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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9/80)

68화

“조연주 너나 정하나 어디서 무슨 일 당하고 그러면 악착같이 다 엎어버릴 거야!”

“너…….”

이제 알겠니.

기어이 연주를 돌려세운 그녀가 얼마 전 기억을 상기시키듯 조용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입이 커다랗게 벌어진 연주가 어디 다 같이 죽어보자며 주먹을 휘두르려 했지만 희림도 녹록하지는 않았다.

“뭐 해. 얼른 가라니까.”

“한희림 너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너 여기 놔두고 집에 가면 발 뻗고 잠이나 자겠냐고! 평생 너한테 저주 걸려서,”

“누가 집에 가래?”

희림이 무슨 소리냐며 일부러 더 매섭게 연주를 훑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뜻을 알 수 없는 연주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연히 정하랑 있어야지.”

“…….”

“지금 걔가 이 꼴까지 봐야 속이 시원하겠니. 여기 못 오게 누구 하나는 가서 잡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겨우 떼어놓고 왔다지만 안 올 정하가 아니다. 아마 벌써 도착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정하가 이 상황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에 연주의 표정도 본능처럼 굳어졌다.

“……회, 회장.”

“얼른 가. 정하 얼마나 빨리 잘 걷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지긋지긋한 호칭은 못 들은 체 넘긴 그녀가 주춤거리는 연주를 문밖으로 몰아냈다. 몇 번 돌아보는 듯하던 연주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에 두어 칸씩 계단을 내려서는 친구의 뒷모습에 희림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무슨 대단한 우정 납셨네!”

“…….”

마침 담배를 태우고 들어서던 성진이 기어이 비아냥을 쏟아냈다. 있는 대로 눈을 부라리는 그를 본체만체한 희림이 조금 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성진은 더욱 열이 올랐다. 

“한희림 씨! 지금 끝까지 사람 무시해?”

“…….”

“사람이 호의를 보이면 ‘네 감사합니다’ 하지는 못할망정. 사람이 실속이 있어야지 친구 위하는 마음이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어차피 한 걸음만 걸어도 티 다 나는 거 그렇게 어설프게 괜찮은 척 굴 바에야,”

“어설퍼?”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받친 채 귀를 닫았던 희림이 결국 두 손을 짚고 일어났다. 하, 탄식 같은 웃음의 색이 달라졌다. 비스듬히 돌아선 그녀의 눈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경멸이 끓어올랐다.

“당신 눈엔 그게 어설퍼?”

“이봐! 한희림 씨!”

“안정하…… 내 친구 정하가 그렇게 걷는 데까지 1년이 걸렸어. 목발 빼고 걷는 데는 2년이 걸렸다고. 당신 그 꼴같잖은 인터뷰 하나 하려고 밤낮을 새워가며 균형 잡았을 애가 어설프다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수백 번 반복한 내 친구가 어설퍼? 당신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아본 적이나 있고?”

“…….”

“두 발로 서 있다고 다 사람이라 착각하지 마.”

또각또각 울리는 그녀의 걸음마다 피처럼 붉고도 묵직한 자국이 남았다. 서느런 그 기세에 놀란 성진이 대뜸 자신을 보호하듯 주춤주춤 손을 올렸다.

“이, 이거 보라니까! 이렇게 또 천지 분간 못 하고 눈이 뒤집혀서는,”

“내 눈엔 인간 안 되는 네가 피디랍시고 사람 흉내 내며 사는 게 더 어설프다고.”

“허…….”

“고소하려면 해. 더한 것도 해. 어차피 너 같은 놈은 뭘 해도 어설플 테니까.”

너 같은 건 잡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의 코앞에서 손을 턴 희림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가운데 한동안 그 분주한 파출소 안이 적막에 잠겼다. 웅성임조차 없는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린 성진이 입을 열려 했지만 희림은 그마저도 앞질렀다.

“저어, 주소 마저 부를까요?”

“아…….”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에 지켜만 보던 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을 끌 만한 일은 아니다.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하려던 그가 타이프에 손을 올리던 그 때, 파출소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한희림. 너 뭐야.”

◇ ◆ ◇

이제는 봄도 끝물이라는데 밤공기는 아직도 찼다. 간략한 조사를 마치고 나온 희림이 그새 캄캄해진 주위를 바라보았다. 뒤따라 나온 경찰이 인하를 잡고 하는 이야기가 귓가에 헛돌았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면 되고요. 아까 저쪽 반응 봐서 알겠지만 이대로 넘어갈 거 같지가 않네요.”

“네.”

“아마도 기어이 고소할 모양인데 고의든 아니든 머리에 상처가 나긴 했으니 어딜 가서든 진단서를 떼어 오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겠죠.”

“휴우우, 하여튼 내가 경찰만 아니면!”

모자를 벗은 순경이 새삼 답답한 얼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주위에서 그리 말려대는데도 기어이 제 뜻대로 우기는 성진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사람이 할 말이 있고 아닐 말이 있지. 세상에 책방 안 사장 같은 사람이 또 어딨다고.”

“…….”

“흐흠, 어쨌든 일 커져서 좋을 건 없으니 오늘이라도 회장님 잘 한번 설득해보시죠. 합의금은 둘째 치고 사과라도 받아야 그나마 일이 쉬워질 분위기라서요.”

그나저나 우리 회장님한테 저런 면이 다 있었다니.

계단 한구석에 얼음 조각처럼 서 있는 희림을 힐끗거린 순경이 인하에게 꾸벅 묵례했다. 따라 고개를 낮춘 인하는 문이 닫히고야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너 안 추워?”

“미안해.”

그의 고저 없는 어조에 내내 다물려 있던 희림의 입술이 벌어졌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천천히 다가서는 인하는 여전히 담담했다.

“뭐가?”

“너 멀리서 이 밤에 내려오게 해서. 진짜 오랜만에 간 거였을 텐데.”

“…….”

“너한테 전화하면 안 됐는데. 할머니 아시면 또 쓰러지실지도 모르니까. 내가…… 내가 한 번 더 참았어야 하는 건데.”

눈을 내리깐 희림의 말이 갈수록 흐트러졌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흐릿한 그녀의 눈빛 앞으로 인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

“정말 후회해?”

희림의 양어깨를 부여잡은 그의 두 손에 무겁지 않은 힘이 들어갔다. 그저 희림의 두 눈이 제게 향할 만큼만, 그녀를 바라보는 인하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 너한테 그런 거 바란 적 없어.”

“인하야.”

“안 참아도 돼. 네가 언제부터 참았다고.”

마주 닿은 시선 속, 그가 연이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넌 너일 뿐이라고. 난 그런 네가 좋았다고. 언제고 들었던 그의 말이 바람결을 타고 흘렀다. 깜빡임 한번 없이 그를 응시하던 희림의 눈에 기다린 것처럼 투명한 눈물이 찰랑였다.

“흐으으윽. 나 감옥 가면 어떡해애!”

“한희림.”

“나, 하다 하다 여기서 감옥까지 가면. 나 진짜 감옥 가면 어쩌지? 흐으윽.”

참고 참은 그녀의 눈물이 두 뺨을 따라 흘렀다. 기다란 인하의 한숨이 당혹스럽기도,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겨우 참아낸 그가 희림의 두 뺨을 닦아주었다.

“감옥 안 가. 안 보내.”

“흐윽, 그, 그런데 저놈이 나 보낸대. 나 보내버리겠대. 그럼 어쩌지?”

“그건…….”

희림의 손끝을 따라 잠시 고개를 돌렸던 인하의 이에 아득거리는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렁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을 땐, 다시금 다정하고 담담하게 진실에 가까운 다짐을 읊조렸다.

“어쩌긴 어째. 나도 같이 가는 거지.”

◇ ◆ ◇

“아, 강인하 그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하루 종일 그 생각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한밤중에 눈이 가물거릴 때도, 한 가지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아빠와 문제집을 사러 가면서는 차마 못 했던 말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정하에게는 술술 나왔다.

“걔 진짜 웃기지? 자기가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말을 많이 했다고.”

흥, 정안까지 나가서도 핀잔 같은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손으로는 알록달록한 편지 봉투를 고르며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한 사람을 좇았다. 그러느라 맞은편에 선 정하가 절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급하고 중요한 거면 그냥 미리 말을 해주든가. 몇 번이나 물어봐도 모른 척 굴지를 않나.”

“…….”

“혹시 엄청 중요한 말인가?”

설마.

떠오른 생각에 공연히 목덜미가 홧홧했다. 연신 침을 삼켜봤지만 그 정도로는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갈수록 마음을 넓게 물들여갔다. 그리도 까칠한 강인하가 제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게 터무니없다가도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싶었다.

그리도 그를 못마땅해했던 자신 역시 그런 마음이 들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음……. 정하 너한테는 혹시 미리 말한 거 없어?”

한번 인지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멈출 수가 없었다. 주르르 편지지를 넘기는 손길만 두서없이 빨라졌다.

“아, 아니면 짚이는 거라도. 그래도 강인하가 너랑은 좀 말하는 편이었으니까.”

“아마도 너 좋아한다고 할 거 같은데.”

“……으응? 정말?”

“응,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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