태프들의 숨죽인 비명이 이어졌다. 저 거칠 것 없는 태도로 다가와 저렇게 마음 녹이는 말을 꺼낸다면, 누구든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고맙다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으응?”
영문을 모르는 희림이 당황한 듯 어렴풋한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는 그렇게 그녀의 앞에 머물러 있었다. 보는 이들이 많은 곳에서 희림이 무엇을 조심하는지 안다. 그러니 더 다가갈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지켜볼 수밖에.
“나도 약속 지켰다.”
“어, 그, 그래.”
“…….”
표정조차 제대로 수습이 안 되는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다시 그를 잡고 싶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신문에 나버릴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에 그를 잡으면, 이제는 자신도 무어라 말을 해버릴지 장담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가 제게 그러한 것처럼.
“……잘 가.”
“응.”
“그리고 약속했던 거, 좀, 음……. 좀. 그 좀 있잖아.”
“알았어. 그럼 그때 봐.”
싱긋 웃으며 돌아선 인하는 이번에도 알아서 척척 해석을 마쳤다. 단 하나도 고칠 것 없는 그의 통역에 희림이 흩날리는 머리칼을 귓가에 넘겼다.
이게 뭐야.
처음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처음 귀가 트인 사람처럼, 드디어 모든 감각과 생기가 돌아왔다. 난데없이 등장해 더욱 난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는데도 이상하게 연유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수 있는 건 강인하는 제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흐흠, 희림 씨.”
“아, 네. 감독님.”
그녀가 제 뒤에서 헛기침해대는 성진을 향했다. 여전히 모여 있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성가시단 듯 그는 공연히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 어디까지 했더라…….”
“주제를 알라고”
“…….”
“거기까지 하셨어요.”
정색하듯 예쁘게 웃은 그녀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웃음을 참아대는 소리에도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만 향해 있었다. 약간의 눈총과 부끄러움 정도는 충분히 참아낼 자신이 생겼다.
이제 곧 약속을 지킬 시간이 찾아올 테니.
◇ ◆ ◇
“으흣.”
보름달이 뜬 밤, 서로의 입술을 헤집어드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노골적이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이리되었는지는 모른다. 숨 가쁘게 달려온 희림이 그의 집 문 앞에 서던 그 순간부터, 혹은 인하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던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그대로 뒤엉켰다.
“아…….”
단 한마디의 말도 필요치 않았다. 하루의 안부라든가 내일의 계획도 중요치 않았다. 그저 오늘만 사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하지만 아무리 희림의 마음이 급해봤자 인하의 그득한 열기를 따라가기는 힘이 들었다. 입술을 떼어낼 틈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든 그가 대뜸 그녀를 싱크대 위로 앉혔다.
“여, 여기서는 좀.”
“난 상관없어.”
겨우 정신을 차린 희림의 울 것 같은 눈에도 그는 가차 없었다. 커다란 창가에 한가득 들어찬 보름달을 등 뒤로 짊어진 그는, 가장 위험한 늑대처럼 목을 끓였다.
“난 좋아.”
“이, 인하야.”
“뭐든 좋아. 너랑 하는 건.”
하얗게 드러난 희림의 어깨 위로 그의 탁한 신음이 쏟아졌다. 꼭 그녀에게 들으라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반쯤 흐릿해진 그의 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진짜 오래 기다렸다고.”
“어, 얼마 안 됐잖아. 우리…… 그랬던 게.”
“일주일하고 열네 시간.”
“…….”
“삼 초 더.”
벌써부터 기울어져 있던 그의 고개가 희림의 벌어진 입술을 집어삼켰다. 희림의 숨이 가빠질수록 그의 피는 더욱 뜨겁게 끓어올랐다. 와르르, 그가 팔로 싱크대 위를 쓸어내리는 동시에 그녀의 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와장창 깨어지고 나뒹구는 소란에도 인하의 무섭도록 고요한 시선은 오직 그녀만을 담았다.
“…….”
달빛을 따라 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본능적인 기대와 초조함, 그리고 두려움 속에 희림이 반쯤 몸을 일으켰지만 인하의 손짓 한 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아…….”
너무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제 손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어깨를 눌러 잡았다. 이렇게까지 조절을 한다는 것이 저로서는 어렵다 못해 살을 베이는 고문과도 같다. 눈 감아, 마지막 인내의 경계선에서 인하의 두 눈이 자비 없이 번뜩였다.
희림이 눈을 떴을 땐 아직도 보름달이 휘영청 늘어진 한밤중이었다. 아직 멍한 정신에 언제 침대에 옮겨왔나 싶었지만 사실 침대는 마지막이었을 뿐이다. 싱크대에서 시작해 두 사람이 몸을 겹칠 수 있는 공간이란 공간엔 모두 누워본 것 같다. 그녀가 아직도 제 허리를 단단히 감은 인하의 팔에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얘는 정말 어떻게 살아온 걸까.
그를 볼 때마다 강해지는 의문이 오늘로 절정을 찍었다. 일주일 전 첫날밤도 견디기가 힘들 만큼 벅차다 싶었는데 오늘 밤은 그야말로 한여름의 폭풍우처럼 몰아닥쳤다. 온통 쏟아지는 거대한 빗줄기 속에 서 있는 기분이 이럴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중심을 잡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하는 끄떡도 없었다. 그 어떤 폭풍우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히 그 자리를 버티고 섰다. 깨물고 핥고 굴리고,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거침없었다. 한편으론 인간이 그런 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긴 했다.
제게 벌어진 일만 아니었다면.
“이제 좀 놓으라구.”
은근슬쩍 제 몸을 타고 오르는 그의 손에 희림이 기겁했다. 더 이상은 곤란하다며 우는소리를 하자 이미 깨어나 있던 인하가 모른 척 일어나 그녀를 제게로 끌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
“못 잔 거거든. 누구 때문에.”
“아아.”
건성으로 내뱉는 그의 감탄사가 얄밉기 그지없다. 반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웃음에 희림이 고개를 돌려 그를 흘겼다.
“이러면 반칙이라구. 집에 갈 체력은 남겨놔야 할 거 아냐.”
“집에 왜 가?”
“……너 바보니?”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나란 인간도 엄연한 집이 있다고. 희림이 그의 팔을 꼬집었다. 워낙 탄탄한 근육뿐이라 제대로 잡히지도 않는단 함정이 있긴 했지만 타이르는 음성만은 새침했다.
“너처럼 이렇게 좋은 집이나 카페는 아니지만 나도,”
“줄까?”
“…….”
언젠가처럼 지나가듯 무심히 던지는 그의 여상한 말에 희림이 움찔했다. 제 귀를 질근거리는 입술도 견디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인하의 이런 말도 모른 척 넘기기는 어려웠다.
“너, 넌 무슨 그런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해.”
“쉬워 보여?”
“…….”
“그럼 그렇다고 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의 대답에 희림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나무라기에는, 뜨겁게 내뱉는 숨결 어디에도 웃음기는 없었다. 차라리 농담이면 좋을 텐데 싶다가도 정말로 농담이라면 슬플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이해 못 할 그 울컥한 마음을 감춰보려 희림이 몸을 엎드렸다.
“……할머니 기다리셔서 정말로 가야 해. 네가 퇴원시켜놓고.”
“아아.”
그의 탄성이 조금은 달라졌다. 밤새 사람을 그리 멋대로 휘두르던 독재자의 모습은 어딜 가고 이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듯 좌절한 표정이 그답지 않게 우스웠다.
“가자, 데려다줄게.”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인하가 대충 셔츠를 걸쳤다. 세상이 다 망해버려도 개의치 않을 회의적인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단추를 잠가줄 때만큼은 더없이 세심했다. 손을 내밀어줄 때도, 좁은 길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완만한 쪽에 그녀를 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심해. 안겨 가기 싫으면.”
“…….”
사박사박 울리는 희림의 발걸음 하나마저 그냥 넘기질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가 더없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찡했다. 그래도 이제 셋을 세기 전에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만은 온몸으로 체득했다.
하나, 둘.
“음, 꽃순이는 자고 있으려나?”
“기껏 생각해낸 말이 그거야?”
역시나 그녀의 빤한 마음을 읽어내린 것처럼 인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건 좀 모른 척해주면 안 되냐는 희림의 타박에도 한동안 그의 웃음은 그치질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걱정이 되긴 하는지 막 보이기 시작한 그녀의 집 지붕으로 시선을 들었다.
“같이 들어갈까? 할머니가 너한테 뭐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건 걱정 마. 내가 오늘 다 손써놓고 왔거든.”
“……어떻게?”
“그냥, 그런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