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제일 먼저 정씨 할머니를 지목한 희림이 얼른 가져오라 손을 내밀었다. 얼마나 깔끔하고 확실하게 처리할지 보여주겠다며 소매까지 걷어 올렸다.
“지금 주시면 바로 해드릴게요.”
“잉? 안 해줘도 되는디.”
“……왜요?”
“그냥 군청 박 주사한테 해달라고 했지 뭐. 해줄 때까지 안 가고 떡하니 버티는데 어쩌겄어.”
관두라는 정씨 할머니의 웃음이 유쾌했다. 잠시 가슴을 들썩이던 희림은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다음 할머니로 넘어갔다.
“그럼 복사골 할머니는요? 저한테 농약 라벨 영어로 적혀 있다고 물어볼 거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이구 세상이 변했는디 구불인지 구들인지 거기에서 다 찾아봤제.”
“……그, 그러셨어요?”
희림이 어깨를 으쓱하는 할머니를 애써 모른 척했다. 그래, 정보화 시대에 이런 변화의 물결은 받아들이는 게 순리다. 고심하던 그녀가 그깟 기계는 끼어들지 못할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참, 주말에 농촌청에서 하는 새 작물 시범 보러 갈 때 봉고차 빌려서 가야 하잖아요.”
“그거 인하가, 아니 새 회장님이 해주기로 했는디?”
“…….”
더는 태연하기가 힘들어 희림의 숨소리가 씨근덕거렸다. 꽉 다문 턱에도 파르르 힘이 들어갔다.
“그거 말구 전에 산림과에서 요새 산나물 불법 채취 때문에 실사 나온다고 한 것도 있는데.”
“아따, 그것도 새 회장님이 싹 다 해결해주셨지!”
“…….”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 할머니들이 손사래를 쳤다.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새 회장님과 함께하는 꽉 찬 일과를 줄줄 읊어대는 목소리가 노래처럼 경쾌했다.
그에 반해 희림은 점차 말이 없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슴만 들썩이더니 결국 주섬주섬 신발을 꿰신었다.
“응? 회장님! 이렇게 가면 어째!”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새 회장님이 다 알아서 하시겠지.”
심히 엇나간 그녀가 흐느적대는 몸을 세워 일으켰다. 발목에 천근만근 추가 달린 것처럼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나아가는 희림에게로 할머니들의 머리가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아이구, 우리 회장님 저 발목으로 서울 가서 어쩌려고.”
“그니께. 약이라도 한 제 멕여서 올려보내야 하나.”
“그래서 말인디 우리 집에 영지 말려놓은 거 아직 남았는데 그걸로…….”
모인 수만큼이나 다양한 비책이 쏟아져 나왔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그녀를 기운 차리게 해주고픈 마음만은 여느 의사들 못지않았다. 온갖 걱정을 담아내던 정씨 할머니가 쓸쓸히 운을 떼어냈다.
“……근디 우리가 이러는 게 맞겄제.”
“별수 있나. 그래야제.”
이제껏 자신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준 회장님을 위해서라면 그리해야만 한다. 곧 더 큰 세상으로 떠날 친손녀 같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었다. 더는 걱정 않도록 천하태평한 웃음도, 보란 듯 씩씩하게 내어본 힘도, 해도 해도 입에 익지 않는 꼬부랑 거짓말까지도.
“근디 시상에, 미국에서도 구들을 다 쓴댜?”
◇ ◆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30여 분의 길 위에도 겨울은 다채롭게 펼쳐졌다. 꽁꽁 얼어붙은 흙을 밟을 때도, 그늘진 갓길에 쌓인 눈이 사박거릴 때도, 얇게 낀 살얼음판이 미끌거릴 때도, 나는 지퍼를 채우는 대신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청연에서 가장 기록적인 한파라던 그날은, 그녀가 없는 하굣길로 기억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하굣길에 얼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였다.
‘겨울’ 4장, 이상기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