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노심초사, 인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계모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비서로 먼저 알고 지낸 사이였다. 불편한 것이야 당연했지만 그녀는 과할 정도로 인하의 눈치를 보았다.
“정말 미안하구나. 그래도 내가 평소에는 이 방 잠가놨었어. 절대로 못 들어가게 했으니까 그건 믿어도 돼.”
“네. 알아요.”
“…….”
인하의 대답에 그녀가 알 듯 모를 듯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다 싶었는지, 어느새 몸을 낮춘 인후가 다시 제 형의 곁을 어슬렁거렸다.
“형, 그런데 있잖아.”
“인후 너 아직 안 나오고 뭐 해. 엄마가 뭐라고 했어. 형 오랜만에 왔으니까 쉬게 두라고 했잖아.”
“아뇨. 놔두세요.”
“……응?”
“그냥 두세요. 남도 아니고.”
그럴 것 없다는 인하의 대답에 그녀가 크게 움찔했다. 으응, 그래.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이 머뭇거렸다.
“왜요? 다른 일 있으세요?”
“아니, 그게…… 음.”
이쯤이면 내려가고도 남았을 그녀가 어쩐 일인지 걸음을 떼어내지 못했다. 인하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건만, 공연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기…… 오늘 내려가는 거니?”
“…….”
“아니, 가라고 물어본 게 아니라 마, 말을 잘하려다 보니까.”
말이 꼬여버린 그녀의 뺨이 가여울 만큼 붉어졌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 급해졌다.
“내 말은, 이왕 올라왔으니 호텔 말고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을 거 같아서. 시골 내려가기 전에 너 살던 오피스텔은 정리했으니까 서울에는 집이 여기뿐이고, 또 네 아버지도 너 왔단 소식 듣고 오늘 빨리 오신댔거든. 이왕이면 얼굴도 보고 저녁도 같이,”
“내려가봐야 해서요.”
“아…….”
“죄송합니다.”
인하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도 어정쩡하게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관계에도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형에게 꼭 붙어 있는 자신의 아들을 넘겨다본 그녀가 소리 없이 아래층으로 물러났다.
“우리 엄마 말 되게 빨리 한다. 그치, 형?”
“응. 그러네.”
“그런데 형 진짜 그렇게 빨리 가야 하는 거야?”
“…….”
제 엄마보다 조금 더 솔직한 아이의 감정 표현에 인하가 웃음을 참았다. 사실 돌아가는 것은 내일이다. 예약해둔 물건이 내일 오후에야 준비가 된다니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 굳이 설명할 이유도,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형.”
“사실은 이거 가지러 온 거라서.”
앨범을 들어올린 인하가 적당한 웃음으로 말을 돌렸다. 다행히 어린 동생은 금세 관심사가 바뀌었다.
그가 두고 온 청연의 할머니들처럼.
“이거 졸업 앨범이지? 나 알아!”
“응.”
인후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에 티를 내야만 하는 지극히 그 나이 대의 아이였다. 벌써부터 바짝 붙어 앉은 아이가 표지 위 금박의 글자를 따라 읽었다.
“……42회 청연고등학교, 뭐야! 그럼 형이 42살이었어?”
“그건 아니고.”
“아아, 다행이다. 놀랐잖아아!”
다짜고짜 안도하는 아이에게 인하의 웃음도 깊어졌다. 그리 오래 본 사이도 아니건만 왜 이렇게 낯설지가 않은지, 이제 제 무릎에 닿을 듯 말 듯 하는 아이의 손도 모른 체했다.
“음, 그럼 형 사진도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겠지.”
“우와. 어디에 있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
“아직 한 번도 안 봤거든.”
앨범의 표지를 매만지는 그의 손끝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미련과 회한, 아릿한 웃음이 차례대로 맴돌았다. 감정에 쉽게 동요하는 아이답게 인후는 금세 눈썹을 팔자로 몰았다.
“왜 안 봤어?”
“그러다 정말로 봐버릴까 봐.”
“응? 왜 보면 안 되는 건데?”
“그냥, 그랬어. 그때는.”
열한 살 아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 대신 인하가 아이의 머리를 쓱 문질러주었다. 뭐든 익숙하게 굴 것 같은 아이의 뺨이 서서히 붉어졌다. 얼른 내려가 이 사실을 엄마에게 자랑하고픈 갈등을 이겨낸 인후는 새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해를 못 해도 하는 척, 그래야 형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그랬구나아. 사진을 볼까 봐 사진을 안 봤구나.”
“응.”
은근히 정확한 동생의 정리에 인하가 턱을 괴고 웃었다. 다시 한번 머리를 쓸어주는 손 아래로 고개가 갸웃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봐도 되는 거야? 보면 어쩌려고?”
“왜냐면, 이젠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아아!”
아마도 희림이 봤다면, 모르면서 아는 체하지 말라고 했으려나.
그녀의 반응을 떠올려보던 인하의 입가가 빙긋이 올라갔다. 언젠가의 저처럼,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인후의 노력에 공감해주었다.
“이젠 못 했던 졸업도 할 수 있을 거 같고.”
“졸업해? 다행이네. 형 축하해!”
“응. 고마워.”
결국 터져 나온 웃음에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인하의 자세가 조금 더 편해졌다. 정말로 제집처럼 걸터앉은 그가 아이의 눈에도 새로운 모양이었다.
“그러면 형 정말 오늘 기분 좋겠다!”
“그럼.”
“응…… 그러면 정말로 자고 가면 안 되는 거야?”
제가 가장 행복할 때를 노려 인후가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 역시 그로서는 수도 없이 겪은 뻔한 수였지만 차마 떨쳐내지를 못했다.
지난 두어 달 단 한 번 그러지 못했던 것처럼.
“……형? 제발. 제발 제발이야.”
“그건……. 음, 잠시만.”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던 인하가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들었다. 아이들만큼 본능에 민감한 존재가 없다. 어쩌면 형이 제 말을 들어줄지 모른다고, 희망에 부푼 인후의 눈망울이 그를 좇았다.
“응. 나야.”
“…….”
수화기 속 목소리를 듣자마자 인하의 입가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이젠 더욱 자연스럽게 인후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던 그의 손이 멈칫 굳었다. 인후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제 형은 무섭게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가. 거기가 어디라고?”
아빠의 뒤에 숨어 멀리서 지켜만 봐야 했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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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일보,
기자의 사정으로 오늘은 휴간합니다. 사건사고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