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오늘 너네 서점 찍어 간다면서?”
“어……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사진만 몇 장 찍어 가고 진짜 촬영은 다음 주라고.”
“어쨌든 정하 네가 나오긴 나온다는 거잖아.”
“…….”
“근데 넌 옷이 그게 뭐야? 길 가다 주워 입었니?”
제대로 보지 않는 것치고 연주의 평은 날카로웠다. 그럴 줄 알았다며 차곡차곡 꺼내는 셔츠며 소품들을 위한 밑밥일지언정, 그녀의 손은 더욱 바빠졌다.
“타이 좀 대보게 고개 좀 들어봐.”
“내, 내가 하면 되는데.”
“너 되게 웃긴다. 내가 뭐 너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충분히 그래 보임에도 연주는 대뜸 큰소리를 쳤다. 인하는 물론 희림에게까지 눈을 부릅뜨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청연군청 공무원이야. 안정하 네가 조금이라도 더 그럴듯하게 나가야지 사람들도 더 많이 올 거고 그래야 청연군에 보탬이 될 거라는 생각 안 해봤어?”
“……그러면 일종의 공무 수행 중이라는 거야?”
“알면 됐어.”
“…….”
기껏 생각해낸 게 그거였니.
더는 감당하기 힘들어진 희림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하도 데리고 나와야 하나 했지만, 역시나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멀쩡한 그의 두 팔이 얌전히 모여 있는 걸 보면 기우였다. 말 한마디 없이도 누구보다 가까이 붙어 앉은 두 사람을 보던 그녀가 서점 문을 열었다.
조연주와 안정하가 둘이 뭘 하든 알 바 아니지만, 아니 반가운 일이지만, 정작 그들을 지켜보기 힘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나도 저렇게 억지스러워 보였으려나.
서점 밖 벽에 기대선 희림이 눈가를 문질렀다. 저렇게라도 정하를 보고 싶어서, 정하의 곁에 있고 싶어서, 며칠 밤낮을 지새웠을 연주의 모습이 창문에 거울처럼 비쳐났다. 평소라면 배를 잡고 웃어댔을 그 광경이 어쩐 일인지 조금도 우습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러면 안 되는 일이다.
그럴듯한 이유든 아니든, 시도 때도 없이 인하의 집에 드나들던 자신만은.
“희림 씨, 안 들어가고 왜 나와 계세요?”
“……조감독님.”
그녀가 제 옆에서 분주한 조감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다들 촬영 준비로 바쁜 와중에 저 혼자만 넋을 놓고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뒤늦게 어색한 미소를 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제가 뭐라도 도와드릴까요? 사실 잘 모르긴 하지만.”
“아뇨. 다 됐어요. 희림 씨야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주셨는데요 뭘!”
사람 좋게 웃은 조감독이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희림이 워낙에 싹싹하고 성실하기도 하지만, 지난번 김 피디에게 한 방을 먹인 이후로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배로 올라갔다. 일부러는 아니겠지만 자신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 희림에겐 뭐든 해주고 싶었다.
“희림 씨 나중에 서울 오셔서 이쪽 일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 친구가 외주 프로덕션에서 일하는데 희림 씨 소개시켜드릴게요.”
“……뭘 그렇게까지.”
“아니에요. 진짜 잘하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어차피 서울 오셔서 일하시긴 할 거잖아요.”
조감독의 드문 호의에도 희림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당장 제 마음도 모르는 판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쩐 일로 말이 없는 그녀 모습에, 조감독이 서점 안을 힐끗거렸다.
“들어가서 친구분들이랑 좀 더 쉬지 그러세요. 다들 친하신 것 같은데.”
“아뇨. 빠질 때는 빠져줘야 해요.”
“아아, 그런 거였구나!”
조감독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환히 웃었다. 따라 웃는 희림의 미소가 조금은 시원섭섭했다. 이제는 제 자리가 없어진 서점 대신 다시금 벽에 기대려던 그녀가 문득 제 옆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늘상 인하가 서 있던 빈틈에 자리한 카메라가 어딘가 어색했다.
“카메라는 왜 저기에…… 제가 옮겨드릴까요?”
“아뇨. 일부러 자리 잡아둔 거라서요.”
“일부러요?”
뜻밖의 대답에 그곳으로 다가가던 희림이 멈칫했다. 이미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인 조감독은 만족스레 입가를 올렸다.
“최대한 서점 구도 잘 잡아보려고 하루 종일 카메라 들이댔는데 여기서 제일 예쁘게 보이더라고요. 시작 화면으로 쓰면 좋겠다 싶어서.”
“아아.”
“한번 보시겠어요?”
그녀가 가까이 와보라 손짓하자 주춤하던 희림이 다가갔다. 어차피 서점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어디 얼마나 예쁘게 보이는지 확인해보겠다며 카메라로 눈을 내렸다. 그래봐야 매일 보는 곳이니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아…….”
“어때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대답이 없는 희림 대신 조감독이 호들갑을 떨었다. 색감이며 느낌이며, 본인의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역시나 그녀처럼 빠져든 건지 희림은 한참 동안 카메라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네요.”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 스툴이 제 눈가에 찰랑였다. 결 고운 벨벳도, 낡은 받침대도, 그녀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희뿌옇게 일그러졌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따스한지, 보일 듯 말 듯 한 귀퉁이에 헤어진 올조차 제 마음을 묶어두기에는 충분했다.
다만 왜 그러냐 묻는 조감독에게는 따로 할 말이 없어 억지로 뜨거운 숨을 삼켜보았다.
“음…… 너무 더워서요. 정말 여름인가 봐요.”
◇ ◆ ◇
청연에 자리를 잡은 지 두 달째, 이제 인하는 이곳의 생활에 나름대로 적응했다. 경적 대신 풀벌레 소리라든가, 유독 하루가 짧은 것 같은 착각이라든가, 느닷없이 몰려온 방문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희림이 이상하다고요?”
“잉! 그렇다니께!”
앞장선 정씨 할머니가 강력하게 선창을 했다. 이어 현 회장의 이상행동에 대해 고발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오늘도 막 혼자 중얼중얼, 사람이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고.”
“어제는 길 가다 보이는 돌이란 돌은 다 주어차고 다니더라니께?”
“아아…….”
턱을 받친 인하가 고심에 잠겼다. 표정이 얼마나 진지한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의 표정도 한껏 진지해졌다.
“아까도 내가 ‘회장님 어디 가셔?’ 한마디 했다고 자기가 어딜 가든 생각이나 나시겠냐고 입이 댓 발로 나와서는!”
“우리 회장님이 그럴 사람이 아닌디!”
“…….”
“하여튼 이게 다 새 회장님 때문이여.”
“…….”
아, 이런 거구나.
고개를 든 인하가 다짜고짜 제게로 쏟아지는 화살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희림이 미리 일러두지 않았다면 저조차도 크게 당황할 뻔했다.
“우리 할머니들이 좀 두서가 없어. 잡초 뽑다가 뿌리 끓어져도 옆에 지나가는 너 때문이고, 바람 세게 불어서 넘어져도 달리기하는 너 때문일 수도 있다고. 난 티브이 보다가 좀 크게 웃었다고 3년 전에 온 태풍이 나 때문이란 소리까지 들었으니까.”
“……네에, 그렇군요. 저 때문이군요.”
“그렇잖여. 인하 네가 희림이 안 그래도 바쁘니까 편하게 해주자고 하도 그래서 우리가 신경을 못 쓴 사이에 우리 회장님이 아주 못쓰게 되어부렸다고.”
하지만 이번 항의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할머니들을 직접 찾아가 부탁했던 인하도 그 부분에 대해 인정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어쩌긴 어째! 새 회장님이 우리 회장님을 책임져야지!”
“…….”
왜 좋아하고 난리래.
처음이니 다소 강하게 나가봤던 정씨 할머니가 인하의 빙긋한 미소에 움찔했다. 본인들도 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일단 기선이나 제압하고 보자 했던 건데 이렇게까지 순순히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 구척장신 천하장사 새 회장님께서.
“……그러니까, 우리 말은 이거여. 그냥 우리 회장님 그런 데는 새 회장님도 일말의 책임이 있으니까는,”
“질게요, 책임.”
“…….”
뭐여, 이거.
뒤로 둘러싼 할머니들까지 연이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기는 해도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보단 낫다. 아직도 동요하는 이들을 향해 인하가 제 의견을 분명히 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으응. 그려?”
“네. 제가 아니면 누가 책임지겠어요. 한희림, 아니 회장님을.”
인하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툭툭, 가슴 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은 회원들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 회장님이 아주 요새 얼굴이 반쪽이 돼가지고는.”
“되돌려놓겠습니다.”
“한숨도 얼마나 쉬는지 몰러.”
“제대로 숨 쉬게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좀 있으면 지 할매 모시고 서울 올라가야 할 애가,”
“……그게 무슨.”
교육받은 대로 철저하게 마크하던 인하의 눈초리가 어긋났다.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 분명한 그의 굳은 얼굴에 정씨 할머니가 고개를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희림이 서울 가잖여!”
“……언제요?”
“조만간 가겄지. 온천댁이 이제 서울 가겠다고 아들한테 말했다니께.”
“…….”
“하여튼 손녀 생각 하나는 끔찍한 사람이여. 죽을 때까지 절대 여기 못 나간다던 사람이 희림이 때문에 더는 안 되겠다고 그러지 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